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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지식

월터 크루거와 야마시타 도모유키, 루손섬의 혈투

by 소시민스토리 2024. 3.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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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터 크루거와 야마시타 도모유키, 루손섬의 혈투

월터 크루거 미 육군 제6군 사령관은 루손섬 전투 당시 1945년 1월 마지막 주 발행본, 미 시사주간지 표지모델(타임지)로 등장했다. 대단히 까칠하고 거친 스타일이었다고 평가된다. 직속상관이었던 더글라스 맥아더는 월터 크루거를 전술적으로 훌륭하고 뛰어난 야전 지휘관이었다고 평가했고 미국 역사가들은 전술 부분에서 가장 뛰어난 지휘관이었다고 평가했다.

 

 

1943년 미 육군 제6군 사령관에 임명되어 비스마르크, 뉴기니, 필리핀 등 태평양 섬 전투를 지휘한 역전의 명장이었다. 하지만 레이테섬 전투에서 두달간의 혈전은 승리로 이끌지 못했다. 

레이테 섬에 상륙한 다음에 최대한 카리가라산으로 진격을 했어야 되는데 크루거가 신중한 나머지 해안선 방어에 집중했고 진격에 지연을 시켜서 일본의 방어 시간을 벌어줬다는 비판을 받는다. 상륙 후 진격 지연으로 호기를 잡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루손섬에서 명예 회복을 해야 한다. 미군 예상으로 루손섬 방어 일본군은 17만 ~23만이었다. 미군은 이에 대비하여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루손섬으로 가야했다. 윌터 쿠르거는 독일 출생이다. 독일계는 미국 사회의 다양한 구성원 중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다. 독일에서 태어나고 자라다가 여덟 살 때 미국으로 이민을 왔다.

독일 이민자출신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과 차별을 받았다.  2차 대전 유럽전선에 배치되지 않은 것은 독일 출생 때문이라는 추측들이 있다. 1934년 맥아더의 육군참모총장 시절부터 월터 크루거를 신임했다. 

맥아더 요청으로 미 육군 제6군 사령관으로 발탁을 했다. 

 

 

필리핀 탈환을 위한 지상전을 펼칠 루손섬에서의 일본 지휘관은 야마시타 도모유키 일본 육군 제14방면군 사령관이다. 미군 병력은 제6군 약 19만 3천명이었다. 일본군 병력은 약 25만 명으로 병력면에서는 일본군이 우세했다. 하지만 레이테 해전, 전투에서 패배해서 일본 제해권, 제공권은 상실한 상태였다. 

야마시타 도모유키 일본 육군 제14방면군 사령관은 최대한 버티자는 작전목표를 세우고 본토 결전을 준비할 시간을 벌기 위해 최대한 버티는 지구전을 선택한다. 지구전을 위한 장소를 정해야 하는데 1945년 1월 야마시타는 루손섬 전역에서 분산방어를 하면서 가장 중요한 지역으로 북동부 지역의 산악지역에서 끝까지 버틴다는 작전을 세운다. 1944년 12월 중순 레이테섬 결전을 포기하고 루손섬 지구전을 결정한다. 

야마시타는 병력을 세개 집단으로 나눠서 병력을 배치한다. 야마시타가 직접 지휘하는 병력을 '쇼부 집단 약 14만 명'을 루손 섬 북부에 배치한다. 가장 오랫동안 지구전을 전개할 핵심부대가 된다.

'켐부 집단 약 3만 명'은 필리핀 비행장을 포함한 마닐라 북서 지구에 배치한다. '심부 집단 약 8만 명'은 마닐라 북동 지구에 배치한다.

 

1945년 1월 9일 09시 30분에 미군은 루손섬에 상륙한다.

미 육군 제6군 14군단, 1군단은 링가옌만에 상륙했고 상륙 당시 일본군의 저항은 없었다. 

일본은 상륙전보다 최대한 내륙으로 끌어들인 후 결사항전 하는 것을 선택했다. 일본의 목적은 최대한 시간 끌기였다. 1945년 1월 30일 미군은 핵심비행장 클라크 비행장까지 탈환한다. 1945년 1월 29일 맥아더는 미 육군 제11군단에게 수빅만 산안토니오 상륙작전을 지시한다. 막아서 일본군의 바탄반도 진입을 봉쇄하려는 것이다. 1945년 1월 31일 미 육군 제8군 소속 11 공수사단을 투입하여 마닐라를 목표로 공격할 수 있게 바탕가스에 11 공수사단을 투입한다. 최대한 빨리 마닐라를 점령하기 위한 맥아더의 공수부대 투입 작전이었다. 

1945년 3월 코레히도르섬에 직접적으로 점령하기 위해서 공수부대를 투입한다. 바탄반도의 철수를 막기 위해서였다. 거기에 더해서 미군은 보급이 링가옌만으로 충분치 않았다. 가장 보급할 수 있는 좋은 지역은 마닐라만이었다. 최대한 빨리 마닐라만을 개방하는 것이 필리핀 작전, 전투의 필수적이었다. 그래서 링가옌만으로 상륙하는 미 육군의 제6군의 진공은 너무 늦어서 제8군 소속 공수부대가 투입되었다. 

 

 

 

일본은 1944년 7월 만주의 제2기갑사단을 필리핀으로 보낸다. 완전 편제에 가까운 최정예 기갑사단이었다.

보유하고 있던 주력 전차는 47mm 대전차포를 탑재한 97식 치하 개(改) 전차고 지원용 장갑차도 많았다. 

필리핀으로 오는 도중 미 3함대 제 38기동부대와 미 잠수함 공격에 병력, 전차가 많이 수장된다. 

3개 전차연대가 상륙하는데 전차 제 6,7,10연대와 기동보병 제2연대, 기동포병연대 및 각종 지원부대를 포함해서 전차 200대, 30여 문의 화포, 차량 1,400여 대, 기계화 보병 6,500명 상륙했다.

이 정도로 준비하고 루손섬에서 미군과 일전을 앞두고 있었다. 

 

미군은 제1군단 기갑부대가 주력이었다. 미군 기갑부대 주력은 M4 셔먼이었다. 75mm M3 전자포를 탑재했다. M4 셔먼과  97식 치하 개(改) 가 맞붙었다. M4 셔먼은 일본 97식 치하 개(改)  포탄에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와 반대로 M4 셔먼 포탄 1발만 발사해도 일본 중전차는 분해가 되었다. 일본군 제2기갑사단 전차 200여 대 중 180여 대가 격파당했다. 병력 2,000여 명, 차량 370여 대가 손실된다. 1945년 2월 6일 일본군 제2기갑사단은 <전멸 판정>을 받는다.

 

 

제2기갑사단 잔류병은 루손섬 북동부 산악지대로 도망을 간다. 미군 전차를 상대할 방법은 육탄공격뿐이었다. 기동 하는 전차를 육탄공격 할 수 없다. 육탄공격의 전제 조건은 미 전차를 멈춰 세워야 한다. 정글 속에 들어가 굵은 통나무를 준비해서 미군 전차가 지나가면 궤도에 통나무를 끼운다. 통나무를 끼우려다 뒤따라오는 미군 전차들의 기관총 공격을 받고 전사한다. 통나무를 궤도에 끼워서 미군 전차가 멈추면 특공조가 투입된다. 특공조의 무기는 곡괭이였다. 전차 해치를 여는 용도로 사용한 다음 수류탄을 투척하거나 권총을 난사한다. 일본군의 전차 공격에 미군 전차가 피해를 입자 미군 전차에 일본군 보병이 올라오지 못하게 하려고 해치, 포탑 곳곳에 못으로 용접을 했다.  M4 셔먼에 나무판자를 옆에 덧댔다. 일본군은 대전차 자기 흡착식 지뢰를 가지고 있어서 자석이 전차에 부착되지 말라고 나무를 전차 옆에 덧댔다.

 

시간이 갈수록 미군 전차 파괴가 효과가 미미해지자 수많은 일본군 보병들이 가슴에 대전차 지뢰를 안고 미군전차 밑으로 들어가 자폭공격을 하다가 전사를 한다.  하지만 이 방법도 효과가 적어지자 일본군은 폭약을 메고 전차 밑으로 들어가라고 지시한다. 

일본의 필리핀 전차전은 결국에는 자폭공격으로 변질되었다.  일본군 병사들의 목숨은 처참하게 버려진다.

 

일본군은 보병이 전차를 상대할 때 가지고 있는 무기가 있었다. 필리핀에서의 일본군 보병이 대전차를 상대하는 무기는 곡괭이였다. 전차에 맞서는 보병은 먼 거리 확보가 상식이다. 어떤 나라든지 보병용 대전차 무기는 발사 화기를 선택한다. 당시 일본군은 보병용 대전차 무기로 4식 분진포가 있었다. 4식 분진포는 노획한 미군 바주카와 독일이 제공한 판처슈렉 도면을 참고해 제작했다.

 

대전차 무기를 만들었다면 일선 부대에 제공을 하는 것이 당연한데 주지 않는다. 본토 결전을 위해 일본에 비축해야 된다는 이유였다. 전선에 있는 병사들은 알아서 싸워라는 뜻이다. 일본군 병력자원을 소모품으로 여겼으므로 미군 전차를 상대하는데 제공된 무기는 곡괭이였다.  만약 4식 분진포가 필리핀 전차 전에 있었다면 전쟁의 양상은 달라졌을 것이다. 가까운 거리에서 M4 셔먼을 관통할 가능성이 있었다.

 

미군의 마닐라 점령은 루손섬 최대의 보급항이 열리는 효과가 있었다. 1945년 1월 30일 미군 <클라크 비행 기지>를 탈환한다. 더글라스 맥아더 미 남 서태평양지역군 사령관은 빠르게 마닐라를 점령해야 하는데 월터 크루거 미 육군 제6군 사령관이 이끄는 제6군의 진격 속도가 느리다고 보았다. 맥아더는 빨리 마닐라로 가라고 명령했고 맥아더는 직접 행동개시한다.  직접 미 육군 제8군 소속 11 공수사단에 직접 명령을 내려 바탕가스에 공수작전으로 진입을 해서 곧장 마닐라로 향하라고 명령한다.

월터 크루거는 압박을 느낀다. 제1기병사단에 지시하여 마닐라로 빨리 가라고 명령했고 3일 동안 110Km를 진격했다. 

 

맥아더가 마닐라 진격을 재촉한 이유는 일본 야마시타가 마닐라를 포기할 것이라 예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월터 크루거는 일본군이 마닐라를 방어 할 것이라 예상했다. 결과적으로는 월터 크루거의 예상이 맞았다.

야마시타는 마닐라를 무방비 도시로 만들려고 했지만 마닐라를 방어하고 있던 이와부치 산지 일본 해군 육전대 <제31특별근거지대>사령관이 마닐라 비무장도시 선언 명령을 거부하고 끝까지 싸우겠다고 한다.

독단행위가 초래한 마닐라 시가전이 벌어진다. 제31특별근거지대 일 해군 육전대와 미 육군 1 기병사단이 충돌한다.  시가전은 끔찍한 전투가 벌어질 수밖에 없다. 마닐라 시가전은 베를린, 바르샤바와 함께 제2차 세계대전에서 가장 큰 시가전이 일어났던 3대 도시 중 하나였다. 

 

1945년 2월 3일 마닐라 전투가 개시되었다. 1945년 3월 5일까지 마닐라 시가전이 어어지고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는다. 마닐라는 1574년 마닐라 전투, 명나라 출신 해적단, 군벌과 스페인 군의 충돌로 많은 목숨을 잃었다.  1899년~1902년 필리핀 제1공화국과 미국의 충돌로 큰 피해를 입었다. 1945년 미군과 일본군 시가전은 이전의 충돌보다 더 큰 피해를 입는다. 미군 전사는 1,000여 명, 부상은 5,500여 명이었다.

필리핀 민간인 사망자 수는 최소 10만 명, 최대 24만 명으로 추정된다.

일본군 전사는 16,000여 명이 넘는다. 이 시기에 마닐라에 자리한 문화유적이 파괴된다. 지금도 구도심에는 당시 건물의 30%가 파괴됐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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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2월 6일 미군의 마닐라 입성 4일 후 더글라스 맥아더는 승리를 선언했다. 혼선이 생겨 한 달간 피해가 더 커졌다. 맥아더는 일본군이 마닐라에서 방어를 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과소평가했다. 저항이 없을 것이라 판단하고 본인의 생각대로 승리를 선언한 것이다. 맥아더는 민간인 피해를 줄이기 위해 폭격을 금지시키고 시가전을 선택했다. 시가전에서 민간인을 겨냥한 일본군의 조직적인 보복, 학살 사건들이 발생했다. 대학, 교회에서도 학살을 자행했다. 

 

일본은 미군의 필리핀 상륙 소식에 연합군 포로를 조선으로 이동시킨다. 태평양전쟁 기간 중 연합군 포로 이송은 계속되었다. 일본 본토, 조선, 만주로 이동시켜 강제 노역을 시킨다. 연합군 포로 이송은 총 12만 6천여 명이었다. 

포로 이동 도중 연합군 포로 사망자는 2만 1천여 명이었다. 1944년 10월~12월 미군의 루손섬 상륙이 임박해지자 일본은 연합군 포로 학대, 학살을 감추기 위해 대대적으로 일본 본토로 이송했다. 당시 일본 본토로 끌려가던 포로들은 일본 선박을 'Hell Ship(지옥선)'이라고 불렀다.

필리핀을 떠난 지옥선은 미 잠수함 공격에 파손, 침몰한다. 일본군은 지옥선에 포로수송선이라는 표식을 하지 않았다. 미 잠수함은 당연히 선박 정체파악이 불가능하여 즉시 공격했다. 1944년 10월 21일 아리산마루 포로수송선은 마닐라를 출항하여 연합군,민간인 포로 1,781명을 수송했는데 1944년 10월 24일 미 잠수함 공격에 침몰했고 포로 9명만 생존했다.

 

포로수송선의 내부는 지옥같았다. 1944년 12월 13일 마닐라에서 출항한 포로 수송선 오료쿠마루가 출항하자마자  에식스급 호넷에서 출격한 함재기 공격에 침몰한다. 압록강에서 이름을 따온 오료쿠마루 포로 수송선에는 1942년 바탄, 죽음의 행진에서 살아남은 미군 포로들이 타고 있었지만 필리핀 수빅만에서 침몰하며 270여 명이 사망한다. 생존자들은 수영을 해서 육지로 돌아갔고 다른 상선 2척에 나누어 다시 포로 이송이 된다.

포로 1,000여 명을 태운 에노우라마루는 163평정도 공간에 700명을 싣는다. 화물선은 사람을 싣는 용도가 아니므로 환기가 되지 않아 호흡조차 쉽지 않다. 연합군 포로에게 절대적으로 부족한 물과 식량을 지급하지 않는다.  배설물이 넘쳐나고 추위가 엄습했으며 1945년 1월 9일 호넷 함재기에 피습당한다. 연합군 포로 500여 명은 즉사한다. 인간의 존엄은 사라졌고 끔찍한 고통만이 남게 된다. 

 

일본군은 마닐라의 민간인을 학살했다.일본은 전쟁 중 마닐라 시민들이 미군에 협조하는 게릴라 편으로 갈 것을 우려했다. 일본군은 마닐라에 거주하던 독일인까지 공격했다. 마닐라 주재 스페인 공관을 습격하여 외교가 단절된다. 야마시타 도모유키가 전쟁 후 전범으로 처형된 주된 이유가 마닐라 민간인 학살 방조 죄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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