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미카제
인간 유도미사일 가미카제를 처음 접한 미국 해군은 공포와 충격에 빠진다. 미군은 초반 방어가 쉽지 않았고 일본군의 자살 특공은 심리적 충격에 따른 기습적 효과가 있었다.
미국은 전후 군함 격침용 유도탄 대함 미사일에 주력한다. 에식스급 항공모함의 근본적인 회의론이 제기됐다.
논란이 있을 때도 일본의 250Kg 항공 폭탄만 막으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1944년 10월 '인간 유도 미사일' 가미카제 등장에 미 해군은 각성한다. 만약 가미카제처럼 현란한 기동과 더 강력한 탄두의 신무기가 미 항모를 타격한다면 에식스급 항공모함으로 막을 수 없다는 각성으로 장갑 항모 대세론이 떠오른다.
시도는 그전부터였다. 1943년부터 에식스급 항모 다음 차세대 후계함인 미드웨이급 항모 1번함이 기공된다.
미드웨이급은 비행갑판을 두껍게 만드는 방식으로 변화한다.
1941년 1월 몰타항공전 2차 공방전에서 독일의 500Kg 항공 폭탄 7발을 버텨낸 영국 장갑 항모 일러스트리어스 R87을 보고 미래에는 일본이상의 적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비행갑판을 두껍게 만들어야겠다고 해서 미드웨이급 항모 비행갑판은 장갑 3.5인치( 89mm)를 깐다.
미드웨이급 항모는 1945년 9월부터 취역했다. 2차 세계대전 후반에 영국 해군이 다시 태평양에 나타난다. 영국 태평양함대 소속 임플래커블급 장갑 항모 2척이 투입이 된다.
임플래커블 R86, 인디패티거블 R10은 1945년 4월 오키나와 전투에 참전한다. 장갑 항모 인디패티거블에 가미카제가 돌진하지만 장갑 항모는 뚫리지 않았다. 약 30분 만에 화재를 진압하고 작전을 속행했다.
패망직전의 발악, 일본 자폭 병기
일본은 가미카제로 끝내지 않았다. 가미카제 파생형 결전 병기들이 등장한다.
'인간 어뢰' 가이텐이 등장한다. 93식 산소 어뢰를 개조한 특공 무기로 사람이 어뢰를 몰고 가서 부딪힌다.
잠수함, 경순양함에 탑재되어 목표물 6~7Km 부근에서 발진하여 잠망경으로 재조준해서 그대로 돌진한다.
가이텐은 조종하기가 힘들었다. 가이텐은 산소어뢰인데 가솔린 연소 시 발생하는 유독한 일산화탄소, 테트라에틸납이 조종석으로 유입되었다. 장시간 조종하면 조종사가 실신했다.
1944년 11월 20일 가이텐 특별공격대 첫 작전 개시한다. 첫 번째 공격에서 미 급유함 미시시네와 AO-59를 격침시킨다.
일본은 패전 D-4, 1945년 8월 11일 마지막 가이텐 공격을 전개했다. 가이텐 148대가 출격한다. 1944년 11월 ~1945년 8월까지 가이텐 공격 총 21회가 전개된다.(일본 자료 기준) 미 급유함, 상륙정, 호위구축함 3척을 격침하고 미 수송함 1척 대파, 4척 소파한다. 가이텐 특공대원, 정비원 포함 총 145명 사망한다. 미군에서 확인한 미군 사망자는 187명이었다. 일본 수뇌부는 가이텐의 전과에 고무되어 공격을 더 했더라면 가미카제보다 전과가 더 좋았을 것이다고 말을 한다.
한국 제주도 모슬포 해안가 등 제주도 곳곳에 동굴 진지를 뚫어 가이텐 기지를 건설했다.
결호작전에 따라 제주도에 만든 자살 특공 기지들은 고산수월봉, 서귀포삼매봉, 성산일출봉에는 신요 기지를 건설했다. 송악산, 서우봉에는 가이텐 기지를 건설했다. 일본은 제주도에 80여 곳에 약 700개의 동굴 진지를 만들어 요새화했다. 제주도는 한국의 근현대사의 발자취를 고스란히 품고 있는 섬이다.
자폭병기 MXY-7 오카는 사람이 조종하는 유인 대함 미사일이다. 개발초기에는 무동력 글라이더 방식의 시제품으로 소량 제작하였다가 나중에는 가속력 얻는 로켓엔진을 장착하여 엔진 정지 후 활공하며 목표물로 돌진한다. MXY-7 오카의 항속거리는 37km로 장시간 비행이 힘들다. 오카를 부착한 모체 항공기(G4M1식 육공)도 그만큼 가까이 근접해야 한다. 그래서 오히려 모체 항공기가 먼저 격추되는 경우가 많았다.
1945년 3월 오키나와 전역 규슈해협 항공전에서 오카가 첫 실전 투입됐다. 오카 특공의 첫 전과는 1945년 4월 오키나와 전투에서 메너트 엘 아벨 DD-733 미 구축함 1척을 격침한다.
하지만 가미카제 특공은 미 해군에 타격을 입혔으나 오카 특공의 성과는 미미했다. 오키나와 전투에서 총 10번을 출격해서 오카 조종사 55명과 모체 항공기 1식 육공 탑승 368명이 사망했다. (일본 자료 기준)
가미카제 전용 비행기 Ki-115 츠루기를 개발한다. 바디는 금속이 아니라 목재 캔버스로 만들었다. 원자재가 부족해서 경량화를 위해 엔진만 단 셈이다. 육군용 가미카제 전용기 츠루기는 이륙하면 바퀴가 떨어져 나간다. (착륙은 없다)
전쟁 막바지로 갈수록 극단적 형태를 보인다. Ki-115 츠루기 105대 생산했지만 전과는 없었다.
카이류 2인승 자폭 전용 잠수함이 등장한다. 1945년 초에서 종전까지 카이류 약 210척을 생산했지만 실전 참가는 없었다. 실전 배치 전에 종전이 되었다.
인간 기뢰 후쿠류를 만들어 낸다. 잠수복을 입고 해저로 들어가서 장대 끝에 기뢰를 부착하여 물속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미 상륙정이 지나가면 터트린다. 더 이상 자폭에 동원할 병기마저 동이 난 전쟁 막바지에 인간이 물속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폭탄을 찔러 넣는 것이다. 군인의 생존에는 관심이 없는 전략이며 일본 제국주의의 추악한 발악이다.
빅 블루 블랭킷(Big Blue Blanket)
미국은 가미카제 타격을 견뎌낼 미 장갑 항모 미드웨이급은 건조중이었다. 가미카제에 대한 미 해군의 대응책으로 새로운 전술을 만들어 낸다.
'빅 블루 블랭킷(Big Blue Blanket)' 전술은 F6F헬캣을 이용해서 커다란 그물을 치자라는 전술이다.
또 하나의 파란 비행기 F4U 콜세어도 투입되며 상시 초계 강화를 해서 미리 막자는 것이다.
'빅 블루 블랭킷(Big Blue Blanket)' 전술은 존 S.태치 당시 미 제38기동부대 작전장교가 개발했다. 2차 대전 동안 조종사로 적기 6대를 격추하였고 일선 조종사보다는 참모로 전술 개발에서 더욱 두각을 드러냈다.
빅 블루 블랭킷 전술은 미 항모 본대 50마일(약 80km)밖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외곽방어선에서 가미카제를 없애겠다는 것이 핵심이다. 항모에서 약 50마일 (약 80Km) 이상에서 초계 구축함들이 둘러싸고 초계함 레이다가 조기에 가미카제를 발견하자는 일종의 조기 경보 시스템이다.
가미카제를 발견하면 전투공중초계 F6F헬켓, F4U 콜세어가 가미카제를 요격한다.초계 구축함은 레이다뿐만 아니라 대공포 사격도 가능해서 직접 가미카제를 공격할 수 있다. 가미카제는 항모를 공격해야 하는데 외곽의 초계 구축함에 타격을 하게 된다. 가미카제 공격을 미리 흡수해 주기 때문에 미 항모 본대는 공격을 덜 받는다.
여러 가지 가미카제 공격을 막기 위한 전술을 구사하면서 일본 항공대의 기지를 직접 공격한다.
미 해군의 가미카제 대응책 효과가 오키나와 전역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당시 미군에게는 새로운 무기체계로 비쳤던 인간 유도미사일 가미카제에 대한 대응책은 훗날 이지스 시스템으로 발전했다.
'빅 블루 블랭킷(Big Blue Blanket)' 개념을 계승한다. 가미카제 요격의 주력 F6F 헬캣은 함재기 최강캐 F-14 톰캣으로 이어진다. 미 항모 200km 앞에 초계 전투기를 배치한다. 초계 전투기 레이다 탐지거리는 약 250Km 이상을 볼 수 있다.
(구)소련(구) 소련 장거리 폭격기 Tu-22M 백파이어는 대함 미사일 Kh-22를 발사했다. 대함 미사일 발사 전에 (구) 소련 폭격기를 요격할 수 있었다. F-14 톰캣에 사거리 180km의 피닉스 미사일을 탑재했다. 약 450km 밖의 적기에 미리 대응할 수 있다. 미국과 소련 냉전시대 미사일, 군비 경쟁이 치열했고 비용이 어마어마하게 들었다.
전자, 전파 기술 발전으로 훨씬 멀리 있는 적을 더욱 정밀하게 추적 할 수 있다. 함대를 공격하는 것은 적 항공기였지만 시대가 변하면서 대함 미사일이 등장했고 공격할 수 있다. 항공기뿐만 아니라 대함 미사일 요격 시스템이 필요했다. 그래서 이지스 시스템이 나왔다. 이지스함 1척 당 약 1조 원이 든다.
미국은 '빅 블루 블랭킷(Big Blue Blanket)' 으로 가미카제에 대응하면서 피해가 줄었다. 오키나와 전투에서 일본은 가미카제 1,900여 대를 출격시켰지만 명중률이 약 7%였다. 가미카제 명중률은 레이테 해전에서는 20.8%였다. 가미카제 명중률 감소 원인은 미 해군의 대응력이 상승했고 일본 조종사 기량이 미숙해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오키나와 전투 당시 가미카제 공격은 16~18세 소년병 중심이었다. 훈련이 미숙한 소년병들은 마지막 충돌직전에 본능적으로 눈을 감았기 때문에 적 함대에 부딪히지 못하고 비껴가거나 타격이 빗나가는 것이 많았다. 점점 떨어지는 가미카제의 전술적 효용성이 명중률 감소로 나타났다.
또한 하늘에 깔린 F6F 헬캣, F4U 콜세어로 고공 타격이 불가했다. 가미카제는 급강하를 해서 갑판을 뚫고 들어가야 가장 큰 타격을 입힐 수 있었는데 미군의 상시 초계로 고공 접근이 불가능해졌다. 일본 조종사들은 미숙한 소년병이었기 때문에 수직 낙하도 불가능했다. 저공비행으로 접근한 가미카제는 미 함정 함교(옆구리)에 타격을 가하는 방식으로 몇 번 성공했다. 하지만 미 항모의 장갑의 배치상 크게 타격을 줄 수 없는 위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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