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반격 준비, 절대 국방권과 Z작전
1943년 4월 18일 이호작전 종료 3일 후 과달카날 쿠쿰 비행장에서 미 항공기들이 날아오른다.
여기서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운이 다했다. 현장시찰을 나갔다가 미 항공기에 격침당해 사망한다.
지상전 첫 패배 과달카날에서 참패를 당한 일본 육군은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해야겠다고 판단한다.
일본 해군의 팽창을 쫓아가면서 뒷바라지를 지금까지 해왔는데 이제는 일본 육군은 방향 전환을 해야 한다는 의견들이 쏟아진다.
작전통 '핫도리 다쿠시로'일본 참모본부 작전과장이 등장한다. 미국과 정면승부는 무리이며 잠자던 거인이 깨어나서 본격적으로 반격하고 있어 준비가 덜 된 상태에서 맞붙다가는 패배할 것이기 때문에 태평양전역에서는 수세로 돌아서서 웅크린 고슴도치처럼 최대한 방어태세를 구축한 사이에 약한 적, 중국(중국본토)과 영국(버마전선)을 공격하여 전열에서 이탈시키고 그 사이에 시간을 벌어서 1945~1946년쯤 미국에 대한 반격의 공세를 시작해야 한다는 계획을 세운다.
이런 개념으로 방어선, 절대국방권을 새로 만든다. 일본은 내 편을 만드는 정치적 포섭을 만들어간다.
절대국방권으로 염두에 둔 지역은 너무나 광범위했고 버마 전선은 미국이 지속적으로 '장제스 지원 루트'로 보급하고 있었다. 버마 전선에서 태평양 전역까지 지키겠다는 절대국방권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1943년 11월 대동아회의가 개최된다. 동남아시아를 지켜야 된다는 것이다. 애초에 전쟁의 목적이었던 동남아시아의 원자재 공급을 전쟁을 하기 위해서는 지켜야 되는데 그것을 위해서는 대동아공영권을 강화해야 된다는 것이다.
1943년 11월 5~6일 도쿄에서 대동아회의가 개최된다. 일본이 점령한 지역, 동맹국 지도자를 초청한다.
대부분 괴뢰정권이었다. 일본이 세운 괴뢰정권 필리핀 제3공화국, 중국 난징을 중심으로 한 괴뢰정부 왕징웨이 정권, 인도에 있던 망명 정권 괴뢰정부 자유 인도 임시정부 지도자 '찬드라 보스'가 '옵서버'로 참관한다.
모여서 대동아 공영권을 강화해야 된다고 선언한다. 조선에서도 부일협력자로 유명한 춘원 이광수, 육당 최남선이 조선 대표로 참여한다.
일본의 대동아공영권의 허상이 드러나기 시작한다.유럽제국주의 국가들로부터 아시아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초기에는 환영받았다. 강압적 지배에 시달린 인도네시아, 베트남 독립운동 세력은 지지했다. 하지만 일본군 점령 후 2~3년이 지난 후 조금씩 반발이 싹트기 시작한다. 일본인들 내에 특유의 인종주의가 나타난다. 일본인은 문명인이고 일본 외 아시아는 야만적, 미개한 인종이라 동남아인들을 개화시켜야 된다고 하는 속내를 드러낸다. 유럽 제국주의자들과 같은 사고방식을 가진 일본인에게 반감을 가지게 된다.
도조히데키가 주관한 대동아회의는 아시아에서 아시아 리더들만 모인 첫 회의이다. 하지만 괴뢰정부 수장들을 데려다가 정치적 쇼를 한 것이다.
일본 해군은 일본 육군과 생각이 달랐다. 1단 작전 진주만 공습. 2단 작전 미드웨이 공격에 이어서 이제는 3단 작전을 이행하기로 결의한다. 하와이, 미드웨이로 쳐들어가 함대 결전을 했다면 이제는 전쟁 전부터 구상했던 점감요격작전으로 회귀한다. 3단 작전의 거점은 트루크 환초였다. 여기를 중심으로 해서 남태평양 섬 9개에 9개 요격대를 설정한다. 요격대 안으로 미군 함대가 들어오면 투르크 환초의 연합함대와 섬에 배치되어 있는 수많은 기지 항공대가 합세하여 미 함대를 공격하여 미군 전력을 끊겠다고 구상한다.
※환초는 큰 원을 이룬 산호초이다.
항모 기동부내는 바닥났고 기지 항공대가 중요해진다. 일본 해군 입장에서는 섬들을 포기할 수 없었던 이유는 불침항모 섬에 배치된 기지 항공대가 합세하지 않으면 미 함대를 상대할 수 없었다.
기지 항공대 배치한 섬을 포기하라는 육군의 방침은 청천벽력 같은 것이다. 3단 작전에 그들이 가장 아끼는 작전명 'Z 작전'을 붙인다.
※쓰시마 해전에서 Z깃발을 내걸고 '도고 헤이하치로'사령관이 승리한 이후로 '비장한 결의'를 뜻하며 승리의 상징이 된 깃발이다.
육군 절대 국방권과 해군 Z작전은 충돌한다. 육군 절대국방권에 의하면 길버트 제도, 마셜제도는 제외되며 일본 해군기지 항공대도 철수해야 한다. 기지 항공대 없이 어떻게 미 함대를 상대할 것이며 또한 트루크 환초가 절대국방권에 따라 최전선이 된다. 그러다 보니 일본 해군은 지켜낼 해역의 여지가 좁아진다.
일본 해군은 육군의 절대 국방권에 결사 반대한다. 해군 입장은 "어쩔수 없이 어전회의에서 절대 국방권을 인정을 하겠지만 실제 작전 기존 Z작전에 입각해서 하겠다"라고 한다. 일본 해군은 군사적 딜레마에 빠진다. 항공모함이 격침되었고 기지 항공대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 항공기지까지 포기해야 한다면 전쟁을 불가능했다.
일본 해군 병력 충원
남아 있던 항모기동부대와 기지 항공대 합체해서 1943년 7월 새로운 제1항공함대를 편성한다. 가급적 결전을 기다리며 끝까지 아낀다. 새로운 기대주 항공기 세대교체가 이루어졌다. 독일의 기술을 받아서 새로운 전투기를 만들어 낸다. 엔진을 업그레이드하기 위해 직분사 액냉식 고출력 독일 엔진 기술을 도입한다.
DB601 엔진을 라이선스 생산해 스이세이 함상 폭격기에 탑재한다. 하지만 DB601은 수랭식 엔진이어서 냉각수가 공랭식보다 구조가 복잡했다. 경험이 부족한 일본은 만들다가 부품의 가공 수준이 떨어지고 품질 관리가 안 되고 고급연료가 필요한데 저옥탄가 가솔린에 알코올까지 섞어서 쓰는 일본의 질 낮은 원료로 생산품질이 저하된다. 가동 시간보다 고치는 시간이 더 많았다.
독일 엔진을 라이선스 생산한 일본이지만 정밀가공 능력 부족과 특수합금 소재 부족 등으로 불량이 속출했다.
1943년 8월 캐나다 퀘백에서 루스벨트와 처칠이 만난다. 전쟁 중에 모인 연합국 지도자들이 모여서 2차 대전을 어떻게 끝낼 것인가 고민을 해보자 하여 모였다. 하지만 스탈린은 불참한다. 루스벨트와 힘겨루기를 한 것이다. 스탈린이 가장 선호하는 지역은 얄타, 테헤란 같은 러시아에서 금방 갈 수 있는 곳을 선호했다. 스탈린에게는 캐나다는 멀어서 가기 싫은 곳이었다. 또한 공산주의 지도자들은 비행기 사고를 두려워해서 비행기 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퀘벡회담에서 이탈리아의 무조건 항복을 받는 것과 독일의 비무장화를 결정한다. 이 회담은 2차 대전 이후 세계를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라는 기본적인 원칙에 일단 합의한다. 일본과 독일을 무조건 항복을 받아서 더 이상 군국주의나 파시즘이 더 이상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게 하겠다는 원칙이 확인된다.
처칠 입장에서는 유럽이 급하지만 미국은 태평양전쟁을 빨리 끝내야 한다.
태평양전쟁을 빨리 끝내기 위한 2가지 방안을 만든다. 첫번째는 바이 패스(By-Pass) 전술을 생각한다. 주변을 점령해서 중요 거점을 고립시켜 거점 기능을 상실하게 만드는 것이다. 두 번째는 핵을 사용하는 것이다.
핵무기 개발과 제안은 영국이 먼저였다. 1930년대 독일이 핵분열의 원리를 연구하고 있었는데 핵분열 연구를 하던 독일 과학자 대다수가 유대인이었고 나치의 박해를 피해서 영국으로 망명한다. 연구를 계속하기 위해 핵분열 발견을 영국 정부에 알리게 된다. 영국은 1940년 원자탄 개발 연구를 가동한다. 문제는 돈이 어마어마하게 드는 것이었다. 우라늄 채굴, 가공, 원자탄 제조, 실험하는 것이 당시 독일 유보트 공격에 물자수송이 막힌 영국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었다.
미국에 같이 하자고 제안을 하게 된다. 캐나다에서 회담을 한 이유는 캐나다에 핵무기 연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핵무기 개발 필수 연료 우라늄, 중수가 있었다. 회담에서 핵무기를 개발하면 일본에게 사용한다는 것을 논의한다. 미국은 영국에게서 핵기술을 받았고 약속대로 전쟁이 끝난 후 영국에서 기술을 주지 않는다.
영국과의 약속을 무시한다. 영국은 유럽전선의 급박함에 미국에게 기술을 다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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