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 최대의 해공전투 개막, 시부얀 해전
일본 연합함대의 작전 목표는 적 수송선단을 격파하는 것이다. 작전계획의 핵심은 크게 두 가지이다. 양동작전과 양면공격이다. 양동작전은 오자와 함대가 미 해군 주력 3함대를 유인하는 동안 레이테 해협으로 돌입을 해야 하는데 구리타 함대와 시마 함대가 두 갈래로 공격을 해서 레이테만으로 진격하는 것이 양면 공격이다.
구리타 함대의 기동루트는 보르네오에서 출항해서 비사야제도를 지나서 바다를 지나 산베르나르디노해협으로 통과를 해야 된다. 통과를 해서 태평양으로 나온 다음 사마르섬을 지나서 남쪽으로 향한 다음에 동쪽에서 레이테만을 서쪽으로 들어간다. 브루나이 출항 전날 1944년 10월 21일 연합함대 참모장 지시에 2함대가 분리되어 주력은 직접 이끌고 가고 속도가 느린 니시무라 함대는 최단 코스로 간다.
레이테 해전 서막, 일본 연합함대와 미국 연합함대 전력 비교
시마 함대는 타이완에서 1944년 10월 21일 오후 4시에 출항하여 루손섬을 향해서 내려왔다가 민다나오 섬과 레이테 섬 사이에 있는 아주 좁은 수리가오 해협을 지나서 레이테만으로 진입을 한다. 앞에는 니시무라 함대가 가고 있고 약 65Km 뒤에는 시마 함대가 따라갔다. 양동작전을 수행하는 오자와 함대는 적을 속이는 역할을 한다. 다른 함대를 레이테만으로 모이게 하기 위해서 미군 제3함대를 북쪽으로 유인하면서 미 해군의 전력을 분산시켜야 하는 임무를 맡는다. 1944년 10월 20일 9시 30분 일본 '세토 내해'에서 출항하여 루손섬 동쪽에 있는 위치에서 미 3함대를 유인하는 역할, 미끼를 던지는 역할이다.
작전명은 '미끼를 던져라'이다.
이 작전대로 D-day, 10월 25일날 구리타함대. 니시무라함대. 시마함대가 같은 시간에 레이테만 동시 진입을 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한 개의 함대만이라도 살아서 레이테만으로 진입하면 성공적이 된다.
이곳은 엄청나게 미군들이 깔려 있었다. 일본은 힘이 좋은 구리타 함대 루트를 비교적 안전하다고 생각한 산베르나르디노 해협으로 보낸것이다. 사실상 시마 함대와 니시무라 함대는 구리타 함대가 레이테만으로 진입하는 것을 돕기 위한 조공역할을 했다.
일본 해군은 미 해군 항공대의 활약을 피해야 했고 연료가 부족했다. 연료 부족으로 안전하다고 멀리 돌아갈 수 없었다. 전함야마토 연료탱크 기본 용량은 약 6,300톤으로 괜찮지만 전함 뒤를 쫓는 구축함들은 연료 탱크가 작아 중간 급유가 필요했다. 속도가 느린 유조선이 쫓아갈 수 없는 먼 거리는 배제해야 했다. 그렇다고 해서 최단거리를 갈 수도 없었다. 이미 최단 거리 루트에는 미 항모가 자리 잡고 있었다. 미 비행장 위치를 감안해서 구리타 함대 루트가 확정된 것이다.
일본 연합함대 공격에 대비한 미국의 준비
구리타 함대의 출항을 알고 있었다. 암호해독이었다. 일본 해군은 통신보안을 신경써서 전문을 해독할 수 없었지만 유조선의 움직임에서 증거를 포착한다. 유조선을 모으려던 상선 암호를 해독해서 미군은 일본의 움직임에 눈치를 챈다.
동시에 미 잠수함들을 주요 해역 요소요소에 깔아두었다. 일본 움직임은 알아챘지만 정확한 의도는 파악하지 못했다. 윌리엄 홀시 미 제3함대 사령관과 토마스 C. 킨케이드 미 제7함대 사령관은 판단이 달랐다. 킨케이드는 일본 함대가 레이테만으로 올 것이라 하며 방비 강화를 하고 면밀히 주시해야 한다고 한다.
남쪽 수리가오 해협으로 들어오는 것이 최단루트이므로 공격하러 오는 것이다고 판단했다.
반면 구리타함대가 산베르나르디노 해협이 있는 중앙쪽으로 간다면 일본 육군 병력을 레이테섬에 증원하기 위해 일본 함대는 엄호부대로 오는 것이다라고 판단한다.
레이테섬의 일본 육군을 위한 보급 수송이 필요해서 전함으로 수송하려고 하는 것이 아닐까 계속 의심을 하고 있었다. 미군은 일본의 확실하지 않은 상황을 계속 주시하고 있었다. 무언가 움직인다는 것을 인지했기 때문에 미 38 기동부대를 필리핀 해역으로 간다. 미 3함대 38 기동부대 아래 4개의 기동전단이 배속되어 있었다.
제1전단은 재보급을 위해 울리시(9월에 점령한 야프섬 울리시 환초) 해군기지로 이동하였고 제2전단은 산베르나르디노 해협쪽으로 제3전단은 필리핀 루손섬 근처에 제4전단은 사마르섬 근처에 분산해서 배치하고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1944년 10월 22일 오전 8시 브루나이에서 구리타 함대가 출항한다. 팔라완섬의 가늘고 긴 서부 해안선을 따라 항진한다. 암초가 많은 약 40Km 너비의 팔라완 해로에 접어든 순간 미 초계 잠수함 2척이 구리타 함대를 발견한다. 1944년 10월 23일 밤 12시 16분 무렵이었다. 미 초계 잠수함은 바로 어뢰 공격을 하지 않고 정확한 확인을 위해 추적을 한다. 완전히 확인을 한 다음에 1944년 10월 23일 새벽 5시 24분에 어뢰를 발사한다.
이 공격으로 구리타 함대의 기함 중순양함 아타고와 두척의 중순양함 마야가 침몰한다.어뢰 2발이 명중된 중순양함 다카오가 항해 불능상태가 된다. 사실상 중순양함 3척이 손실된다.
구리타 다케오 일본 제2함대 사령장관도 물에 빠진다. 수영 실력을 발휘해서 구조되어 전함 야마토를 기함으로 삼아 항진한다. 전함 야마토에는 원래 사령관 우가기 마토메 제2함대 제1 전대 사령관이 있었다.
1전대 기함에 함대 사령관이 두명이 타는 이런 상황이 되어버렸다.
일본 중순양함은 가토급 잠수함 다터 SS-227, 데이스 SS-247 미 잠수함 두척에 의해서 피격을 당했다.
대함감시용 SJ레이다로 일본군 함대를 먼저 발견하여 어뢰를 발사하였다.
일본은 대잠능력의 한계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팔라완섬 해안에서 약 100Km 떨어진 지점에 있었던 미 잠수함 2척은 일본 함대 움직임을 모르고 있었다. 갑자기 미 잠수함 레이다에 뭔가 포착이 되고 27Km 전방에 적함이 출현한 것이었다. 깜짝 놀라 일단 피해서 살펴보니 어마어마한 일본 함대가 줄줄이 몰려오고 있었다. 일본 함대에 더 큰 레이다가 탑재되어 있는데 미 잠수함을 발견을 못했다.
일본의 전파, 전자 기술은 좋지 못했다. 미 잠수함 2척이 일본 함대 발견 후 어뢰 공격까지 5시간을 추적하고 있었는데 구리타 함대 항진 속도는 약 16노트(시속 약 30Km) 정도이고 미 잠수함은 최대속도 수중 약 9노트(시속 약 17Km)이므로 바다 위로 부상해서 쫓아갈 수밖에 없다. 고개를 내밀고 쫓아가는 형국인데도 일본 해군 견시병(자세히 살피는 임무를 맡은 병사)마저 조기 발견에 실패했다는 것이다.
미 잠수함이 떠 있던 거리는 망원경으로 발견 가능한 거리였다. 일본함대는 레이테만에 10월 25일까지 돌입해야 되는 시간에 쫓기고 있었다.
기함을 야마토로 바꾸면서 커다란 문제가 생긴다. 광범위한 바다에서 동시다발 전투가 예정되어 있는데 정보통신이 가장 중요하다.제2함대 기함 아타고가 침몰하면서 사령장교 전원이 전함 야마토에 승선한다. 제2함대 통신요원 일부는 다른 구축함 키시나미에 승선한다. 전함 야마토 제1전대 통신 요원은 2함대 기함의 통신업무를 담당해야 한다. 하지만 야마토에 있었던 통신요원들은 기함의 통신업무에 익숙하지 않았다. 일본 함대 간 통신이 원활하지 않았다. 조직력을 발휘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미 잠수함의 일격을 당한 구리타함대는 주간에 수많은 섬 사이사이를 지나가는 좁은 해로를 따라가며 전진한다. 미 잠수함 어뢰 공격 후 약 26시간 경과, 1944년 10월 24일 오전 8시 미 SB2C 헬다이버 초계기가 구리타 함대를 발견한다. 구리타함대는 필리핀 루손섬의 일본 항공기 엄호를 요청한다. 하지만 항공기 엄호는 마닐라에서 출격한 항공기 12대 뿐이었다.
1944년 10월 24일 오전 10시 30분 미 해군은 공습을 개시한다. 윌리엄 홀시 미 제3함대 사령관이 직접 구리타 함대 공격을 진두지휘했다. 구리타 함대가 5차례 공격을 받는다. 이 과정에서 전함 무사시가 침몰당한다.
중순양함 묘코, 구축함 후지나미는 항해가 불가능하게 된다. 1944년 10월 24일 15시 30분 구리타 함대는 일시 서쪽으로 후퇴한다. 미 제3함대 사령관 윌리엄 홀시는 구리타 함대가 회복 불가능으로 도망간다고 생각했다. 때마침 오자와 함대가 루손섬 북동부에서 함재기를 보내서 미 함대를 유인한다. 덜컥 홀시는 미끼를 물게 됐고 북쪽으로 올라가기 시작한다. '황소의 질주'가 시작이 된 것이다. 홀시의 이 결정에 대해서 미 해군 내부에서도 이견이 분분했다. 많은 이상한 징후들이 포착되어 일부 지휘관들이 건의를 했지만 이를 무시한 홀시는 전단까지 다 이끌고 오자와 함대 쪽으로 이동한다.
피신했던 구리타 함대는 미 함재기 공격이 멈추고 2시간 정도 시간이 흐르자 17시 14분 뱃머리를 돌려 원래 목적지인 산베르나르디노 해협으로 진격한다.
침몰한 전함 무사시 승조원들
전함 무사시 승조원 1,000여 명 실종 및 사망했다. 침몰 당시 급격히 전복되며 커다란 소용돌이가 발생해서 주변의 구축함도 구조하러 가기가 어려웠다. 100m이내 접근 불가하여 소용돌이가 가라앉은 후 1,350여 명을 구조한다. 전함 무사시 함장 이노구치 도시히라는 배와 함께 운명을 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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