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금융실명제
1993년 故김영삼 대통령은 특별담화를 통해 "이 시간 이후 모든 금융거래는 실명으로만 이루어집니다"라는 담화를 발표한다. 이전에는 실명이 아니더라도 계좌를 만들 수 있었다.
통장이름은 가명, 차명, 예명 등 아무이름이나 통장 개설을 할 수 있었다.
개인 이름이나 계모임 이름, 산악회이름 등으로 계좌를 만들어 사용할 수 있었다. 그 당시 가명 계좌에 가장 많이 쓰인 이름은 김철수와 김영희였다. 그 밖의 남자 순위권에는 김영호, 김영철 등이었고 여자 순위권에는 김정희, 김영자, 김순희 등이 많이 쓰였다. 실명과 가명 구분이 어려운 친근한 이름들을 많이 사용했다.
금융성장을 빠르게 성장시키기 위해 가명거래를 묵인했다. 그러면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금융범죄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희대의 경제사기 사건이 있었다. 건국이래 최대의 금융사기사건이라는 장영자, 이철희 사건이 있었다. 1982년 5월 4일, 나라가 발칵 뒤집히는 사건이 있었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의 인척인 장영자, 이철희 부부가 거액의 어음 사기 혐의로 검찰에 구속되었다. 장영자는 대통령의 인척이었고 이철희는 과거 중앙정부 차장을 지냈었다. 권력을 등에 없는 막강한 부부는 현금을 대출해 줄 테니 어음을 끊어달라고 하면서 자금난을 겪는 기업들의 2배~9배 어음을 받아 사기행각을 벌였다. 이때 벌인 사기행각의 규모가 수척억원에 달한다.
6,404억 원 어음을 유통했고 약 1,400억 원 이득을 취했다. 80년대 당시의 금액으로 엄청난 대규모 사기금액이었다. 그래서 건국이래 최대의 금융사기사건이라 불린다. 그 여파로 기업의 간부, 은행장 등 30여 명이 구속이 됐고 관련기업들이 도산하기도 했고 이 사건으로 금융실명제를 처음으로 논의하게 됐다.
금융실명제는 바로 실행되지는 못했다. 워낙 비실명으로 계좌 만드는 것에 익숙해졌고 오래되었기 때문에 금융실명제로 바뀌려면 세무, 행정 등을 바꿔야 하는 업무가 많았기 때문에 장영자, 이철희 사건 이후 11년이 지나서야 금융실명제가 시작되었다.
금융실명제 도입 사실을 아는 사람은 전국에 20여 명 뿐이었다. 모든 것은 비밀리에 진행되었다. 당시 극비리에 준비한 금융실명제는 보안을 위해서 '남북통일' 작전이라고 불렀다.
한국에서는 금융실명제를 실시하기 위한 여러 번의 시도가 있었다. 1982년에 장영자, 이철희 어음사기 사건을 계기로 첫 번째 시도될 뻔했지만 비실명거래로 이익을 얻고 있었던 집단의 반발로 무기한 유보가 되었다.
1988년 노태우 대통령 정부도 시도하려고 했지만 시기상조라며 실패했다. 그러다 김영삼 정부까지 왔는데 또 실패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한국의 핵심 브레인으로 꾸려진 11명의 비밀작업반이 가동이 된다. 비밀작업반 인원조차 금융실명제 작업을 위해 자발적으로 모인 것은 아니었다. 본인들도 몰랐다고 한다.
93년의 6월에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이경식 당시 경제부총리에게 추진 방안 마련을 은밀하게 지시했다.
이 사실을 미리 알면 자금을 미리 빼돌릴 수 있다고 판단하여 비밀로 한것이다. 고위관리들마저 전혀 알지 못할 정도로 철저하게 보안을 지키면서 극비리에 추진했다.
비밀작업반은 경기도 과천 주공아파트에 방을 마련해서 두 달간 합숙을 하였다. 장관은 양복을 입고 다니면 눈에 뛰 깔봐 평범한 티셔츠 차림으로 변장하고 다녔고 베란다에 나가지 못할 만큼 거의 감금상태로 합숙을 할 만큼 보안에 신경을 썼다. 실무자들은 동료 직원들의 의심을 살까 봐 해외 출장 간다고 했고 가족들에게는 가짜로 해외 출장을 떠난 척하려고 국제 전화를 걸고 안부를 물었다.
이 처럼 철저히 준비했기 때문에 금융실명제를 발표했을 때 모두가 깜짝 놀랐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후에 16개의 긴급명령이 공포가 되었다.
총 16건의 긴급 명령 중 1~14호는 6.25 전쟁 때 법령 공포한 것이고 15호는 박정희 대통령 재임시절에 발동됐고 민주화 이후의 대통령의 긴급 제정 명령이 발동된 것은 1993년 금융실명제를 실시했을 때가 최초였다.
1993년 8월 13일 저녁 TV를 통해서 전국에서 시청했던 국민들은 강렬하게 기억에 남았다.
금융실명제가 실시됐을 때 국민들의 반응은 가지 각색이었다.
연예인은 예명을 많이 썼는데 금융실명제가 실시되면서 본명이 드러나서 난감하기도 했다. 금융실명제 실시 전에는 계좌를 만들려면 1~2분 정도 소요가 됐는데 금융실명제 이후에는 신분증 확인해야 되고 적어야 될 서류가 많아져서 계좌 만드는데 시간이 더 걸렸다. 미성년자가 통장을 개설하기 위해서는 부모님과 동행해야 했다.
국민의 비밀보장의 자유와 기본권을 침해했다는 지적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금융실명제가 실시돼면 자금이 지하경제로 숨어 들어서 나라가 망한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금융실명제가 도입되고 나서 적응하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가명계좌를 실명계좌로 바꾸라는 기간은 2달이었다. 금융실명제 시행 2개월 후 국민들의 95%가 가명 계좌를 실명으로 전환했다. 국민들은 미리미리 전환해서 계좌 전환 마감일에는 은행창구가 썰렁할 정도였다.
금융실명제를 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걱정들이 많았는데 기우였고 달라진 제도에 국민들은 금방 적응했다.
우려했던 불법 차명계좌, 비자금 들을 막을 수 있었기 때문에 손해보다는 이득이 훨씬 컸다.
실명제로 도입되면서 가장 타격이 컸던 곳은 사채시장이었다. 한국의 사채 시장의 대명사는 서울 명동이었다. 금융실명제가 도입되기 전에는 은행대출보다도 사채가 더 편했던 시대가 있었다.
은행의 상품들은 만기가 길고 대출 승인받기도 어렵고 해서 사채 시장을 일반인이나 로비를 할 여력이 없는 중소기업인들이 많이 찾았었다. 그래서 사채 시장이 있는 명동에 사람이 많이 오갔는데 금융실명제 실시 후에는 사채 시장 주요 자금원들이 자금추적을 피하기 위해 돈을 풀지 않게 되고 사채 시장 의존도가 확연하게 감소하였다.
금융실명제는 전직 대통령들의 구속으로 이어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금융실명제의 가장 핵심 중의 하나는 음지에 있는 자금들의 출처를 밝히는 것이었다. 흔히 '검은돈 추적'이다.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이 1995년 숨겨놓은 비자금이 밝혀져 구속되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야당의원의 비자금 계좌가 폭로가 되면서 일주일만의 비자금 5,000억 조성했던 부분을 실토하게 된다. 기록이 남아있어 밝힐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금융실명제는 나라 경제만 바꾸었던 것이 아니라 현대정치사에도 큰 영향을 미쳤고 역사를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사과박스는 뇌물의 대명사처럼 여겨진다. 사과박스가 출현한 이유는 금융실명제 때문이다.
금융실명제 이전에는 뇌물을 주고 받을 때 차명계좌가 있었기 때문에 직접 현금을 들고 다닐 필요가 없었지만 금융실명제 이후 더 이상 차명계좌는 쓸 수가 없어 사과 상자에 현금을 담아 보내는 신종 수법이 생긴 것이다.
사과박스에는 1996년도 전두환 비자금 수사를 하던 도중 한 기업의 경리 창고에서 만원권 사과상자가 발견되면서 본격적으로 사과 박스가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1997년 한보사태 때도 당시 정태수 회장이 부도를 막기 위해서 정치인들에게 사과상자에 현금을 채워 보냈다고 한다. 20Kg짜리 사과상자에는 1만 원권을 채우면 2억 5천 정도 들어간다. 5만 원권을 채우면 10억 정도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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