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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지식

태평양전쟁 미군 가토급 잠수함, 어뢰 스캔들

by 소시민스토리 2024. 3.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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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전쟁 미군 가토급 잠수함 

미군 잠수함은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태평양후반이 되면 일본에서 동남아시아 연해에 미군 잠수함이 쫙 깔린다. 미 잠수함의 주력 임무는 일본 수송선을 격침하는 것이다. 미 잠수함대 중 활약이 두드러졌던 가토급 잠수함(Cato Class)은 수중 배수량 2,400톤이었다. 당시로서는 중형 잠수함이었다. 최대속도는 수상 20노트 (시속 38Km), 수중 9노트(시속 17Km), 어뢰 24발을 탑재했다. 

잠수함(Cato Class)은  미 해군의 숨은 일꾼이라 불리며 2차대전 주력 잠수함으로 활약한다.

 

1941~1944년 가토급 잠수함은 77척이 건조되었다.  태평양전쟁 미 잠수함의 공격은 일본 상선 1,2000요 척을 격침시켰다. 미국 잠수함의 이름은 독특했다. 

가토(Gato)는 표범 상어, SS-213 그린링은 쥐노래미, SS-214 그루퍼는 농어, SS-217은 가드피쉬, SS-218 알바코어는 다랑어과, SS-219 앰버잭은 방어, SS-224 Cod는 대구, SS-225 Cero 삼치, SS-232 Halibut 넙치,SS-230 Finback 긴수염 고래,  SS- 236 Silversides 색줄멸, SS-275 Runner 전갱이를 뜻한다. 잠수함 이름을 바다의 물고기 이름으로 지었다.

잠수함 이름은 미 해군 역사, 유산 사령부에서 위원회를 구성해서 함명 후보를 추천하면 해군장관이 결정한다. 

 

 

가토급은 77척이 건조되었고 발라오급 잠수함은 더 많이 만들어져 120척을 건조한다. 

가토급과 발라오급은 디자인, 추진력 등 동일했다. 

발라오급 잠수함의 이름은 SS-285 balao 학꽁치, 발라오급 SS-353 dugong 듀공, 발라오급 SS-315 sealion 바다사자 등으로 이름지었다.  

 

미군 잠수함들은 초반 전과가 초라했다. 결정적으로 어뢰에 문제가 있었다. 미국 잠수함의 불발률이 많았다. 1941년 12월 남방작전 필리핀 전투 당시 수송선단 80척으로 루손섬 링가옌만에 일본군 주력부대가 상륙했다. 당시 필리핀 바다에는 미 아시아함대 잠수함들이 있었고 잠수함들이 출격을 했다.

일본 수송선단을 향해 어뢰를 발사했지만 격침이 안 된다. 미 잠수함 USS사르고가 어뢰를 13발 발사했지만 한 발도 명중하지 못한다. 일본 수송선 1척만 격침시켰다. 지휘관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1941년 12월~1942년 2월 미 아시아함대 전과는 미 잠수함 4척이 손실되고 일본 수송선 12척을 격침시킨다.

 

어뢰 스캔들

어뢰 스캔들 핵심에는 마크 -14어뢰가 있다. 1931년 잠수함용 대함 어뢰로 개발되었다. 1930년대는 1차대전 때 쓰던 마크-10어뢰는 이미 구식이 되었다. 미 해군은 1차대전 참전을 앞두고 민간업체에 어뢰 생산을 위탁했다. 블리스 컴퍼니에 마크 8어뢰 6,000개를 발주한다. 1918년 7월까지 400개만 납품된다. 납품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자 미 해군은 1차 대전이 끝난 후 어뢰 생산은 국가에서 생산해야 한다고 결정한다.

미 해군 조선소 산하에 Naval Torpedo Station을 설립해서 어뢰 생산을 국영화 시켰다.

1930년대 대공황의 시대가 되면서 예산이 부족해서 신형 어뢰 연구개발 예산이 터무니 없이 적었다.

잠수함용 어뢰도 개발해야 되고 마크-13 항공어뢰, 마크-15 구축함 어뢰, 3종을 연구 개발해야 하는데 1930년 기준 연간 5만 달러가 예산으로 배정된다.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80만 달러로 약 10억원 정도로 어뢰 3종을 개발해야 됐다. 당시 어뢰 1발에 1만 달러(현재 가치 약 2억원)정도였다.

 

기술자들은 어뢰 3종을 원리,구조가 최대한 비슷하게 만들고 부품을 공용화한다. 하지만 개발한 어뢰 성능 테스트를 할 돈이 없었다. 실전 테스트 없이 생산했고 납품한다. 나중에 실전이 되어 전쟁에서 쏴보니 곳곳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미 잠수함 마크-14 어뢰는 어뢰를 쏘면 일정한 심도로 항진해야 되는데 점점 가면서 어뢰가 가라앉았다. 세팅된 깊이보다 3m 아래로 항주한다. 적함대에 어뢰를 발사하면 배 옆에 맞는게 아니라 배 밑으로 가버린다.

 

개발 당시에 문제가 있었다. 연습용 어뢰는 비싸고 다시 회수해야 하므로 폭약 대신 뮤개추, 공기 탱크를 장착한다. 어뢰가 항주하다가 공기가 차면서 부력으로 떠오를 수 있게 하여 다시 회수될 수 있게 했다. 때문에 연습용 탄두는 가볍다. 가벼운 연습용 탄두 무게에 맞춰 어뢰 심도를 세팅했다. 무거운 실탄에 당연히 가라앉게 된것이다. 실전탄으로 연습을 했었어야 되는데 예산문제로 하지 못하고 있다가 마크-14어뢰를 실전에서 800발을 쏜 뒤에야 문제를 발견했고 공론화된다. 태평양전쟁 개전 6개월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잠수함 함장들의 빗발치는 요청에도 불구하고 미군 상층부에서 본인들의 공기업이 만들었기 때문에 문제를 인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처음에는 어뢰 심도 문제를 기각한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 저기서 터졌고 심각해진다.

 

1942년 6월 마크-14어뢰 심도 테스트를 실시했다. 찰스 A. 록우드 미 남서태평양 잠수함대 사령관은 3m 깊이에 그물을 치고 실전 어뢰를 발사해본다. 어뢰가 그물밑으로 날아간다. 마크14-어뢰 결함을 확인한다.

미 해군 어뢰 기지 NTS에서도 잘못을 인정했다. 마크-14 어뢰를 응급조치로 "수심 0m 세팅 후 발사"하라고 한다. 응급조치로 버티는 사이 심도 세팅 기계장치 결함을 수정한다.

 

하지만 문제는 끝나지 않았다. 전장에서 어뢰 불발이 계속 나온다. 1943년 미 잠수함 배치가 늘면서 일본 수상함 공격 기회가 증가했다. 1943년 4월 초계 중이던 가토급 잠수함 USS 튜니는 일본의 항공모함 다이요, 추요, 초카이를 포착했다. 800m 거리에서 다이요를 조준해서 어뢰 4발을 발사한다. 잠망경으로 관찰해보니 성과가 없었다. 표적을 변경해서 항모 추요에게 어뢰 6발을 발사했다. 일본 항모 추요는 멀쩡했다.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중에 일본 해군의 D암호를 감청한 결과 미 잠수함이 어뢰를 발사했지만 일본 함대 50m 밖에서 폭발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어뢰를 발사하면 목표물을 맞추기 전 멀리서 미리 터져버렸다.

신관에 결함이 있었다. 마크-14어뢰는 당시 미국의 최첨단 신관이 장착되었다. 마크-6 복합신관으로 어뢰 하나에 충격신관과 자기 감응 신관이 둘 다 작동했다.

 

미국은 1차대전이 끝난 후 독일 기술을 가져왔다. 독일의 선두적인 기술은 자기 감응 신관이었다. 

쇠로 만든 배 주변에 자기장이 발생한다. 어뢰 타격을 극대화하려면 선체 아래 선저에서 터져 버블제트 효과로 부서트릴때 가장 효과가 좋다. 배의 뼈대인 용골에 충격을 가해 선체를 파괴하는 것이다.

독일 자기 감응 신관은 적함의 자기장에 반응해 어뢰가 폭발한다. 이를 본 미국은 1920년대 개발한 마크-6 신관에 자기 감응 기능을 탑재한다. 마크-14 어뢰에 충격신관, 자기 감응 장치를 탑재해서 2가지 모두 폭발하도록 했다. 그런데 실전에서는 미리 터져버린것이다. 당시에는 세계 누구도 몰랐던 사실을 나중에서야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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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자기장은 위도에 따라 달라진다. 자기 감응 장치 실험은 미국 근해 중위도근처에서 실험을 해서 중위도 지구 자기장에 맞게 세팅되있었다. 태평양전쟁은 적도, 남반구 포함, 드넓은 태평양 전역에서 작전을 시행하다보니 지구자기장이 달라져 자기 감응 장치가 오류가 난 것이다. 처음 실험한 미국 근해 중위도보다 태평양부근에서는 수평 지구자기장이 세기 때문에 배 주변의 지구 자기장 왜곡도 심했다. 자기 감응 장치가 세팅된 자기장 수치에 먼저 도달해서 조기 폭발했다.

 

체스터 니미츠 미 태평양함대 사령관은 마크-14 어뢰 충격신관만 쓰도록 허가한다. 1943년 6월 말부터 자기 감응 기능을 제거했다. 문제는 계속 이어진다.1943년 7월에 황당한 사고가 벌어진다.

가토급 잠수함 USS 티노사가 일본 수송선을 발견한다. 일본 특설운송선 제3토난마루를 발견하고 어뢰를 마구 쏘아댄다. 어뢰 15발을 쏘아서 12발을 맞춘다. 하지만 1발만 터졌다. 일본 제3토난마루는 경미한 손상만 입고 미 잠수함 추격을 뿌리치고 일본으로 귀항했다. 어뢰가 터지지 않고 선체에 박혀있었다. 충격신관도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충격 신관을 설계할 때 충격,자기 신호를 감지하여 격침(擊針)이 뇌관을 쳐서 기폭해야 한다. 하지만 격침무게 세팅이 잘못되어 있었다.

 

1차 대전 때 쓰던 가벼운 어뢰에 맞춰 격침이 설계가 되어있어 어뢰가 무거워지고 속도가 빨라지니까 충격이 가는 순간 충격 방향과 수직으로 놓인 격침이 휘어졌다.

급한대로 임시방편으로 조치를 취한다. 신호에 빨리 반응해서 격침이 휘어지기 전에 뇌관 타격을 위해서 일본 제로전투기 잔해에서 얻은 경량 알루미늄막대로 만들거나 용수철을 교체했다. 1943년 8월 충격신관 문제점을 수정해서 이 모든것을 반영한 새로운 신관 마크-6 모드 5를 1943년 9월에 완성하여 마크-14 어뢰에 탑재한다. 어뢰 스캔들 해결에 1년 10개월을 소비했다.

 

 

 

문제는 또 있었다. 어뢰를 발사하면 적을 향해서 날아가다가 빙 원형을 돌아서 자기 함으로 돌아와 때리는 일이 발생했다.

발라오급 USS-탱(양쥐돔)호는 태평양전쟁에서 가장 일본함을 많이 격침시킨 수훈잠수함이었다. 1944년 10월 24일~25일 대만해협에서 선전을 펼치다 어뢰를 쏘았는데 어뢰가 돌아와서 USS 탱을 침몰시킨다.

승조원 78명이 사망하고 함장 포함 9명이 생존했고 포로로 수감되었다.

 

이런 문제들이 발생하자 결함 많은 어뢰 대신 폭탄으로 명중시키려는 방법이 나온다. '물수제비 폭격'이다.

물수제비를 폭격에 이용한다. 급강하 폭격은 정밀하지만 전용 폭격기가 필요하고 많은 훈련이 필요하다.

그러나 수평폭격은 어렵지 않지만 수평폭격의 명중률은 낮다. 초저공 비행으로 최대한 적함에 가깝게 폭탄을 투하하여 선체를 타격하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 이때 우연히 물수제비 현상을 발견한다.

 

헨리 아놀드 미 육군항공대 사령관은 미 플로리다주 에글린 육군 비행장 개발팀에게 연구를 지시한다.

연구 끝에 최적의 비행고도와 속도를 찾아낸다. 약 31~76m(200~300피트 상공)에서 시속 300~400Km로 비행을 하면서 500~1000파운드(약 226~453Kg) 폭탄을 4~5초 지연신관으로 세팅해서 투하하면 통통 튕겨서 배 옆구리를 맞혀 격침을 시킨다. 

1942년 10월부터  미 육군항공대 스킵 바밍(물수제비 폭격)으로 일본 함정 공격하는데 활용된다. 

 

1943년 3월 비스마르크 해전에서 스킵 바밍 효과가 좋았다.1943년 초 뉴기니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한창이었다. 일본은 뉴기니에 세번째 병력 지원으로 제51사단 병력을 보내기로 한다. 수송선 8척과 구축함 8척의 호송 선단을 꾸려서 라바울에서 출항한다.미 육군항공대 폭격기가 출격해서 물수제비 폭격을 시행하여 대성공을 거둔다. 일본 수송선 8척은 전부 격침당했고 일본 구축함 4척이 격침당한다.

 

이후 미군은 일본 상선단 공격에 물수제비 폭격을 활용했다. 일본 수송선을 보호해줄 호위항모가 없었다. 만약 일본 수송선에 호위항모가 있었다면 물수제비 폭격은 위험하다. 저공비행을 해야 하는 미 폭격기를 상공에 떠 있는 일본 호위기에게 손쉬운 표적이 될 수 있다. 과달카날 전역 직후 남태평양 제공권은 이미 미군 수중에 있었다. 물수제비 폭격은 점점 발전했고 유럽에서는 댐 폭격에 활용되기도 했다. 영국에서는 극대화를 시키기 위해 도약폭탄으로 원통형 폭탄을 개발한다. 폭탄에 스핀을 거는 회전장치를 폭격기 내부에 설치한다.

1943년 5월에 채스티즈 작전으로 독일의 뫼네 댐, 에데르제 댐을 파괴시킨다.

 

1955년 개봉한 영화 <댐 버스터즈>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로 개발자 반스 월리스 경의 원통형 바운스 밤 개발 비화가 담겨져 있다.

랭커스터 폭격기로 이뤄진 617 비행대 승무원들의 애환 등 많은 이들의 노력으로 실현시킨 채스터즈 작전의 전모를 담고 있다.

결함이 많은 어뢰 스캔들의 문제점을 개선하여 생산량을 늘리고 과학 기술을 접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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