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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지식

전쟁 패망의 그림자, 가미카제 특공대

by 소시민스토리 2024. 3.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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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패망의 그림자, 가미카제 특공대

1944년 사마르 해전에서 자살 특공대가 최초로 등장했다. 전쟁 패망의 그림자가 짙어지고 있다는 것을 안 일본은  가미카제를 결사의 항전, 최후의 수단으로 이용한다.

엔가뇨 해전

 

엔가뇨 해전

사마르 해전 후반전 1944년 10월 25일 06시 45분 사마르 해역에서 구리타 함대는 예상치 못하게 미 제7함대 호위항모부대 태피 3을 맞닥뜨리게 된다. 사마르 해전의 영웅들 사마르 해전의 영웅들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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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육군에서 먼저 가미카제 특공 시스템을 구축한다. 군부는 연이은 패배에 기사회생의 기적이 필요하다고 느낀다. 1944년 2월 도조 히데키 총리는 육군참모총장을 겸임하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자살 특공이 논의가 된다. 가장 적극적으로 추진한 인물은 핫토리 다쿠시로 일본 참모본부 작전과장이었다.

'작전의 총아'라는 별명을 가졌고 도조의 엄청난 총아를 받았다.  자살 특공을 반대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자 핫토리 다쿠시는 특공의 단초가 된 사례들을 널리 퍼트리는 작업부터 시작하면서 분위기를 조성한다.  

 

1944년 9월 25 항공 특공 추진 작전을 만든다. 쉽지 않은 일이었고 반발도 의식해서  '통수의 외도'라고 불렀다. 일본군 명령체계 통수의 정점에는 일왕이 있다. 일본군 병사 하나하나의 행동은 통수권자 일왕에 의한 명령체계로 움직인다. 자살 돌격을 일왕이 직접 지시했다는 것을 용납하기 쉽지 않은 일이었다. 정점에 있던 왕이 국민들을 상대로 자살을 하라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통수의 외도'라는 표현이 등장했다.

 

육군 입장에서도 자살 특공 명령은 면피하고 싶고 책임지지 않고 싶은 명령이었다. 대본영이 원한 자살 특공의 형태는 직접적으로 명령을  한 것이 아니라 일선 지휘관들이 자발적으로 조직을 하라는 것이었다.

파일럿이나 병사들도 자발적으로 지원을 하라는 식이었다. 자국의 군인들을 죽음으로 내몰면서 책임은 회피하려는 일본 군부의 모습을 보여준다. 

종전 후 미국이 가미카제에 대해 조사하는 과정에서 왜 그랬냐는 질문에 대해  가장 많이 들었던 대답은 현장 지휘관들의 과잉 충성이었다는 것이었다.

 

육군이 자살 특공대를 준비하는 과정에 책임 회피하며 머뭇거리고 있을 때 해군이 먼저 자행한다. 

일본 해군은 레이테 해전에서 구리타 함대를 지원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먼저 마주했고 자살 특공대를 자행한다.

1944년 10월 20일 가미카제 특별공격대 최초 조직한 오니시 다키지로 일본 제1항공대 사령장관은 1944년 10월 5일 제1항공함대 사령장관에 내정된다.

오니시 다키지로는 1944년 10월 12일 필리핀 루손섬에 도착해서 보니 항공기 자원은 불과 100여 대 뿐이었다.  제 1항공함대 지휘관과 참모를 소집했고 충격적인 제안을 한다.  제로전투기에 250Kg 폭탄을 장착하여 육탄돌격을 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부하들의 동의에 추진했다는 통상적인 주장이다. 

하지만 1944년 10월 25일 07시 40분 사마르 해전에서 처음 자행한 오니시 다키지로 일본 제1항공함대 사령장관에 대해 일본에서는 독단으로 했다는 말들이 많았다. 하지만 오니시 다키지로는 수뇌부와 충분한 논의를 하고 필리핀으로 부임을 했다. 요나이 미쓰마사 일본 해군 대신을 만나 특공작전에 대해 승인을 받고 필리핀으로 부임한 것이다. 오이카와 고시로 일본 군령부 총장은 승인을 하면서 본인은 명령한 것은 아니며 오니시 다키지로가 자발적으로 한 것으로 해라는 조건부 승인을 한다. 

 

 

오니시 다키지로는 태평양전쟁 초반 기지 항공대 총괄 제11항공함대 참모장이었고 1943년 11월부터는 일본 군수성 항공병기총국 총무국장을 지냈다. 병기들을 책임지고 있었는데 마리아나의 칠면조 사냥이라고 일컫는 작전에서 미군에게 호되게 당하면서 절망한 일본 해군 현장 지휘관들의 보고가 올라온다. 

조 에이이치로 일본 해군 대좌는 전통적인 방식으로는 안 되니 가미카제 특공용 항공기 개발을 건의한다. 

1944년 중반에는 극단적이라며 의견을 물리쳤던 오니시 다키지로는 오카무라 모토하루 일본 제341해군항공대 사령관으로부터도 비슷한 건의를 받게 된다. 지휘관들의 여러 차례 건의를 듣고 개발 중이던 무선유도폭탄을 특공 항공기로 개조를 지시한다. 

 

 

항공기에서 분리, 발사되는 자폭 전용 병기로 1,200Kg 폭탄을 장착한 MXY-7 오카를 개발한다. 

MXY-7 오카는 로켓엔진으로 추진력을 얻은 후 그대로 활공하여 목표물로 돌진한다.

항공 특공 작전은 일본 해군 최상층부의 승인을 받고 추진된 것이다.

 

오니시 다키지로가 자살 특공 작전을 추진하자 적극적으로 나선 제1항공함대 예하 사령관은 타마이 아사이치 일본 제201해군항공대 부사령관(사령관 대행)이었다. 타마이 아사이치를 주축으로 해서 일본 제2함대 구리타 함대 지원을 위한 특별공격대가 조직된다. 

일본의 해군사관학교 해군 병학교 출신으로 특별 공격대 지휘관은 세키 유키오 대위가 임명된다. 

1944년 10월 20일 특별공격대 총 24명이 편성된다. 신풍(神風) 특별공격대로 명명된다. 

당시 일본에서는 음독으로 "신푸우"라고 불렀고 나중에 미국 언론에서 신풍의 뜻을 풀이한 훈독으로 읽어서 가미카제로 읽었고 그후 일본에서도 가미카제가 일반화되어 가미카제로 부르기 시작했다.

 

 

1944년 10월 25일 07시 25분 필리핀 루손섬 마발라캇 기지에서 세키 유키오의 시키지마 편대 5대가 출격을 했다. 당시 사마르 해전에 지원을 나갔다. 구리타 함대와 미군 태피 3와의 결전 중이었고 구리타 함대의 공격에서 벗어난 태피 3를 발견하고 공격을 한다. 카사블랑카급 태피 3 호위항모 세인트 로 CVE-63이 침몰한다. 

1944년 10월 25일 06시 30분 민다나오섬 다바오 기지에서도 발진했다. 기쿠스이 편대, 야마자쿠라 편대, 아사히 편대가 출격을 했다. 10월 25일 하루 동안 미 호위항모 1척이 침몰하고 5척이 피해를 입었다.

가미카제는 나름 전과를 거둔것이다.

 

 

가미카제 1번 공격으로 미 호위항모 세인트 로를 격침했다고 대대적으로 선전한다. 시간적으로 보면 이전에 태피 1을 공격한 것이 먼저였다. 1944년 10월 25일 06시 30분 다바오 기지에서 출격하여 태피 1의 생가몬급 호위항모 산티 CVE-29, 스와니 CVE-27에 자살공격을 시도했다.  비행갑판, 격납고 갑판 모두 뚫고 폭발했는데 산티는 당시 함재기 모두 출격해 유폭 위험이 적은 편이어서 재빨리 진화가 됐다.

스와니는 격납고의 함재기 9대가 유폭 되어 화재가 크게 났고 이틀 동안 연속 가미카제 피해를 입어서 전사자가 100여 명이 되었다. 일본에서는 스와니를 침몰시키지 못해서 가미카제 특공의 첫 전과로 미 호위항모 세인트 로 침몰을 대대적으로 선전한다. 

자살 특공대의 전과에 고무가 된 겐다 미노루 일본 해군 군령부 항공참모는 오니시 다키지로에게 전문을 보내서 칭찬하면서 다음에도 성공을 기대한다. 1944년 10월 25일 해군대신은 일왕을 찾아가서 전과를 보고한다. 일왕은 만족하며 칭찬했다. 이런 흐름으로 보아 오니시 다키지로의 독단이 아닌 계획하에 가미카제는 이뤄진 것이다. 

 

 

가미카제 특공대의 실제 첫 출격은 1944년 10월 21일이었다. 전과 달성 4일 전에 출격을 했었다.  전과가 있을 때까지 시키지마 편대가 무려 4차례 출격을 했었다. 악천후에 시달렸고 미 항모 발견을 못하거나 다층 방공망에 격추당하기도 했다. 4번째 실패 후 귀환하자 다음 공격에서는 돌아올 생각을 하지마라는 말을 듣고 5번째 출격을 했다. 

 

가미카제 특공대에 초반에 연료를 반만 지급했다는 기록은 없다. 처음부터 자살 특공을 의도해서 항공대를 배치한 것은 아니다. 일부 항공부대는 정상적인 폭격, 뇌격 공격하러 출격했고 그중에서 오니시 다키지로 휘하 제1항공함대 중 일부가 특별공격대로 조직되었다. 연료를 차등 지급할 상황이 아니었다.

특공대원들은 자살 특공에 대해 어떤 마음이었을까? 특공대원들의 수기에 담긴 심경의 변화가 있었다.

막바지 오키나와 전투 당시 출격한 특공대원들은 적함을 발견 못하고 귀환한 것을 마음속으로 다행으로 여겼다. 

특별공격대 시키지마 편대를 지휘 한 '세키 유키오'는 자발적 출격으로 알려져 있지만 첫 출격 하루 전에 선전을 담당하고 있는 보도반원 오노다 마사시에게 말을 한다. 반 농담조로 "이제 일본은 끝이야, 나 같이 유능한 파일럿을 자살 육탄 돌격을 시키려고 하다니 너무 한심하다, 나는 통상적인 공격을 해도 충분히 미 항모에 폭탄을 떨어뜨릴 수 있는데 그런데 가미카제를 시키니까 어쩔 수 없다, 왜 가냐면 사랑하는 아내를 지키기 위해서 간다"라고 한다. 결혼한 지 6개월 된 아내 아메코를 언급한다. 

 

가미카제 특공초반, 미 해군이 막지 못한 이유

1944년 11월에 조직된 미 전략폭격조사단 (USSBS)에서 종전 후 가미카제에 대한 보고서를 완성했다.

1944년 10월 가미카제 첫 등장부터 매월 가미카제 효율성을 측정했다.

가미카제가 효율성이 높은 이유를 분석했다. 대공격추가 어렵고 미 해군의 대공 전술이 특공기에 효과가 없었고 조종사들의 조정 불능이 없는 한 목표물을 공격한다. 아군이 회피기동을 해도 의미가 없다. 가미카제 특공대가 살아있는 한 계속 공격하기 때문이다고 분석했다. 이런 까닭에 미군은 초반 방어가 쉽지 않았고 너무나 기상천외한 전술로 사람이 스스로 폭탄이 되어 공격하는 듣도 보도 못한 전술로 심리적 충격이 컸을 것이다. 

자살 특공은 처음에는 심리적 충격에 따른 기습적 효과가 있었다.

가미카제 공격 방법은 두 가지였다. 6,000~7,000m 고고도 비행을 하다가 급강하하여 충돌한다.

해수면에서 가깝게 비행하면서 레이다를 피해서 접근해서 충돌한다. 이 두 가지를 같이 활용하자 미 해군 레이더 시스템이 혼란을 초래한다.

 

가미카제 특공기가 미 항모 본대 반경 안으로 진입하면 대응이 어렵다. 발견하면 짧은 거리에 대응할 시간이 부족했다. 당시 미 구축함 대공포 5인치 양용포가 발사할 시간이 부족했다.

레이테 해전의 일본 가미카제 명중률은 20.8%였다. 명중했다고 해서 다 침몰하는 것은 아니다.

레이테 해전에서 종전까지 태평양전쟁 기간 가미카제 명중률은 11.6% 였다.

일본은 1944년 10월 ~1945년 1월까지 폭격, 뇌격 등 통상 공격 명중률은 3.3% 였으므로 자살 특공대의 명중률이 높은 것이다. 

가미카제가 미 항모를 격침시키자 첫 전과에 일본 반응은 대대적으로 선전하면서 육군과 해군 모두 특공대원 영웅화 작업을 각종 언론과 일본의 주간 화보 잡지 '아사히 그라프' 등을 통해서 한다. 

※아사히 그라프는 1923년 창간하여 2000년 휴간한 잡지이며 77년 동안 뉴스, 르포 등을 보도 사진 위주로 전달했다. 당시 세태와 풍속 및 시대상을 가늠하는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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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월 21일 일본 의회에서 열린 국정 보고에서 당시 일본 총리 고이소 구니아키는 전황이 어떻냐는 질문을 받자 전황을 낙관할 수 없다고 시인하면서 특공정신을 강조한다. 1억 일본 국민은 타오르는 열정을 발산하고 용맹한 특공대원의 뒤를 따라 생산현장에서 더 확실한 정신승리를 보여줘야 한다고 말한다. 

가미카제 특공에 대한 일왕은 칭찬과 격려를 한다. 가미카제는 1945년 상징적, 전략적 차원으로 확대된다.

조선의 일부 지도층은 조선 젊은이를 학병으로 내몰기 시작한다. 가미카제 특공대원이 된 식민지 조선의 청년들이 생겨났다. 가장 유명한 인물은 창 씨 개명으로 '마쓰이 히데오'라는 조선인으로 원래 이름은 인재웅이었다. 마쓰이 하사관이 특공대가 되어 전과를 거뒀다고 선전하며 친일부역자들의 활약이 두드러지기 시작한다.

노천명, 서정주, 이광수 등  문인들은 글의 힘으로 친일에 앞장선다. 

이들은 1944년 12월 차례차례 추모시를 발표한다. 일본제국을 위해 충성을 바친 조선사람이 있다, 제국의 신민으로서 자격이 있다고 하면서 더 전선으로 보내야 한다며 부추긴다. 

 

1945년 5월 29일 도쿄 공습에 나선 B-29 격추 명령에 출격한 가미카제 특공대원은 노용우였다고 하면서 대대적으로 선전하면서 조선 본토에서도 친일부역자들이 황군의 영웅으로 선전했다. 신원이 밝혀진 조선인 특공대원은 20여 명이 된다. 가미카제 훈련을 시키던 부지에 건설된 일본 가고시마현의 치란 특공평화회관에 조선인 가미카제 11명 기록이 전시되어 있다. 강제 차출로 알려진 조선인 특공대원 탁경현은 유족들이 소송으로 오명을 벗어나기 전 2001년 탁경현을 모델로 한 영화 <호타루> (원제는 반딧불이)가 제작되었다. 

 

전쟁 막바지로 갈수록 가미카제 조종사 나이가 어려진다. 16~20세 가미카제 조종사가 해군에서 45%를 차지했다. 육군은 가미카제 조종사가 25%를 차지했다.  가미카제 조종사 16~20세가 전쟁 후반 육군은 65%로 증가한다. 소년병들이 전쟁에 나가서 책임지고 희생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다. 이런 분위기는 일본 사회 전반에 짙게 깔려있다. 

소년 만화잡지에 처음 연재된 만화 원작 마징가 Z 주인공은 17세이다. 건담시리즈의 파일럿 13~19세이다. 

이런 차이는 미국과 비교하면 확연하게 다르다. 미국 히어로물 주인공은 대부분 성인이다. 슈퍼맨 직업은 신문기자이며 대부분의 나라에서 지구를 지키는 것은 어른의 소양이다. 하지만 일본은 10대 후반의 히어로가 인기가 있는 것이다. 

 

가미카제를 접한 미국의 시각

처음 접한 미군 해군은 공포의 대상으로 여겼고 충격이 컸다. 사진을 찍고 영상을 가지고 있었지만 미국민들에게 공개를 하지 않았다. 더글라스 맥아더와 체스터 니미츠는 비공개를 주장했다. 가미카제 등장 약 7개월 후 1945년 5월 무렵 공개가 되기 시작했다.  시기적으로 오키나와 전투에서 미군이 가미카제에 대한 군사적 대응력을 갖춘 시점이었다.  가미카제가 무엇인지부터 설명을 하면서 나중에는 분석까지 쏟아내며 비이성적인 일본과 전쟁을 수행하고 있다고 강조한다.  

 

일본은 1944년 항공기 생산이 정점에 이른다. 개전부터 1944년 8월까지 항공기 생산량은 약 42,500대였는데 항공기 비전투 손실이 어마어마하게 확대된다. 비전투손실에는 고장, 사고일 수도 있는 데 1944년 중반에 비전투손실률이 약 30%였다. 전투에 나가보지도 못하고 항공기가 기지에 배치되는 도중에 떨어진 것이다.  1944년 중후반 필리핀, 대만이 기지항공대에서 발진했는데 본토에서 뜬 비행기가 난세이제도를 지나서 대만을 거쳤다가 필리핀으로 가야 된다. 이동 중 추락하는 비행기가 수두룩했다. 일본에서 대만으로 가는 소요시간은 당시 프로펠러로는 약 5~6시간 항정해야 했다. 처음 비행실력도 없는 신참 조종사들이 항로를 이탈하거나 악천후를 만났거나 하여 바다에 추락하는 일이 많았다.

 

무사히 기지항공대에 도착해도 항공기 1,000대 중 250~300대만 가동됐다. 항공기 정비병이 부족했고 부품이 없어서 적탄을 맞고 돌아온 항공기들을 고치지 못해 방치하기도 했다. 항공기 부품의 표준화 실패도 가동률이 떨어지는 원인 중 하나였다.

2차 대전 동안 미 항공기 비전투손실은 약 2,000대 이상이었다. 항공기 비전투손실 정상 범위는 약 5%이다. 

비전투 손실률이 높았다는 것은 조종사 훈련 시간, 물자, 장비, 연료가 모두 부족했다는 것이다. 

전투에 나가기 위해 대만에 보내는 동안 30%가 손실되므로 일본 수뇌부는 효율성 개선을 위해 적함에 쇄도하는 게 더 나은 선택이라 생각했다. 

 

비행기 추락사고 중에 하늘과 바다를 구분 못해서 추락하는 사고가 야간에 발생할 수 있다. 

조종사는 중력가속도의 힘을 받는 방향을 아래로 인지한다. 공중에서는 비행기가 상승, 하강할 때 받는 중력가속도가 중력과 방향이 다를 때 상하를 구분하기 어렵다. 비행속도가 빠를수록 중력을 거스르는 중력가속도가 커지면서 위, 아래로 착각하기 쉽다.

 

가미카제 타격의 폭발력은 항공 폭탄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를 발생시킨다. 에식스급 항모는 250Kg 항공 폭탄에 대한 데미지 컨트롤이 가능했다. 에식스급 250kg 항공 폭탄 화염에 맞춰 소화시설을 구축했는데 가미카제 타격으로 인해 특공기에 탑재되어 있던 항공유가 화재를 일으키면서 화재 진압이 어려워진다. 충돌, 폭발로 인해 특공기 파편이 발생한다. 폭격에 비교적 안전하다고 여겼던 공간까지 파편이 튀어나가면서 동시다발적으로 화재로 확대된다. '인간 유도미사일' 가미카제의 위력을 접한 미 해군은 미 항공모함 개발사에 영향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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