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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지식

36년간의 야간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

by 소시민스토리 2024. 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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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년간의 야간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

밤 12시 사이렌 소리가 울리면 야간통행금지를 알리는 신호였다. '통금', '야통'이라 불리며 밤 11시가 되면 거리에서 막차를 놓친 사람들이 택시를 잡으려고 북새통이 벌어졌다. 

야간 통행금지는 1945년 광복직후부터였다. 1945년 서울, 인천에서 오후 8시부터 다음날 오전 5시까지였다.

나중에는 전국으로 확대되며서 통금시간대는 밤 12시부터 다음 날 새벽 4시까지 통상적인 야간통행금지 시간이 된다.

 

통금의 목적은 치안 유지 때문이었다. 그 당시에는 치안이 좋지 않았고 범죄율을 낮추려는 목적이었다. 

1945년 시작해서 쭈욱 이어져 오다가 1982년 1월 6일 0시부터 36년 4개월 만에 제도가 사라졌다.

밤 10시가 되면 TV, 라디오에서 자막이나 음성으로 "청소년 여러분 밤이 깊었습니다.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습니다'나온다. 

밤 11시 술집이나 나이트 클럽에서는 "이제는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 음악이 나왔다. 술집도 하나둘씩 문을 닫기 시작했고 밤 12시가 되면 사이렌 소리가 울렸다. 밤 12시 사이렌 소리가 들리며 바리케이드를 설치하고 방범대원이 돌아다니면서 차량마다 검문했다. 집에 안 간 사람이 있으면 호루라기를 불기도 했다. 

 

크리스마스이브를 기다렸다. 크리스마스이브에는 야간 통행금지가 임시로 해제되었다. 명동거리, 도심에서는 사람들이 인산인해였고 밤 12시에 거리를 돌아다닌다는 것만으로도 좋아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사람 구경하느라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크리스마스 분위기에 야간통행금지 자유화까지 더해져 크리스마스이브에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크리스마스이브, 석가탄신일, 12월 31일은 야간통행금지가 없었다. 

통금을 임시 해제한 날은 숙박업소가 대목이었다. 숙박업소 바가지가 성행했고 크리스마스이브 베이비가 많이 생겨서 9월달에 아기 출생률이 높았다.

 

방송을 하던 연예인들은 허가받은 방송국 차를 타고 귀가했다. 1971년 故배호 <0시의 이별> 노래가 발표 직후 금지곡이 되었다. 

 

"추억만 남겨놓은 젊은 날의 불장난

원점으로 돌아가는 0시처럼"

-0시의 이별 故 배호

 

0시에 헤어지는 것은 야간통행금지 위반이라고 금지곡이 되었다.

 

야간통행금지가 있었던 시절에 과학자는 밤에도 돌아다닐 수 있었다. 언론인, 수사기관 정보원 등 일부 특별 층에만 야간통행증이 발급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과학기술에 관심이 컸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간부에게도 야간통행증을 발급했다. 일부는 이것을 이용해 술을 먹거나 하였고 통행증을 위조해서 도둑들이 성행하기도 했다. 공무원, 의사, 신문기자 등 신분이 확실하고 야간 통행이 꼭 필요한 사람은 야간 통행증을 발급받을 수 있었다. 1950년대는 전국에 2만여 명이었다. 심야 라디오 DJ도 야간 통행증을 받아야 해서 가수 이장희, 윤형주 등이 발급받았다.

 

 

통행증이 없이 밤길을 다니면 단속에 걸려 통금시간이 끝날때까지 파출소나 경찰서에 역류되어 있다가 풀려나기도 했다. 호송차에 실려가기도 했고 즉결심판에 넘어가기도 했고 벌금, 구류처분을 받기도 했다. 당시에 야간통행금지법 위반 죄목이 있었다. 

 

통금이 해제되는 새벽 4시에는 도둑잡기 좋은 시간이었다. 일반 시민은 통금이 해제되는 새벽 4시에 외출하는 것이 극히 드물었다. 하지만 도둑은 4시가 되면 문을 슬쩍 밀고 밖으로 몰래 나왔다. 당시 경찰은 방범대원들을 데리고 주택가 골목에서 잠복하고 있다가 보자기에 값비싼 물건을 싸들고 나온 도둑을 잡는 일이 다수였다.

 

단속을 피할 수 있는 지역이 있었다. 70년대 경상남도 상주시 (당시 상주군)에서 한 대폿집에서 술을 마시던 총각들이 믿는 구석이 있었는지 밤새 술을 마셨다. 새벽에 술집에서 나오자 경찰을 향해서  "나 잡아봐라"하고 어디론가 도망을 갔다. 경찰들은 이 총각들을 쫓아가지 않았다. 알고 보니 상주시에서 다리하나를 건너면 충북 보은땅이었고 당시 충북은 통행금지가 없어서 단속을 할 수 없었다.

충남에서 술을 먹다가 통행금지 사이렌이 울리면 바로 충북으로 건너가서 술을 마실수 있어서 술은 경계선에서 마셨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도 있다.

 

시대별로 달라지기는 했지만 지역별로 통금을 풀어주기도 했다. 제주도와 울릉도는 1964년 비교적 안전하다는 이유로 통금이 해제되었다. 충청북도는 유일한 내륙이라고 안전하다고 판단해서 1965년 통금을 풀어주었다. 경상북도 경주시 등 관광지도 통금 제외 대상 지역이었다. 밤새 술을 마시고 싶으면 관광지로 향했다.

 

야간통행금지가 폐지된것은 1982년이다. 결정적인 계기는 86 아시안 게임과 88 올림픽이었다. 통금은 신체의 자유를 압박하는 것이라서 국제경기를 앞두고 통금 해제 필요성이 커졌다. 

2023년 야간통행금지 마을이 있다. 비무장 지대 안에 있는 하나밖에 없는 마을, 대성동 마을이다. 이곳은 내비게이션에도 나오지 않는 마을로 철책도 없이 북한을 마주한 유일한 민간마을이다. 마을에서 군사분계선까지 거리가 약 400m에 불과하고 성인기준 걸음걸이로 5분이면 도착한다.

대성동 마을이 파주보다 북한 개성이 더 가까운 마을이어서 경계가 삼엄해서 주민들의 안전을 위해서 농사 지을 때도 무장 경계 태세이고 매일 저녁이면 주민들 수를 확인하고 자정부터 새벽까지 야간통행금지가 시행되는 유일한 동네다. 대성동 마을의 파격 혜택은 세금면제와 병역면제로 2가지다.

 

1989년 최초의 24시간 편의점이 도입되었다. 1998년 찜질방이 문을 열었다. 식당, 찜질방, 피트니스 센터 등 24시간 영업이 허가되었다. 24시간 영업이 진행되면서 퇴폐향락 문화가 활기를 띠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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