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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지식

전설속에 영원히 살아있는 파이터, 이소룡

by 소시민스토리 2024. 3.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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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 속에 영원히 살아있는 파이터, 이소룡

1954년 홍콩의 어느 뒷골목에서 시끄럽게 벌어진 싸움판에서 덩치가 큰 서양인과 작은 동양인이 붙었는데 묵사발이 된다. 1954년 당시 홍콩은 영국 식민지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본인보다 덩치가 훨씬 큰 아이에게 덤볐던 아이는 이소룡이었다.

깡으로만 덤비지 말고 전문적인 기술이 필요하다고 느낀다. 그래서  여기서부터 쿵후인생이 시작된다.

쿵후를 배우기 위해 스승 '엽문'을 운명적으로 만난다. 염문은 영화 <염문>의 실제 주인공이며 영춘권의 대부이자 이소룡의 무술 스승이었다.

피 터지는 연습으로 나날이 강해져 싸움의 고수가 된다. 

 

도장에서 한바탕 난리가 난다. 동료 수련생이 이소룡을 쫓아내자고 건의한다. 이소룡은 독일 혼혈이었다. 외할아버지가 독일사람이어서 이소룡은 중국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쿵후는 중국 전통무술인데 혼혈에게 가르치는 것은 안 된다는 것이었다. 혼란했던 식민지 사회에서 이곳에도 저곳에도 끼지 못하는 이소룡이었다.

게다가 정식으로 쿵후대결을 했는데 상대방 학생 부모가 이소룡을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서에 불려 온 어머니는 아들 대신 싹싹 빌게 된다. 

고민 끝에 어머니는 이소룡에게 미국 가서 공부하라고 한다. 유학을 떠나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전화 한 통화를 받는다. 홍콩의 유명한 제작사에서 이소룡을 배우로 스카우트하겠다고 제의한다.

이소룡 아버지의 직업은 희극배우였다. 아버지가 극단의 배우였기 때문에 아버지의 품에 안긴 갓난 아기로 데뷔를 했었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 아역 배우로 활동했다.

미국 유학을 고민하고 있던 이소룡에게 찾아온 엄청난 기회였다. 

 

하지만 이소룡은 삼합회의 표적이 된다. 삼합회는 홍콩에서 1950~60년대에 여러 방면에 영향을 미치면서 침투해 있었다. 많은 업종이나 일들이 폭력배와 연결되지 않으면 일을 하기 힘들 정도였으며 1980~90년대에는 영화계에도 침투해 있었다.  유명한 배우들을 납치하거나 협박하면서 자기들이 만드는 영화에 출현을 하라고 강요하기도 했다. 그래서 홍콩의 성룡, 매염방, 장국영 등의 배우가 나와서 1992년 삼합회 개입 반대 시위를 하기도 했다.  이소룡은 지기 싫어하고 고분고분하지 않고 동료배우가 피해를 입는 것도 싫어하고 자기주장이 확실하여 삼합회의 표적이 되었을 것이다. 

 

이소룡은 미국으로 건너간다. 중식당을 하는 아빠 친구의 집에서 하숙을 하면서 식당일을 도와가면서 용돈을 벌기도 한다. 시애틀의 명문, 워싱턴주립대에 입학한다. 시간만 나면 식당주차장에서 무술 수련을 한다.

실력이 대단해서 구경하는 사람들이 생기고 가르쳐달라고 하는 사람이 생기기 시작했다. 가르쳐 달라는 사람이 너무 많아 학교 근처 지하실에 도장을 차린다. 쿵후사범이 되었다.

이소룡은 대학을 중퇴한다. 쿵후실력이 대단해지자 도장은 쿵후를 배우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가 되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쿵후를 가르치고 있던 한 중국인 사범이 왜 서양인들에게 쿵후를 가르치냐며 도장을 걸고 결투를 신청했다.

 

대결을 받아들였고 사람들이 둘러싸고 구경을 했다. 이소룡은 압도적인 차이로 3분만에 상대방을 제압했다.

대결을 마친 이소룡은 깊은 좌절에 빠진다. 제압하는 데 3분이나 걸린것은 길었다는 것이다. 쿵후가 실전에서는 불필요한 동작이 많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여러 무술의 장점만을 모아서 자신만의 무술 스타일, 절권도를 만든다. 

절권도의 '절'은 멈추거나 가로챔을 뜻하며 '권'은 주먹을 '도'는 방법을 의미한다. 

발차기, 주먹은 물론 생각까지 가로채는 것이다. 이소룡은 체계에 갇히지 않고 다양한 무술의 장단점을 연구했다. 

1인치 펀치는 근거리에서 상대에게 타격한다. 준비동작은 짧지만 강력한 1인치 펀치다.

국제 무술대회에서 절권도를 소개하는 자리에서 선보인 두 손가락 팔굽혀펴기는 지금까지 레전드 영상으로 남아있다.  

 

어느 날 뜻밖의 제안을 전화로 받는다. 이소룡의 무술시범을 본 어느 미용실 원장이 단골손님에게 이소룡 이야기를 꺼냈다. 단골손님은 드라마 제작자였다. 마침 액션물을 기획하고 있었고 이소룡은 오디션을 보게 된다. 배우를 포기하고 미국에 왔는데 미국에서 배우의 길이 다시 열린 것이다.

아쉽게도 오디션까지 치르고 나서 드라마 제작이 무산된다. 몇 달 후 오디션을 보고 이소룡을 점찍어 두었던 제작자가 다시 연락을 한다. 하지만 주인공은 아니고 주인공의 운전기사 역할이어서 이소룡은 썩 내키지 않아 했다. 제작자의 다른 요구는 가면을 써달라는 것이었고 대사도 없었다. 일단 운전기사 '카토'역을 승낙한다. 

 

 

드라마는 'The Green Hornet(그린 호넷)'이었다. 출연은 했지만 촬영을 거듭할수록 화가 치밀어 올랐다.

대사가 없었다. 참다못한 이소룡은 제작자에게 편지를 보내 "카토는 그린 호넷의 파트너이지 병풍이 아니다"불만을 표시했다. 대사가 조금씩 추가된다. 드라마는 이소룡을 알리는 기회였지만 흥행은 하지 못했다.

할리우드 영화배우, 영화감독, 할리우드 유명 인사들이 무술을 배우기 위해 줄을 섰다. 하지만 헐리우드 관계자들이 아무리 무술에 관심을 가져도 들어오는 역할은 전부다 '단역'뿐이었다. 

당시 이소룡은 자필로 메모를 쓴다.

 

"나 이소룡은 미국에서 최고로 돈을 많이 받는 아시아계 슈퍼스타가 될 것이며 1970년대부터 나는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될 것이고 나는 내 뜻대로 살며 내면의 조화와 행복을 이룰 것이다"

 

이소룡의 최종목표는 세계적인 명성을 얻겠다는 것이다. 이소룡의 꿈은 스타들의 사범이 아닌 슈퍼스타 그 자체였다. 본인을 주연으로 하는 쿵후영화를 구상한다. 한 제작사 대표에게 제안을 한다. 소림사 스님이 쿵후로 무법자를 처단하는 영화였다. 제목은 '워리어'였다. 이소룡의 제안을 받아들인 제작사는 각가지 핑계를 들며 시간을 끈다. 제작사는 이소룡의 아이디어로 작품을 만들었는데 '쿵후'였다. 소림사 스님은 백인배우가 맡았고 심지어 무술을 전혀 할 줄 몰랐다. 심지어 흥행에도 성공한 작품이 된다.

 

당시 할리우드에서는 동양인 배우를 잘 쓰지 않았다. 동양인 주연은 상상하기도 힘든 시대였다. 

동양인 역할이 꼭 필요하면 그 연기도 백인 배우가 우스꽝스러운 동양인 분장을 하고 흉내를 냈다. 이런 분장을 동양인의 얼굴을 따라 한다고 해서 '옐로우 페이스'라고 한다.

같은 업계에 있는 친구들이 미국에서는 스타가 되기 어려우니 홍콩으로 돌아가라고 말을 한다.

 

이소룡은 종합격투기 리그 창립자가 된다. 용쟁호투(1973)는 UFC창립(1993)보다 약 20년 앞서 만들어진 영화이다. 용쟁호투의 첫 장면은 현대 종합격투기와 닮았다. 

이소룡은 홍콩을 떠난 지 10년 만에 다시 홍콩으로 돌아간다. 홍콩공항에 도착하자 홍콩 시민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는다. 할리우드 제작 후 3년이 지나서 홍콩에서 <그린 호넷>이 방영되었고 홍콩에서 대박이 났다.

홍콩사람들에게는 이소룡이 미국에서 성공한 자랑스러운 동포였던 것이다. 

 

이소룡은 영화사를 찾아가 주연을 하고 싶다고 말을 한다. 두 편의 영화를 계약한다. 첫 주연을 맡은 영화 촬영을 시작하지만 영화 촬영 환경은 할리우드에 비해 너무나 열악했다. 배우를 막대하고 감독은 도박에 빠져있어 촬영에는 관심이 없었다. 이 상황을 본 이소룡은 생각했다. 이 영화에서 건질 것은 액션뿐이다, 액션만이라도 제대로 보여주겠다는 것이었다. 

당시 홍콩영화에서는 날아다니고 장풍으로 싸우는 과장된 액션, 칼 몇 번 휘두르니 사람들이 날아다니고 부채에서 독침이 나오는 등 무협영화가 주를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이소룡은 달랐다. 현실에서도 통할 실전무술을 연구하고 영화에 담는다.

 

 

당산대형(1971)은 홍콩으로 돌아온 이소룡의 첫 주연작이다. 당산대형은 개봉하자마자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하며 홍콩 영화사상 최대의 흥행작이 되어 새 역사를 썼다. 

 

 

두 번째 영화는 개봉하자마자 당산대형의 기록을 깨며 흥행을 한다. 정무문(1972년)은 액션도 스트리도 좋아았다. 사부를 죽인 일본인을 처단하는 내용이었다. 반일 감정을 건드리면서 당시 영화관에서 이소룡의 대사 한마디 한마디가 나올 때마다 환호성이 터졌다. 

 

연속흥행에 자신감을 얻은 이소룡은 자신만의 액션 스타일을 정립한다.

이소룡의 액션이 너무 빨라 강렬한 노란색 추리닝을 입어서 화면에서 동작을 눈에 띄게 하려고 했다고 팬들은 추측한다. 액션에 감칠맛을 더하는 특유의 괴성은 영화 킹콩에서 힌트를 얻었다. 킹콩이 표효하는 소리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영화에는 이소룡의 철학이 들어있다. 정무문 마지막 장면에서 자신의 스승을 죽인 일본인 원수에게 피의 복수를 하고 나서 스스로 죽음을 향해 달린다. 자신이 지은 죄는 자신이 다 책임지겠다는 것이다.

 

 

홍콩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렸지만 미국에서 성공하겠다는 생각은 지울 수 없었다.

홍콩 영화 제작 환경은 너무나 열악했고 미국에 비해 감독, 각본 등 제작환경은 떨어졌다.

세 번째 영화는 직접 감독, 제작, 주연을 맡는다. 맹룡과강(1972)은 감독, 각본, 주연 모두 이소룡이 맡는 영화였다. 광활한 콜로세움에서 모습을 드러낸 서양인은 당시 세계 가라데 미들급 챔피언 '척 노리스'였다. 

미국에 있었을 때 함께 무술 연습을 하던 사이였던 척 노리스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고 영화에 등장한다. 

영화 속에서 1:1 대결을 펼치다 이소룡이 서양인을 처단한다. 동양인이 서양인을 무찌르는 장면을 영화 속에 담으면서 관객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당산대형, 정무문, 맹룡과강까지 3 연속 히트작이 되었다. 당시 이소룡의 인기는 대단했다. 길거리를 지나가는 이소룡을 본 영화 제작자들이 이소룡 손에 백지 수표를 줄 정도였다. 하지만 이소룡은 거부했다.

돈에 현혹되는 순간 그들이 원하는 작품만 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거부했던 것이다.

이소룡은 좋아하는 영화와 무술을 하다 보면 부수적으로 돈을 따라온다고 생각했다.

 

 

맹룡과강 성공으로 세계가 주목한 배우가 된 이소룡은 할리우드에서 연락이 온다. 할리우드 첫 주연작, '용쟁호투'에 이소룡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희대의 역작을 만든다.

용쟁호투(1973)는 소림사 출신의 마약상 '한'을 체포하기 위해 이소룡이 무술 토너먼트에 참가하는 스토리다. 

용쟁호투 속 일명 '거울방'에서의 액션 장면은 명장면으로 이소룡의 스텝은 권투스텝을 활용한 것이다. 권투 스텝은 무하마드 알리의 권투 스텝을 보고 배운 것이다. 

그토록 꿈꾸웠던 할리우드 주연작이 개봉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소룡은 용쟁호투 개봉일 6일 전에 사망한 채 발견된다. 갑작스러운 이소룡의 죽음이었다. 사인은 약물 부작용으로 인한 뇌부종이었다. 

이소룡의 나이는 32살이었다. 

 

"무형이 돼라,

형태를 잃어라, 물처럼

물을 컵에 넣으면 물은 컵이 되고 물을 주전자에 넣으면 물은 주전자의 모습을 한다,

물은 흐를 수도, 부서질 수도 있다, 물이 되어라 친구여"

-이소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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