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전쟁 일본 잠수함
일본은 태평양전쟁 동안 40종에 달하는 잠수함을 건조한다. 그러나 일본 잠수함이 침몰시킨 미 잠수함은 고작 42척이었다. 일본 해군 연합함대(직속)와 예하 6함대에 잠수함전대가 배속되어 있다. 지휘함은 잠수모함이다. 잠수모함은 잠수대 지휘를 하고 잠수함들에 중간 급유와 보급을 담당한다.
일본은 배수량 1,000톤 이상 1등 잠수함 해대형이 있었다. 2등 500~1,000톤 잠수함 해중형이 있었다.
일본 잠수함은 적 보급함대를 공격하지 않고 적 함대 공격이 우선이었다. 잠수함을 미국 서해안으로 보내서 공격작전을 수행하자는 생각을 전쟁초반에 하게 된다. 일본의 비밀 병기 잠수함, 일본 1-400형 잠수함 센토쿠급 잠수함이다. 잠수항공모함이었다. 1942년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이 개발을 제안했고 설계를 착수한다.
1942년 6월 미드웨이 패전 직후 잠수항공모함 18척을 건조 추진한다. 항공기 3대가 탑재 가능했다. 1945년 3월 센토쿠급 잠수함 총 3척이 완성된다. 두척은 잠수항공모함이고 한 척은 원유 수송용 탱커였다.
길이는 전장 122m, 수상배수량 5,200톤으로 당시 잠수함으로서 최대 크기였다. 수상속력 18.7노트(시속 34.6km), 수중속력 6.5노트(시속 12Km)였다. 당시 가토급 잠수함 수중속력은 8노트(시속 16.6Km)였다.
100m까지 잠항이 가능했고 어뢰 20발을 탑재했다. 수상항공기 M6A1 세이란 3기를 탑재했다. 잠수함 위에 커다란 원통형 방수 격납고에 M6A1 세이란을 탑재했다. 수상항공기 M6A1 세이란은 90도 회전, 후방으로 날개가 접혔다. 60도로 가열한 엔진오일을 주입해서 항공기 사출 장치인 캐터펄트로 발진했다.
전쟁말기로 가면 세균을 주입한 폭탄을 세이란에 탑재해서 떨어뜨리려는 생각을 한다. 일본 수뇌부마저도 격렬한 반대가 있었다. 격렬한 반대 끝에 계획은 무산된다.
센토쿠급 잠수항모 울리시 기지 공습작전 예정일은 1945년 8월 17일 이었다. 이틀 전에 전쟁은 끝났다. 작전은 중지됐고 승전국인 미군에게 나포가 되어 효율성이 있는지 살펴봤지만 별로 쓸모가 없자 미군은 침몰 처리한다.
일본 잠수함의 획기적인 도약은 독일의 기술 덕분이다. 1905년 러일전쟁 이후 잠수함 도입을 추진한다. 다른 나라 잠수함을 사들여 연구 개발한다. 처음 도입한 것은 미국 홀란드 형 100톤 잠수함이었다.
영국의 비커스, 프랑스 슈나이더, 이탈리아 피아트에서 잠수함을 도입해 연구했다.
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패배한 독일의 잠수함들이 연합국의 전리품이 됐다. 영국에 나가있던 일본 무관이 중요한 정보를 듣게 된다. 독일에서 가져온 유보트 잠수함을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벨기에가 나눠 가지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일본에서 즉시 정식으로 독일 유보트 배분 요청을 한다. 독일 잠수함 7척을 배정받고 일본에서 파견한 지중해 함정에게 독일 잠수함을 인수하라고 지시한다. 1918년 12월~1919년 6월까지 6개월에 걸쳐 일본으로 배송한다. 독일 유보트를 운용해 보고 분해해서 역설계를 하면서 잠수함 기술을 많이 배우고 발전시킨다.
1919년 베르사유 조약으로 독일 잠수함 보유가 금지됐다. 수많은 독일 잠수함 회사들이 거점을 네덜란드로 옮긴다. 독일 잠수함 업체들은 네덜란드 잠수함을 개발하면서 여러 가지 설계도를 만들었는데 가장 큰 스폰서가 일본이었다. 고가에 잠수함 설계도를 구입했다. 독일 입장에서는 설계도를 팔면서 돈을 많이 벌었다. 이 자금으로 독일은 유보트 잠수함을 재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독일 잠수함 기술 획득으로 1919년부터 일본 잠수함의 국산화를 시도한다. 부족한 잠수함 개발 노하우때문에 고전하고 있었을 때 일본 굴지의 대기업 가와사키가 큰 기여를 한다.
가와사키는 1878년 조선소로 시작했다. 1896년 주식회사 전환 후 전문 경영인을 영입했는데 마츠카타 코지로였다. 마츠카타 코지로는 아버지가 마츠카타 마사요시 일본 초대 대장대신, 4대, 6대 일본총리였다.
메이지 유신 초기 공신이었다. 정부 수주물량에 의지하는 조선업 구조상 정부인사의 아들을 사장으로 앉히는 것은 이득이 계산된 것이다. 2대 사장 마츠카타 코지로는 미국 럿거스대학교와 예일대 졸업생이었다.
해군물량 확보를 위해 잠수함의 국산화 필요성을 알고 잠수함 기술 획득에 상당한 노력을 기우렸다. 1차 대전이 끝난 후 잠수함 기술을 획득하기 위해 유럽으로 장기 출장을 간다. 독일 기술 확보를 위한 교섭을 시도한다. 1차 대전 후 받은 7척 중 6척은 500~700톤 소형잠수함이어서 교섭 끝에 수상배수량 2,124톤 독일 잠수함 U-142 도면을 획득하는 데 성공한다.
1차 대전 후 일자리가 없던 독일 잠수함 기술자들 중 가장 유명한 '한스 테헬" 독일 잠수함 엔지니어에게 접근해서 일본을 위해 기술전수를 해준다면 충분한 보상을 해주겠다고 제안한다. 그래서 승전국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위장용 컨설팅 회사를 차려서 기술 고문으로 영입을 해서 잠수함 기술지도를 받는다. U-142 도면을 바탕으로 일본 최초 국산 순양잠수함 이호 제1형 잠수함을 건조한다.
독일 기술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독일 잠수함 설계도 쟁탈전에 네덜란드, 벨기에, 일본이 경쟁상대였지만 일본 측이 가장 진정성이 있었다고 한다.
마츠카타 코지로 가와사키조선소 사장은 '마츠카타 컬렉션'이라 불리는 미술품 수집이 취미였다. 에도시대에 유행한 풍속화 우키요예를 수집해서 8,000점 이상이 된다. 서양미술 작품도 사모으기 시작했다.
1921~1922년 독일 잠수함 설계도를 구하런 나선 유럽 출장길에 현재 시세로 약 3,000억원을 투자해서 마츠카타 컬렉션을 늘린다. 인상주의 화가 클로드 모네(1840~1926)의 250여 점의 <수련> 연작 중 2점을 직접 모네에게 구입했다.
우키요에는 서양 인상파 화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일본 19세기 도자기 수출이 많았는데 도자기 칸막이, 포장지로 딸려온 우키요에 만화와 책이 서양 인상파 화가들에게 영향을 준다. 인물화에도 일본풍이 유행했고 자포니즘이라고 한다.
※자포니즘은 19세기 중후반 유럽에서 유행한 일본풍의 사조
일본 도자기는 19세기 중반 런던,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인기를 끌었다.일본 메이지 유신 이후에 일찍 교역을 통해 유럽에 일본 문화가 전파되어 수용되고 있었다.
유키요에 영향으로 인상파 화가들에게 일본은 친밀했는데 마츠카타가 유럽 미술계에 '큰손'으로 작품을 많이 구입해 주니 소문이 좋게 난다. 마츠카타가 독일 잠수함 기술진의 마음을 움직인 첫 번째 방법은 교섭을 할 때 독일 잠수함은 예술작품이니 수집하고 싶다라며 먼저 마음을 움직였다.
일본이 잠수함 국산화의 난관은 소재부분이었다. 독일 기술진을 초빙으로 소재 문제를 일부 해결한다.
한스 테헬이 일본에 기술을 전수해 주고 네덜란드로 간다. <네덜란드 잠수정 설계 사무소> 기술이사로 재직하며 400장이 넘는 잠수함 설계도 개발을 지휘했다. 일본과 네덜란드에 독일 잠수함의 기술이 전해 진 것이다.
마츠카타 컬렉션을 1만 점 이상을 모았는데 가와사키 조선소가 1차 대전이 끝나자 타격을 입는다.
1차 대전 특수로 과잉생산이 되었고 1차 대전이 종결되자 전후 불황이 왔다. 1927년 쇼와 금융공황으로 파산 지경에 이른다. 하지만 일본 해군 <함정본부 임시 함선 건조부>를 설치해서 가와사키조선소에 지속적으로 함정 건조를 맡긴다.
가와사키 컬렉션은 유럽에 보관하고 있다가 런던에 보관한 회화가 추정 900여 점이 1939년 화재로 소실된다. 파리에 보관한 컬렉션 395점은 2차 대전 종전 후 프랑스 정부에서 압류했다.
일본 잠수함은 활약을 잘하지 못했다. 일본 잠수함의 숫자가 부족했다. 일본 해군 태평양전쟁 개전 당시 7개 잠수전대 총 64척이었다. 당시 태평양전선에 미 잠수함도 55척이었다.
일본은 잠수함 운용 교리가 잘못되었다. 잠수함을 함대 결전용으로 사용했다. 다른 나라에서 주목하고 있던 통상파괴전를 간과한다. 일본 잠수함대 내에서도 '교리 변경'이 논쟁거리가 된다. 적의 상선을 기습하고 교통로 끊는 데 집중해야 한다고 의견들이 계속 나왔다. 동맹국 독일의 잠수함의 활약에서도 상선 기습과 교통로 끊는데 효과적인 것을 볼 수 있었다.
1940년 쓰시마와 도쿄만에서 잠수함 훈련 특별 대연습을 진행했다. 제3잠수전대와 제5잠수전대가 훈련에 참가했는데 제3잠수전대 잠수함 9척이 적 수송선 87척 격침 가능성을 보였고 제5잠수전대 잠수함 7척은 적 수송선 46척 격침 가능성의 결과를 보인다.
하지만 해군 수뇌부 방침은 전혀 바뀌지 않는다. 나중에 1942년 6월 일본 해군은 인도양-호주 일대 통상파괴전을 시도 계획한다. 그때 과달카날 전역이 터지게 된다. 일본 잠수함은 보급 수송선으로 투입된다. 그러다 보니 일본 잠수함 전력은 소모되어 버린다.
일본은 잠수함을 함대 결전으로 사용하려 한 것이 패착이었다. 일본 잠수함 수상, 수중속도는 함정보다 느리다. 잠수함의 함대 결전은 부족한 면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해군은 오로지 결전만을 고집했다.
수송선단은 많은 수의 배가 가야 하고 집단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함정보다 훨씬 느릴 수밖에 없어 잠수함에게 표적이 된다. 하지만 일본은 잠수함으로 오로지 공격만을 외친다.
예부터 전쟁이 많았던 일본은 완벽한 중앙집권의 역사가 길지 않다. 지방 영주(다이묘)가 통치하는 일본식 봉건제가 유지되었다. 그러다 보니 끊임없이 이어진 크고 작은 전쟁을 겪었다. 일본 특유의 전쟁 방식이 도출되었다.
개전 이후 일본은 잠수함 120척을 소량다품종으로 생산한다. 로-35형(중형 740톤)과 로-100(중형 525톤)형을 각각 18척을 건조했다. 독일과 비교된다. 독일은 중형 잠수함에 집중해서 2차 대전 당시 유보트 7C형 659척을 건조한다. 미국은 가토급, 발라오급 잠수함 195척을 건조한다.
일본의 소량 다품종 잠수함 생산효율이 저하된다. 일본 잠수함 운용 교리(함대 결전)가 바뀌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 미국은 초반부터 통상파괴전에 잠수함이 나섰다. 하지만 미 잠수함들의 초라한 전과 (1941.12~1942.4월까지 미 잠수함이 일본 수송선 10만 총톤 25척을 격침)를 보고 일본은 안도하며 잠수함의 대잠 능력을 소홀히 하고 통상파괴전 교리를 간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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