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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지식

레이테 해전 서막, 일본 연합함대와 미국 연합함대 전력 비교

by 소시민스토리 2024. 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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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테 해전 서막, 일본 연합함대와 미국 연합함대 전력 비교

사상 최대의 해전 레이테 해전은 미국과 일본의 군함이 약 300여 척, 배수량은 총 250만 톤으로 기네스북에 기록되어 있다. 기네스북에 가장 큰 해공전투(해군과 공중전)로서 역사상 최대의 전투로 기록되어 있다.

 

태평양전쟁, 일본 해군의 레이테 해전 준비

 

태평양전쟁, 일본 해군의 레이테 해전 준비

태평양전쟁, 일본 해군의 레이테 해전 준비 필리핀 방어를 맡은 사령관은 야마시타 도모유키였다. 싱가포르 함락 이후 야마시타 도모유키는 조용히 숨죽여 지낼 수밖에 없었다. 도조 히데키와

bringbacon.tistory.com

 

일본 연합함대 구성

 

연합함대 사령장관은 '도요다 소에무'이고 필리핀 해전에서 항공력으로 결전시도했다가 실패했기 때문에 레이테 해전의 주역은 수상함대로 바뀌었다.  '구리타 다케오' 장관이 이끄는 제2함대가 주력을 맡게 된다.

제2함대 밑에는 당시 남아있던 일본 주력 수상함들이 다 들어있다. 밑에는 전대로 편성이 되어있다.

함대와 전대의 차이는 전투를 치르기 위해서 해군에서 군함 2척이상 모여서 편성하는 것은 함대라고 한다.

함대를 뒤섞어서 출진하면 지휘통제가 어렵다. 항진하면서 다양한 작전 구사 및 순조로운 실행을 위해 비슷한 함급으로 묶어 전대를 편성한다.  함대 밑에 전대가 편성이 되어있다. 각 전대는 거의 비슷한 함정들끼리 묶어둔다. 

 

제1전대는 나가토, 야마토, 무사시 전함들로 구성된 전대이다. 제2전대, 제3전대도 전함으로 전대가 구성되어 있다.  제4전대, 제5전대는 순양함으로 구성된 전대이다. 전함, 순양함을 지원할 구축함이 필요하다. 구축함들은 수뢰전대로 구성된다. 이런 식으로 다양한 전대들이 배치되어 있다. 구리타 함대의 조력 함대는 니시무라 제독이 이끄는 니시무라 함대가 편성되어 있다. 일본 함대 제1유격부대 3부대라는 명칭이 있지만 '니시무라 함대'라고 부른다. 

껍데기만 남은 항공모함, 미끼로 쓰일 처연한 신세가 된 '오자와 지사부로'의 제3함대가 있다. 

항공모함으로 구성된 항공전대들이고 항모는 4척인데 함재기는 고작 110여 대 뿐이다. 

 

 

이밖에 남방지대에 배치되어 있는 함대도 있었고 알류산 열도를 방어하던 부대도 있었다. 알류샨 지역을 방어하던 홋카이도에 배치되어 있던 '시마 기요히데'가 이끄는 북동 방면함대 소속 제5함대를 레이테로 이동 배치한다. 

도요다 소에무 1944년 당시 일본 해군 연합함대 사령장관으로 어뢰 운용 및 포격전문이었다. 작전통으로 해군 내 요직을 두루 거친다. 야마모토 사망후 순번상 자신 차례라고 기대했는데 일본의 해군사관학교 해군병학교 1년 후배 '고가 미네이치'가 영전된다. 1944년 3월 해군 乙사건으로 실종 처리된 고가 미네이치 대신 드디어 연합함대 수장으로 취임한다. 1945년 5월 일본 군령부(해군) 총장으로 승진한다.

 

일본 제2함대 사령장관 '구리타 다케오'는 학자집안 출신이다. 활동적이고 만능 스포츠맨으로 테니스, 궁도, 검도 실력자였고 심지어 야구선수 출신이다. 수영은 달인급이었다. 전투에서는 적극성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는다. 합리적이지만 모험을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중요한 순간에 결단력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는다.

 

제1유격부대 3부대 지휘관 '니시무라 쇼지'는 야전형으로 수뢰전 전문이었고 주특기는 적함 발견이었다.

별명은 '파수꾼의 왕'이었다. 감시의 신으로 관측 실력이 탁월했다. 아들이 3명이었는데 해군 대위 시절 두 아들을 잃었고 무사히 자란 큰 아들은 자신의 뒤를 따라 해군 대위로 됐는데 1941년 12월 필리핀 근해에서 작전 중 전사한다. 복수를 다짐하며 죽음을 각오하고 레이테 해전에 출진했다고 한다.

 

일본 제3함대 사령장관 '오자와 지사부로'는 수뢰전 전문가이면서 함재기 운용에 일가견이 있었다. 필리핀해 해전에서 아웃레인지 전법을 구사했다. 198cm로 키가 컸고 투박한 얼굴생김새로 일본의 해사 해군병학교 시절 별명은 '도깨비 기와' 였다고 한다. 부하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지만 부하들을 희생시키는 특공작전 (가미카제)에 관여했다. 

 

북동 방면(홋카이도) 함대 제5함대 사령장관 '시마 기요히데'는 실전 경험이 가장 적었다. 주로 통신술 전문가였고 신중한 성격의 소유자였고 대만항공전 당시 임무는 홀시의 미 3함대를 추격하라는 임무를 받는다. 

대본영이 발표한 대만항공전 전과에 의문을 가지고 추격을 중지했다. 결과적으로 홀시의 유인작전에 휘말리지 않았다. 

 

각 함대에 배치된 군함

제2함대 구리타함대는 일본의 강력한 함대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나가토, 야마토, 무사시 전함이다.

나가토는 1차대전 이후 2차 대전 시작할 때까지 일본 해군의 상징 전함이다. 전함 야마토, 무사시는 일본 해군의 비장의 무기였다. 군축조약 탈퇴 후 1937년 몰래 건조를 시작해서 1941년 12월 야마토가 취역하고 1942년 8월 무사시가 취역했다. 야마토와 무사시는 94식 45 구경 46cm 3 연장 세계최대 주포가 장착되어 있었다.

당시 항공모함 등장 이전 전함은 오늘날의 전략 무기와 똑같았다.  바다를 지배했던 나라가 세계를 지배했던 시절이었다.

 

 

 

일본 해군 제2함대 정박지는 싱가포르 주변이었다. 이전에 미군 공습에 일본 연함함대 기지가 이동된 것이다. 함대를 움직일 연료 보급이 최우선이었기 때문에 남방자원지대에 가까운 싱가포르 지역에 정박하고 있었다. 링가 정박지에서 출항하여 브루나이를 거쳐서 필리핀 레이테로 항진하기 시작한다. 

 

전함 나가토는 일본 최초의 슈퍼 드레드노트급 전함이었다. 세계 최초 16인치 주포가 탑재되어 있고 영국 퀸 엘리자베스 설계도를 받아서 건조했다. 야마모토 사령장관이 승선해 진주만 공습 당시 기함이었다.

야마토는 사상 최대 함포 18.1인치(46cm)주포가 탑재되어 있고 만재 배수량은 72,800톤이었다.

무사시는 야마토 자매함이었다. 야마토급 2번 함이었다. 일제가 가장 마지막에 건조한 전함이다. 일본군은 야마토와 무사시는 절대 침몰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1943년 4월 18일 솔로몬제도 부겐빌섬 상공에서 격추당한 야마모토 이소로쿠 유골을 안치해서 전함 무사시로 일본까지 운구했다.

 

야마토급 전함 건조 비용 조달은 당시 일본 국력으로는 무리였다. 1937년 3차 군비보충 계획을 실행할 때 해군에서 계획을 했는데 예산이 어마어마했다. 시험적으로 계산한 당시 건조 비용은 약 1억 2천만 엔이었다.     3차 군비보충 계획은 전체 예산은 8억 엔이었다. 전함 야마토, 무사시 2척 건조 예상비용은 약 2억 4천만 엔이었다. 실제 건조 비용 1 척당 약 1억 4천만 엔이었다.

해군은 꼼수를 부려서 분식회계를 한다. 새로 건조할 전함은 만재 배수량 3만 5천 톤급이며 함포도 기존 41cm이며  가격도 9,600만 엔이다라고 속인다. 또한 만들지도 않을 함정을 몇 척 더 만든다고 거짓 보고한다. 구축함 3척, 잠수함 1척 예산을 추가한다. 이렇게 속임수를 써서 비용을 받아서 야마토급 전함을 만든다.

※분식회계는 가상 매출 기록, 비용 누락 등 회계장부를 고의로 조작하는 것이다.

 

당시 일본 정부 1년 세입은 30억 엔 이하였다. 야마토급 전함 2척에 1년 정부 예산 약 10%를 소요했다.

하지만 비용은 예상보다 더 들었다. 기존이 아닌 새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각종 기계와 설비도 모두 새로 구입해야 했다. 전함이 너무 커서 조선소 도크 확장 비용이 추가되고 함포가 너무 커서 기존 공작기계 사용불가하여 독일, 미국에서 수입해야 했다. 미국에 주문하면 소문날까 봐 공작기계는 독일에 주문했다.

 

제3전대에는 발도 빠르고 어느 정도 함포도 강력한 전함이 포진했다. 전함 공고와 전함 하루나가 있었다.

전함 공고와 하루나는 1차 대전 이전 순양전함으로 도입되었지만 1920~30년대에는 이미 퇴물이 되어 대개장을 받는다. 어느 정도 성능을 회복한 다음에 전함으로 개장하고 과달카날 전역에서 핸더슨 비행장을 포격하는데도 쓰였다.  최대 시속 55Km, 강력한 14인치 주포로 활약했다.

 

제4,5 전대는 전함 수행 임무와 더불어 상륙부대를 저지하는 함포 사격이 필요했다. 레이테 해전에서 일본의 목표는 미 수송 선단을 공격하고 미국의 순양함, 구축함을 상대하는 것이다. 이에 적합한 함정은 순양함이었다. 8인치 (20cm) 수많은 포로 무장된 중순양함이 대거 출격한다.

 

니시무라 함대의 핵심은 제2전대 전함 야마시로, 전함 후소가 있었다. 1915년에 취역한 후소급 전함들로 구형전함들이어서 후방에서 훈련함으로 쓰였다. 

속도가 느려 최고속도는 20노트(시속 약 37Km)여서 무사시, 야마토, 나가토 전함을 따라오지 못했다. 

여기에 중순양함 모가미를 딸려주어 전력을 보강해 준다. 

 

제3함대 오자와 함대는 태평양전쟁 초반 영광의 주역 항모기동부대였다. 이제는 빈 껍데기만 남았다.  제3항공전대 쇼카쿠급 항공모함 즈이카쿠는 일본 해군에서 가장 고생하고 전공도 많이 세운 함이다. 

진주만 공습부터 첫 참전하고 최고의 수훈함이었다.  1942년 10월 과달카날 전역 산타크루즈 해전에서 맹활약하고 여기까지 왔다.

제3함대에 배속된 독특한 부대 제4항공전대가 있었다. 

항공전함 이세, 항공전함 휴우가가 원래는 전함이었다. 미드웨이 해전까지는 당당한 전함이었지만 해군에서 항공기 시대가 왔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후미의 주포를 제거하고 그 자리 비행갑판에 활주로를 설치한다.

항공기를 싣는다. 하지만 갑판이 짧아서 캐터펄트를 설치해서 함재기 이륙은 할 수 있지만 착륙은 할 수 없다.  항공전함에서 발진해서 적기와 교전한 다음 착륙은 필리핀, 대만 등의 육상기지로 착륙하러 가야 된다. 

이세와 휴유가가 출격함으로써 일본 해군은 사실상 남아있던 모든 함정이 출진했다. 일본 해군 전함 9척, 항공모함 4척 포함 총 68척이 출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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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연합함대 전력 

 

윌리엄 홀시 제독이 이끄는 제3함대가 주력이었다. 항모 기동부대가 3함대에 다 있었다. 항모기동부대를 통틀어서 제38기동부대가 속해 있었다. 

38 기동부대는 안에 너무 항공모함이 많아서 기동전단이 4개가 속해있고 각 전단에는 정규항모가 2~3척 정도, 경함모, 순양함, 구축함들이 속해있는 막강한 항공모함 전단들이었다. 각 기동 전단에 포진된 정규항모마저 에식스급이었다.  미 3함대 38 기동부대에는 에식스급 항모 8척이 포함되어 있었다. 에식스급이 아닌 정규함모 1척은 미국의 불사신이라 불리는 요크타운급 엔터프라이즈 CV-6가 필리핀해 해전을 마치고 수리 후 복귀했다. 윌리엄 홀시의 제3함대 정규함모는 총 9척이었다. 

 

미국은 '해군의 휴일'이라 불렸던 군축조약시대에는 전함 건조를 잠시 중단했다가 1930년대 후반 국제정세가 심상치 않은 전운이 감돌자 군축조약의 제약 속에 '조약형 전함'을 건조한다.

16인치 함포의 신형 고속전함 최고속도 33노트(시속 약 61Km)가 되는 고속전함들을 만들기 시작한다. 

노스캐롤라이나급 2척, 사우스다코타급 4척을 건조한다. 6척 중 4척이 제3함대에 속해 있었다. 

신형 아이오와급 전함 2척이 배치된다. 아이오와급 전함 뉴저지BB-62는 기함으로 사용된다.

 

 

아이오와급 전함의 새로운 특징

사우스다코타급까지는 미국이 군축조약을 지켜야 했기 때문에 기준배수량 35,000, 최대 16인치 포로 설계되었다. 2차 대전 발발 후 아이오와급 건조가 시작된다. 군축조약과 상관없이 기준배수량 45,000톤 이상이며 더 강력한 장갑을 장비할 수 있고 포신의 16인치 포는 더 길어진다. 사우스다코타급 45구경장이 아이오와급 50구경장으로 더 멀리 쏠 수 있는 강력한 주포가 탑재된다. 아이오와급 미주리 BB-63은 1991년 걸프전에 가장 먼저 토마호크 미사일을 발사했다. 한국 6.25 전쟁에도 참전해 인천상륙작전, 흥남철수작전 등을 지원했다.

 

미 3함대 레이테 상륙작전 외곽을 지원하는 목적으로 작전을 벌였다면 미 육군의 레이테 상륙을 직접 지원하는 부대가 필요했는데 '토마스 C. 킨케이드 제독의 제7함대가 맡았다.

현존하는 미 해군 제7함대는 한국과도 밀접한 관심사를 가지고 있다. 7함대는 3함대만큼 위용이 강력하지는 않았다. 상륙군을 지원하는 함대이므로 3함대처럼 고속함대일 필요는 없었다.  미 3함대는 함정 최고 속력이 30노트 이상(시속 약 55Km) 이상 함정으로 빠르게 작전구역을 이동하는 기동부대였다면 7함대는 화력지원 함대였다. 

 

7함대에는 해안을 함포 지원 사격하는 화력지원부대가 있었고 항공지원을 위한 항공모함들이 소속된 부대들이 있었다. 항공모함들은 여기에서는 빠르게 달릴 필요가 없어서 호위항모들을 배치한다. 

화력지원은 기동성이 떨어지는 구식 전함을 활용한다. 미국의 구식 전함, 진주만 공습 때 손상된 전함을 인양해 수리 후 레이테 해전으로 온다. 펜실베이니아, 테네시, 캘리포니아, 웨스트버지니아, 미시시피, 메릴랜드전함  6척이 배치됐는데 5척이 진주만 공습 때 손상되어 수리한 전함이다. 전함 6척은 1915~1921년 기간에 진수했다. 모두 미국 주 이름을 따서 전함 이름을 지었다.

속도가 느리긴 해도 14인치, 16인치 주포의 성능은 좋아서 레이테해전에 배치한다.

미 해군 제7함대 항모부대는 제77기동부대 소속 되어있다. 제77기동부대 4 전단에 호위 항모가 집결되어 있었다. 호위항모 6척 단위로 묶여 있었는데 태피 1, 태피 2, 태피 3, 3개 전대로 편성되어 있다.

이들은 상륙군을 지원하는 임무뿐만 아니라 레이테 해전에서 엄청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토마스 C. 킨케이드 미 제7함대 사령관은 해군 가문 출신이다. 진주만 이후부터 산호해 해전, 미드웨이해전, 산타크루즈 해전 등 굵직굵직한 주요 해전을 경험했다. 심한 압박 속에서도 차분하게 냉정한 판단과 냉정함을 유지한다는 평을 받는다. 1943년 11월 미 제7함대 사령관으로 부임한다. 7함대의 특징은 맥아더의 남서태평양지역군에 배속되어 있어 어니스트킹과 맥아더 둘 다 상관으로 모셔야 되는 상황이었다. 태평양전쟁에서 미 육군과 해군의 갈등도 있었다. 갈등 속에서 난처한 상황이 오면 누구 편도 들지 않고 묵묵하게 본인 임무를 수행했다. 1950년 4월에 해군대장으로 전역한다. 6.25 전쟁 발발 직후 미 제7함대는 대만해협을 봉쇄했다. 

북한의 남침이 있고 나서 미국의 6.25 전쟁 참전 선언과 함께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가장 먼저 7함대부터 대만해협으로 파병했다. 니미츠급 항공모함 로널드 레이건, 니미츠급 항공모함 조지 워싱턴는 7함대 소속이다. 

미 제7함대는 일본 요코스카에 기지를 두고 서태평양을 관할하고 있어 한국 해역도 사실상 미 제7함대가 관할하고 있다.

 

미국과 일본의 주력 전함 비교

일본 전함 야마토

만재배수량 72,800톤, 

최고속도 29.0노트(시속 약 54Km)

주포 18.1인치(460mm)9문

최대사거리 41Km

발사속도 분당 1.5발 발사

300mm 관통거리 3.5Km

방어력 주현측 410mm (미국강판으로는 328mm)

방어력 갑판 200mm(미국강판으로는 160mm)

 

미국 전함 아이오와

만재배수량 57,400톤

최고속도 35.4노트(시속 약 66Km)

주포 16인치(406mm) 9문

최대사거리 38Km

분당 2발 발사

300mm관통거리 3.47Km

방어력 주현측 307mm

방어력 갑판 169mm

 

미국 아이오와가 일본 야마토보다 발사속도가 빠르다. 단시간에 끝나지 않는 해전에서 분당 1.5발과 2발은 시간당 90발과 120발 차이가 난다. 교전 시간이 길어질수록 전함 아이오아가 유리해진다.

주포발사 300mm 철갑판을 뚫을 수 있는 관통 거리는 야마토가 주포가 18.1인치인데 3.5Km이다. 

반면 아이오와는 주포가 16인치인데 300mm 관통거리가 3.47Km이다. 야마토보다 주포가 작은데 관통거리 차이는 거의 없다. 이것은 아이오와급 주포의 설계가 더 우수했기 때문이다.

포신의 길이 차이가 있다. 미국의 이전 전함은 주포 16인치 45구경장이었는데 아이오와급부터 16인치 50구경장으로 더 늘렸다. 야마토는 주포 46cm 45구경장이다.

 

포신길이 야마토 20.6m이고 아이오와 20.3m로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미국은 장약기술이라든지 전함 포신을 설계할 때 최신 데이터와 각종 소재를 활용해서 보다 강력한 장약을 쓸 수 있게 설계했다.

장갑은 야마토 전함이 더 두껍다. 그러나 철강 기술력이 차이가 있었다. 미국 강판은 일본 강판보다 약 20% 우수했다. 사격통제장치는 더 큰 차이를 보인다. 전함 야마토는 아직까지 광학식 거리측정기를 사용하고 있었다. 반면 아이와오급은 기존 광학식 거리측정기와 더불어 사격 조준용 레이다를 탑재하고 있었다. 사격통제장치는 야마토 대비 아이오와 정확도는 약 6배 차이가 났다.

 

전문가들의 분석에 의하면 야마토와 아이오와가 원거리에서부터 결전을 했을 때 아이오와가 빠른 속도와 정밀한 사격통제장치를 이용해서 전투를 벌이면 시간이 가면 갈수록 야마토가 불리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레이테 해전에서 야마토는 레이다를 장착했다. 전쟁중반부터 일본 함정용 레이다 개발에 매진한다. 야마토 함교 부근과 후미에 유형별 레이다를 설치했다. 하지만 미국 레이다보다 성능이 훨씬 뒤처졌다. 

미국은 미드웨이 해전부터 레이다를 달았다. 다양한 목적의 레이다를 개발해 성능개량을 계속해서 아이오와급 전함에 우수한 성능의 SG레이다, SK 레이다를 탑재된다. 

 

야마토에 탑재된 레이다의 한계는 어디쯤 뭐가 있는 것은 알아내지만 정확한 거리 탐지가 안되었다. 따라서 정밀한 사격 통제장치역할을 할 수 없었다. 전함 야마토에 탑재된 광학식 거리측정기는 세계 최대였다. 거리측정기의 정밀도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두 개의 큰 쌍안경이다. 2개의 렌즈와 목표물과의 각도 차이로 거리를 측정한다. 정밀도를 높이려면 두 렌즈의 거리와 간격이 중요하다. 야마토 거리측정기 렌즈 간격은 15.5m로 세계 최대였다. 이 렌즈는 오늘날 카메라로 유명한 니콘에서 만들었다.  당시 일본광학의 기술이 총집결된 광학식 거리측정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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