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2월 3일 마닐라 전투가 개시되고 1945년 3월 5일까지 마닐라 시가전이 이어진다.
일본군은 민간인을 겨냥한 일본군의 조직적인 보복과 학살을 자행했다.
피와 광기로 얼룩진 마닐라 시가전이었다.
시가전에서 패한 야마시타의 쇼부집단은 루손섬 북동부 바기오 지역에 동굴 진지를 구축했다. 산악지형을 활용해서 일본군은 방어선을 친다. 미군은 3일간의 걸쳐 수천 발의 포탄으로 공격했고 그 다음 전차와 보병이 포병의 지원을 받아 35~50m 앞까지 진격했다. 참호를 파서 일본군 동굴 진지를 포위했다.
미군은 일본군을 고사시키려는 작전으로 신중하게 접근했다. 전차를 토치카처럼 활용을 했고 서두르지 않았다. 돌격지점에서는 화염방사기, 수류탄, 유탄발사기로 공격했다(일본군 대대장 기록). 미 전차 M4셔먼은 위력적이어서 막을 방법이 없었다. 육탄공격뿐이었다. 결국 일본군 보병은 미 전차를 향해 만세 돌격을 한다.
일본군은 동굴 진지를 만들었지만 하나씩 뺏기게 됐고 더 산속으로 들어간다. 루손섬 북쪽 제2선 동굴 진지에서 산악 지구전이 전개된다.
미군은 '병따개 전법'을 구사한다. 일본군 동굴 진지를 무력화시킨 미 지상군의 전법이다. 정식 명칭은 Blowtorch and Corkscrew' 토치 주입과 코르크 따개 전법이다. 동굴에 구멍을 뚫거나 입구를 통해 화염방사기에 가솔린, 네이팜탄을 주입하여 폭약으로 동굴 입구를 파괴한다. 루손섬 전투에서 활용되며 이후 오키나와 전투에서 체계화, 보편화된다. 그 과정에서 켐부집단이 소탕이 됐고 1945년 6월 쇼부집단 병력 약 20%만 생존했다. 일본군은 끝까지 항전을 이어가려고 게릴라전을 한다. 밤에는 마을로 내려가 식량을 약탈하고 낮에는 결사 저항을 한다. 미군은 산발적인 혈전을 거듭하면서 넓은 산악지대에 숨어있는 일본군을 소탕하지 못한다. 태평양전쟁 종전 후에도필리핀 전역은 끝나지 않는다. 산발적으로 1946년 봄까지 저항을 했다.
일본군 전사자는 루손섬 전투 약 20만 명, 레이테 해전 포함 필리핀 전역 약 30만 명, 최대 52만명으로 추정된다. 태평양전쟁 기간 일본군 전사자 50% 이상이 필리핀 전역에서 전사했다. 필리핀 전역 일본군 생환율은 약 3% 정도이다.
1945년 9월 3일 09시 30분 야마시타 도모유키 <항복문서>에 서명한다.
정글에서 29년 동안 항복하지 않은 일본 패잔병, 오노다 히로
오노다 히로 일본 육군 제14방면 정보장교 소위는 전쟁이 끝났는데도 홀로 필리핀 루방섬 정글에서 홀로 1974년까지 29년동안 자활하며 버틴다. 전쟁이 끝났음에도 혼자 게릴라전을 펼치고 있는 것이었다.
마을에 내려와서 음식을 훔쳐가기도 하고 필리핀인을 살해하기도 해서 마을사람들이 오노다 히로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아직도 일본군이 있다는 사실이 세간에 알려지면서 사람들이 전쟁이 끝났고 일본이 항복했으니 그만 일본으로 돌아가라고 해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노다 히로는 그런 명령을 받은 적이 없다며 버틴다.
귀국 명령을 내릴 직속 상관을 수배했지만 전범 재판을 받고 복역하거나 석방된 후 사망했다. 상관의 상관을 찾아서 결국 상급부대 사람에게 명령서를 받아서 1974년 3월 9일 임무 해제 및 귀국명령서를 전달했다. 명령서를 받고서야 정식으로 투항식을 치른 후 마르코스 필리핀 대통령의 면책 절차를 진행했다. 마침내 정글에서 내려와 일본으로 귀국한다. 전범 재판의 기소 가능한 공소시표가 이미 지나서 처벌도 어려웠다.
1974년 3월 12일 일본에 도착한 오노다 히로는 일본 우익에서 영웅이 되어 있었다.
비판하는 쪽은 군국주의의 낡은 망령이라고 해석하고 우익에서는 군인정신의 화신이라고 해석을 하는 등 서로의 목적에 따라 찬양하거나 비판했다. 한 인간이 전쟁 속에서 어떻게 광기를 가지게 됐는가는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오노다는 그가 죽을 때까지도 전쟁이 끝난 후 정글에서 살면서 자신이 살해한 필리핀 사람들에 대한 사과도 없었으며 질문에도 묵묵부답이었다.
당시 해외토픽으로 국내에도 보도가 된다. 1974년 3월 12일 귀국하자 마자 "일왕 만세"를 외쳤다. 그가 거절한 일본 정부 위로금과 각계 각층의 성금은 야스쿠니 신사에 기부됐다. 종전 후 자신이 살해한 필리핀 민간인에 대한 사과 요구에는 끝까지 침묵했다. 2021년 제74회 칸 영화제에서 <주목할 만한 시선>부문 오프닝 작품으로 프랑스 영화 감독 아서 하라리의 영화 '오노다, 정글에서 보낸 10,000일'을 상영했다.
이를 계기로 일본에서는 오노다 히로에 대한 재조명이 이루어진다.
필리핀 전투에서 살아서 돌아온 일본군들의 상당수가 반전주의자가 되었다. 섬에 고립되었던 일본군들의 경험들은 반전주의자로 변하게 했다. 보급이 끊긴 채 섬에 남겨진 일본군 병력들은 끝까지 항전하겠다고 버티고 있었고 시시각각 미군의 공습으로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그러나 일본군 지휘부는 구출작전도 없었고 보급도 없어서 섬에 버려져 죽음만을 기다리는 상황에서 전쟁에 대한 환멸이 점점 커진다.
이 사람들은 귀국 후 왕에게 충성을 다했는데 조국은 나를 배신했고 우리를 소모품으로 버렸다고 분노하면서 반전주의자가 된다. 종전 후 일본 내 양심 세력으로 활동했으며 우익세력들이 활개를 펴지 못했다.
하지만 1980년대부터 다시 일본 사회는 우경화 현상이 잠식한다.
'잡학지식' 카테고리의 다른 글
태평양전쟁 일본 잠수함 (0) | 2024.03.11 |
---|---|
필리핀 정글 속 야마시타 골드 (0) | 2024.03.11 |
전설속에 영원히 살아있는 파이터, 이소룡 (0) | 2024.03.09 |
월터 크루거와 야마시타 도모유키, 루손섬의 혈투 (0) | 2024.03.08 |
한국의 휴대전화 역사 (0) | 2024.03.07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