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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지식

전국 우량아 선발대회

by 소시민스토리 2024. 3.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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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우량아 선발대회

건강한 아이들이 주목받던 시절 몇 백대 1의 경쟁을 뚫고 당선되면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

이창호 바둑기사, 작곡가 주영훈, 윤현진 아나운서는 우량아 선발대회 아기 출신이다.

주영훈 작곡가는 73년도 참가해서 분유 잡지 광고 모델로도 활동했다고 한다.

이창호 바둑기사는 77년도에 참가해서 전국 2위를 차지했다고 한다. 윤현진 아나운서는 79년도에 참가했다고 한다.

 

 

당시에는 모유를 먹이던 시절이었고 분유는 외국에서 들어온 것이라 풍요의 상징처럼 느껴졌다. 

분유를 먹인 아이들은 왠지 피부가 하얗고 토실토실하고 이목구비가 오똑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우량아 선발 대회의 역사는 100년이다. 국가 기록원의 자료에 따르면 1926년 5월 14일에 경성시내 인사동 태화진찰소 앞마당에서 200여 명의 아이들과 부모들이 모였다. 생후 3개월부터 5살까지 어린아이들이었고 이날 행사는 '어린이 건강진찰 대회'였다. 

1930년대까지 아이들의 건강을 확인하는 건강아동선발대회가 있었다. 

 

한국전쟁직후에도 우량아 선발대회는 열렸다. 예심, 초심, 재심, 결심 등 몇 단계를 거쳐서 진행될 정도로 인기가 아주 높았다. 부모들은 통통하게 살이 오른 우량아들을 보면서 내 아이들도 건강해질 수 있을 것이라는 대리만족을 얻었다. 

 

1962년 2월 2일 동아일보 신문에는 분유회사가 지원한 제6회 우량아 선발대회에서 일등한 아기 사진이 실렸다. 예전에는 남자아이들 사진은 옷을 하나도 입히지 않고 사진을 찍었다. 백일사진, 돌사진에 남자아이들은 발가벗겨서 사진을 찍었고 사진관 유리문에 전시하기도 했다.

분유로 유명한 N사는 1967년 1월 10일 국내에서 처음 분유를 제조해 판매하기 시작했다. N분유회사는 마케팅 차원에서 1971년부터 전국 우량아 선발대회를 주관했다.

첫 대회 참가 신청자만 1,830여 명에 달했고  당시 동아일보에 제1회 전국 우량아 선발대회 광고를 실었다.

 

N분유회사에서 주관한 제1회 전국 우량아 선발대회 첫대회 우량아는 강원도 춘천에 사는 1969년 11월 생으로 당시 16개월 한 OO 아이였다. 우승 우량아는 13Kg이었다. 

요즘 16개월 아기는 평균 몸무게가 10Kg이다. 우량아 한 OO 아기는 태어날 때 4Kg이었고 아기를 받은 사람이 20년간 아이를 받았지만 이런 무거운 아기는 처음이라고 말했다.

TV 중계를 할 정도로 인기가 높았으며  대회 현장에 당시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참석했다. 수상자들은 청와대에 초청받기도 했다. 우량아로 뽑힌 아기 어머니도 관심을 집중받았다.

 

 

우량아 선발대회의 기준은 20개월 미만, 가족 모두가 건강해야되고 질병이 없어야 하며 영양 상태가 좋아야 했다. 그중에서 우량아 선발대회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선발 기준은 체중과 머리둘레였다.

TV중계를 보는 시청자 눈에도 키가 크고 살집 좋은 아기들이 우승하는 것으로 보였다. 

우승자에게는 1년 치 분유와 상금이 수여됐다.  수상한 아기 중에는 분유광고 모델로 활동한 아기도 있었다. 

인기가 높은 우량아 선발대회 한때 지원자는 연 2만 명에 육박하기도 했다. 

 

우량아 선발대회 때문에 분유 광고 전쟁이 일어났다.

71년 5월 4일 동아일보 광고에 71년도 최우량아는 모두 S분유를 먹고 있는 아기들이라는 사진이 실렸다. 

하지만 다른 분유회사에서도 자사 분유 먹고 우량아 선발대회 우승했다는 광고 전쟁을 벌이기 시작한다. 

우량아 만들기로 시작된 분유광고 경쟁이 너무 과열되었다. 상호 비방전까지 확전 되어 결국에는 법정 분쟁으로 이어지고 한 동안 분유 제조업체들이 분유광고 중단에 합의하기도 했다.

 

인기가 있던 우량아 선발대회가 역사속으로 사라진다. 모유가 좋다는 사실이 과학적으로 입증이 되면서 우량아 선발대회는 시들해진다. 무조건 살집이 있는 아이보다 건강한 아이로 키우자는 분위기로 전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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