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르 해전 후반전
1944년 10월 25일 06시 45분 사마르 해역에서 구리타 함대는 예상치 못하게 미 제7함대 호위항모부대 태피 3을 맞닥뜨리게 된다.
태피 3 호위항모 6척에 실려있던 함재기들은 구리타 함대의 공격에 비상 출격한다. 출격하면 호위항모는 피신하기 때문에 귀환, 착함이 불가했다. 적함을 공격한 다음 레이테섬으로 가야 했다. 레이테섬에 상륙한 미 육군이 확보한 타클로반 비행장에 착륙해야 했다.
태피 3 함재기는 산발적인 방어 공격으로 폭탄과 어뢰로 발사하면서 구리타 함대가 태피 3를 공격 못하게 방해했다. 그러면서 1944년 10월 25일 07시 01분 근처에 있던 태피 1과 태피 2에게 SOS를 친다. 태피 2에서 함재기가 출격하여 공격을 해준다. 미 구축함들의 투혼 공격에 힘입어서 야마토는 역주행하게 된다.
공격에 시달리는 일본 주력 함대는 안정적인 포격이 불가능하였고 태피 3 호위항모를 추격해야 하는데 구리타 함대 중순양함만이 추격하게 된다. 구리타 함대 중순양함이 쏜 20cm포에 태피 3호 위항모가 피탄 당한다. 하지만 치명상을 입히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게다가 태피 3 호위항모는 함재기를 다 띄운 상태에서 데미지 컨트롤이 되어 격납고 유폭이 방지되어 있었다. 하지만 카사블랑카급 호위항모 갬비어 베이 CVE-73은 침몰하고 만다.
포격거리 조정하는 사격 관제를 하려면 어는 함에서 쏜 포탄의 물기둥이 어디 떨어졌는지 확인이 필요하다.
각국 해군뿐만 아니라 일본 해군의 물기둥 구분법이 있다. 포탄안에 염료를 넣는다.
일식 철갑탄마다 염료 색깔을 지정해서 야마토는 아무것도 넣지 않아 하얀색 물기둥, 나가토는 분홍색, 하루나는 노랑, 공고는 빨간색으로 염료를 넣어 물기둥 색깔로 탄착지점을 확인 후 포격 거리를 수정한다.
사마르 해전의 승기는 구리타 함대가 쥐게 된다. 태피 3가 분전했지만 철수를 한다. 구리타 함대는 추적한다.
1944년 10월 25일 09시 10분 레이테만 약 40Km 지점에서 추격을 중지하고 전열을 정비한다. 11시 20분 남쪽으로 돌려서 레이테만으로 전진한다.
12시 무렵 공습을 받는다. 12시 26분 레이테만을 바로 앞에 두고 되돌아간다. 구리타 다케오 일본 제2함대 사령장관은 무슨 생각으로 후퇴한 것일까? 의문이 남는다. 구리타 함대의 미스터리였다.
전후에 왜 돌아갔냐고 구리타 다케오와 인터뷰를 했는데 구리타 함대의 피해가 너무 컸고 레이테만으로 돌입하더라도 미 수송 선단 격멸은 무리였다고 판단했다. 북진을 해서 오자와 함대와 같이 미 3함대를 격멸하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을 했고 구리타 함대가 되돌아간 것은 단독 판단이며 참모들의 잘못은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참모장 증언에 '참모회의'를 했다고 언급했다.
구리타 다케오의 책임지는 모습에 전후에 미,일 평가가 좋은 편이었다. 하지만 소환조사에 나온 구리타 함대 참모장 고야나기 토미지의 인터뷰에서는 인근에 미 항공모함이 있다는 보고(레이테만으로 가는 길에 미 함대가 너무 많다는 보고) 받고 구리타 다케오가 전진을 포기했다고 했다.
미 3함대와 결전하러 북진한 것이 아니라 너무나 겁을 먹고 있어서 도망친 것이라고 솔직하게 말한다.
당시 구리타 함대가 출격하기 전에 적에 대한 정보, 정황 보고를 받았다. 1944년 10월 12~14일 대만항공전에서 대만에 추락하여 포로가 된 몇몇 미군 조종사들을 심문하여 미 해군의 정체를 파악했다. 미 제3함대의 강력한 고속항모부대 <38 기동부대> 전투 서열만 파악이 된다. 그 자료만 받은 구리타 함대는 전력이 약한 미 7함대 호위항모 부대가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래서 태피 3을 발견하고 에식스급 항모의 주력 부대로 착각했던 것이다. 야마토 전투기록을 보면 구축함을 상대한 것이 아니라 미 순양함과 교전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기동부대의 주력과 맞닥들였다고 생각했고 미 해군은 계속 공격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전함 야마토는 시부얀 해전부터 엄청난 공격을 집중받았고 미 항공기들의 집중공격 대상이었다. 대공전투를 하루에도 몇 번씩 치르며 녹초가 되어 함장부터 말단 승조원까지 지쳐있는 상태였다.
전함 야마토의 승조원들은 정신적, 체력적으로 더 이상 버틸 수 없었을 것이다.
구리타 함대의 '턴'에 다양한 시선이 존재한다. 일본의 많은 역사서는 구리타 '턴'은 결전하러 간 것이다고 하지만 실상은 도망쳤다는 것이다.
일본연합함대가 구리타 함대에 내린 출정 전 마지막 명령, 작전목표는 적 해상전력을 격멸한 뒤에 수송부대를 섬멸하라는 것이었다. 전투가 시작 전에 애매한 명령을 하달한 것이다. 애초에 연합함대 지도부의 결정이 잘못되었다.
일본 함대 통신문제의 기본, 진공관이 엉망진창이었다. 일제 진공관의 수준은 정말 낮았다.
통신장비에 내장된 진공관에 불량품이 속출했다. 무전기가 먹통이었고 밀리터리 스펙을 충족하지 못했다.
※밀리터리 스펙은 극한의 군사지역 환경에 버티는 내구성을 목표로 하는 미 국방부의 군사표준규격을 충족하는 제품을 뜻한다.
당시 민간에서 쓰는 민수용 진공관을 소량 생산하던 일본이었기 때문에 전장의 험한 환경에서는 제대로 작동되지 않고 고장이 속출했다. 또한 일본군 수뇌부의 기술 경시가 큰 문제가 된다. 전반적인 전기, 전자 공업 수준 미달로 신뢰성 문제가 발생했다.
오자와 함대의 기함 정규항모 즈이카쿠도 무선통신장비 수리를 마치지 못한 채 출진했다.
서로 서로 무전 송, 수신여부도 믿지를 못하게 되었다. 구리타 함대가 아침에 태피 3을 발견했을 때도 이시무라 함대가 격침당한 줄도 모르고 있었다. 전멸한 니시무라 함대에 돌격하라는 전보를 보냈다.
일본 함대의 통신두절, 문제로 상호 협조가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엔가뇨 해전
유턴한 구리타 함대는 회항을 결심하고 왔던 길로 다시 돌아가지 못하고 일본으로 향하게 된다. 산베르나르디노 해협을 통과한 후 일부는 수리 받으로 일본으로 향하고 일부는 싱가포르 인근 링가 정박지로 이동한다.
브루나이에서 뿔뿔이 해산한다.
대만 인근에서 전함 공고는 미 잠수함이 쏜 어뢰 2발에 격침을 당한다. 전함 나가토와 야마토는 일본으로 귀환한다. 구리타 함대는 퇴각한다.
시부얀 해전 이후 상황은 1944년 10월 25일 08시 15분 홀시는 오자와 함대에 4차례 걸친 함재기 공습을 실시한다. 3차 공습에서 일본 정규항모 즈이카쿠가 침몰한다. 경항모 즈이호, 치토세, 치요다도 침몰한다.
미 7함대 연락에 응답하지 않던 홀시는 고속전함 6척의 제34기동부대 사마르 해역으로 TF34 파병하며 우왕좌왕하고 있는 상황에서 치명타를 입은 오자와 함대가 퇴각한다.
윌리엄 홀시 미 제3함대 사령관은 오자와 함대가 던진 미끼를 물어 북진을 하는 판단 착오로 사마르 해전의 위기를 초래했었다. 이것은 실책과 논쟁을 불러일으킨 '황소의 질주'라고 불린다.
미 7함대의 연락을 받고 홀시는 제38기동부대는 남겨놓고 고속전함 6척을 먼저 사마르 해역으로 보냈다. 남은 항모 기동부대는 오자와 함대를 공격했다. 여기서 홀시는 또 한 번의 비난을 받을 일이 생긴다.
엔가뇨 곶에는 항모만 남은 상황이 된다. 오자와 전함에는 항공전함 이세, 휴우가가 있었다. 홀시의 3함대를 유인해 올라가던 오자와 함대 항모 4척을 잃고 퇴각하지만 만약에 항공전함 이세와 휴우가가 끝까지 해보겠다고 회항을 해서 미 항모 기동부대를 공격했다면 방어력이 약한 미 항모가 위험할 뻔했다. 이번에는 남아있던 38 기동부대 방어태세가 약해진 것이었다.
오자와 함대를 쫓아 북진할 것이 아니라 산베르나르디노 해협이나 잘 막고 있었어야지 우왕좌왕해서 구리타 함대나 오자와 함대 일본 어느 쪽 함대도 격멸하지 못하고 다 살려 보냈느냐는 비판에 홀시는 직면하게 된다.
홀시가 미 주력 전함만이라도 산베르나르디노 해협에 남겨놨더라면 전쟁의 양상은 달라졌을 지도 모른다.
윌리엄 홀시 미 제3함대 사령관에 대한 비판은 심각했다. 태피 3 사령관 클리프턴 스프레이그가 가장 신랄하게 비판한다. 도움을 계속 요청했지만 홀시는 묵살했고 나중에서야 도와주러 내려왔다는 것이다.
홀시의 실책은 산베르나르디노 해협 봉쇄 임무를 망각했고 사마르 해전 SOS에 늦게 응답했고 태피 3가 전멸 위험을 있었다는 것이며 홀시를 엄청 비판했다. 홀시가 판단을 잘했더라면 에반스 함장 등 미 구축함의 희생을 막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체스터 니미츠 미 태평양함대 사령관도 당황했다. 홀시에게 직접 암호전문을 보내 '제34기동부대는 어디 있는가RR'이라고 보낸다. RR은 암호해독 방지용 군더더기 문구로 전 세계가 궁급해한다는 뜻이며 암호 전문을 분리하는 기호이며 암호장교의 실수로 전달된 문구였다. 하지만 홀시는 모욕적이라고 생각했다.
의미 없는 암호해독 방지용 문구에 화를 낼 정도로 홀시는 본인의 임무를 망각하고 있었고 태피 3의 SOS요청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윌리엄 홀시 미 제3함대 사령관은 결과론적으로 태피 3의 전멸은 피했지만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홀시는 즈이카쿠를 발견하자 미 3함대 총 투입한다. 정규항모 즈이카쿠는 진주만 공습에 참전했었다. 미 항공모함에서는 절대 살려둘 수 없는 항모였다. 5~6발의 폭탄과 항공어뢰에 격침을 당한다.
1942년 5월 산호해 해전에서 일본 항모 즈이카쿠, 쇼카쿠에서 뇌격기가 출격해서 91식 어뢰 2발로 미국 항모 렉싱턴 CV-2를 격침 시켰다. 1942년 10월 산타크루즈 해전에서 호넷 CV-12는 격침당했다.
렉싱턴과 호넷은 에식스급으로 부활해서 즈이카쿠를 공격해 격침시킨다. 엔가뇨 해전에서 완벽한 복수를 한 것이다. 즈이카쿠에 퇴함 명령이 내련 진 후 승조원들은 갑판에 모여 마지막으로 본국을 향해 경례를 했다. 함장과 승조원 840여 명은 즈이카쿠와 함께 침몰한다.
즈이카쿠는 일본에게는 태평양전쟁 최고의 수훈함이었는데 일종의 자살공격에 투입돼어 미끼로 쓰인 어이없는 최후였다. 오자와 지사부로 일본 제3함대 사령장관은 항모 승조원들이 믿고 따랐던 장군이었는데 오자와 함대의 기함이 즈이카쿠였다. 오자와가 먼저 즈이카쿠에서 내려서 구축함으로 옮겨서 즈이카쿠가 침몰하기 전에 먼저 빠져나간다. 가장 먼저 도망가는 모습에 일부 승조원은 욕설을 뱉었다고 한다.
가미카제
1944년 10월 25일 07시 40분 사마르 해전에서 자살 특공대가 최초로 등장한다. "이 전법은 일본인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이라며 대본영 정보부장 아리스에 세이조가 선전한다. 전쟁의 패망의 그림자가 짙어지고 있다는 것을 안 일본의 최후의 수단이었다. 충격과 경악 너머에 감춰진 진실이 숨겨져 있다.
일본 사학계에서의 판단은 가미카제의 지원동기는 '강제성'을 인정한다. 군국주의 일본의 가장 대표적이고 상징적인 희생양으로서 가미카제를 묘사한다. 그들의 마지막 외침은 "일본 왕 만세"가 아니라 "어머니"를 외치며 죽었다고 한다. 반면 일본 우익강경파에서는 여전히 가미카제는 국가와 국민을 위한 자발적 희생이라고 주장한다.
일본 특유의 죽음에 대한 미학과 일왕 숭배 분위기가 복합 작용했다. 일본에서 전사자를 영웅화한 몇 가지 단초가 있었다. 1932년 1차 상해사변 당시 상하이 조계지에서 불거진 중국과 일본의 '상하이 전투'가 치열했는데 방어 진지 토치카를 구축한 중국군의 기관총 세례에 활로가 막히자 일본 육군 일등병 3명이 폭탄을 들고 토치카로 쇄도해 육탄 돌격을 한다. 일본에서 폭탄 3 용사로 일컬으며 대대적으로 선전한다.
도쿄 인근 사찰에 동상을 건립하며 미화로 확대 재생산한다. 이때부터 자발적인 죽음을 신성시 하는 분위기가 커진다. 태평양전쟁에 돌입해서도 이런 사건들이 많이 일어난다. 1941년 12월 진주만 공습 때 항공기뿐만 아니라 잠수정도 투입이 되었다. 일본 해군의 2인승 소형 잠수정 갑표적이 진주만 밖으로 탈출하는 미 군함을 노리고 주변에 갑표적 5척이 대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별다른 전과를 못 내고 격침당한다.
당시 10명의 탑승원 중에서 탑승원 1명은 의도치않게 새어 나온 유독가스에 실신해서 포로가 되고 9명은 전사한다. 처음에는 10명이 다 죽은 줄 알고 10 군신으로 추대하고 있었다가 나중에 1명이 포로가 된 것을 알고 9 군신으로 추대, 미화한다. 초반에는 '전의 고취'의 목적으로 나아가다가 태평양전쟁 중반 이후부터 변질된다.
미드웨이 해전 때 항공모함 4척이 격침되자 마지막으로 일본군 조정사들은 결사적인 저항을 한다. 마지막으로 남은 항모 히류에서 마지막으로 출격한 뇌격기 부대의 도모나가 조이치 대위는 미 항모 요크타운에 어뢰를 투하 후 그대로 돌진한다. 공격효과는 미미했다. 하지만 일부 생존 조종사들이 도모나가 조이치 대위가 자폭으로 생을 마감했다고 대대적으로 선전하면서 일본 언론에 대서특필된다.
1944년 중반 이후 절망적인 전황에 우발적인 자살 공격이 발생한다. 필리핀해 해전에서 최후를 맞은 장갑항모 다이호에서 항모 한대가 출격을 했는데 상승하다가 급강하한다. 조종사가 상승하면서 미 가토급 잠수함 알바코어가 쏜 어뢰를 발견하고 급강하하여 어뢰를 막아내며 자폭한다. 그때부터 절망적인 상황에서 자폭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겠다는 인식이 확대된 것이다.
영웅담의 단초를 대만항공전 직후에 정점을 찍는 사건이 발생한다. 1944년 10월 15일 일본 제26항공전대 사령관이었던 아리마 마사후미 소장이 장군임에도 불구하고 공격부대를 이끌면서 직접 선도기에 탑승했다.
미군의 대공 방어망을 뚫지 못하고 프랭클린 CV-13 가까이에 쇄도한다. 귀환한 병사들은 사령관이 어뢰를 쏘고 적함에 자폭했다고 확대보고하면서 일본 언론에 대서특필된다. 이른바 ' 장군특공'의 모범으로 추앙된다.
아리마 마사후미 소장은 본격적으로 가미카제 특공을 추진하려던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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