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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지식

미국의 승리, 과달카날 전투

by 소시민스토리 2024. 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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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승리, 과달카날 전투

1942년 8월 10일 일본 대본영의 명령 과달카날을 탈환하기 위해 공격부대 '이치키 지대 2,300명을 파견한다.

 

태평양 전쟁, 과달카날 전투

 

태평양 전쟁, 과달카날 전투

태평양 전쟁, 과달카날 전투 1866년 현대식 어뢰 '화이트헤드 어뢰'가 등장한다. 어뢰는 크기가 커 폭탄을 많이 실을 수 있다. 항공기에서 투하하는 폭탄은 약 250~500Kg이지만 어뢰는 탄두 폭탄량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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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은 총공세를 준비한다.  자칭' 작전의 신'이라 불리는 '츠지 마사노부'가 등장한다. 남방작전을 연구하고 구상에 참여했던 인물이다. 하지만 할힌골(노몬한) 전투에서 소련과의 소규모 분쟁을 4개월간의 전투로 독단과 월권으로 불씨를 키운 인물이기도 하다.

※할힌골(노몬한) 전투는 1939년 만주와 몽골의 국경지대인 할힌골에서 일어난 일본군과 몽골, 소련군 간의 전투이다.

말라야 전역에서 승리하면서 육군참모본부 작전반장으로 진급한다. 츠지 마사노부의 특징은 작전이 실패하면 남 탓을 한다. 본인의 작전을 완벽했지만 작전을 수행하는 부하들이 너무나 무능했다는 것이다.

과달카날에서 미군에게 계속해서 밀리고 있자 츠지 마사노부가 과달카날 전역에 투입되었다.

 

츠지 마사노부는 일본 육군의 전형적인 엘리트 출신이다.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수석 졸업했고 육군대학교를 3등으로 졸업했다. 중좌(중령)인데 장군을 해임시킬 수 있는 힘을 가졌던 엘리트 코스를 밟는다.

싱가포르전투에서 일본 육군 제25군 사령관이었던  야마시타 도모유키는 츠지 마사노부를 믿으면 안 되고 교활하기 그지없으니 요직에 기용하면 안 된다고 평가했지만 무시당한다.

필리핀 침공 당시 자행된 바탄 죽음의 행진의 배후"포로를 엄중히 관리하라'는 대본영의 지시를 "포로를 처형하라"고 왜곡 전달한 장본인 역시 츠지 마사노부였다.

츠지 마사노부는 작전에 실패하면 일선 지휘관에게 책임을 전가하면서 할복을 강요했다.

 

츠지 마사노부 작전 

1942년 10월 14~15일 대형 고속화물선 6척을 이용해서 일본 육군 제2사단은 타사파롱가에 상륙한다.

1942년 10월 15일 미군 공습으로 화물선 3척 격침당하고 대량의 물자가 유실된다.

1942년 10월 17일 미군, 해안에 쌓여있던 일본군 보급품을 공습한다. 

새롭게 투입된 마루야마 중장의 2사단에게 위기가 닥친다. 상륙과정에서 식량절반, 탄약 80%를 상실당한다.

탄약 부족으로 작전을 변경해서 정면 공격 대신 남쪽으로 멀리 우회하는 마루야마 루트를 개척하기 시작한다.

'정글을 뚫고 미군의 남쪽 방어선을 공격한다'는 계획을 세운다.

 

 

2가지 공격 루트를 짠다. 조공부대는 미군의 해안 방어선을 공격하고 주공부대는 정글을 돌파해서 마루야마 루트를 따라서 미 해병대 남쪽을 공격한다는 작전을 세운다. 하지만 주공부대에 문제가 발생한다.

덥고 습한 기후에 고된 행군을 하면서 배고픔에 시달리고 가다가 중화기, 화포를 버려 화력이 약해졌다.

동시 협공으로 혼란을 주려 했지만 본대의 정글 기동이 늦어지면서 조공부대, 주공부대가 따로따로 공격하는 결과가 빚어진다. 1942년 10월 20일 조력부대의 공격이 시작됐고 1942년 10월 25일 새벽 주력 공격이 시작된다. 

이때 츠지 마사노부가 등장한다. 정글로 우회한 '마루야마 2사단'에 오른쪽 날개를 맡은 지휘관은 '가와구치 기요다케'였다. 가와구치는 미 해병대의 방어선이 너무나 막강하다 이대로 공격하면 에드슨 능선처럼 똑같이 당한다고 판단해 우회 공격 안을 건의한다. 옆에 있던 츠지 마사노부는 본인이 건의해 보겠다고 가서 가와구치는 근성이 없다며 당장 해임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총공격 전날 가와구치는 해임된다. 

 

가와구치 지휘관 교체 혼란 속에 공격이 개시된다. 미 해병대 남쪽 방어선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악전고투를 거듭하면서 혈전이 벌어진다. 미 해병대는 압도적인 화력으로 방어를 했지만 피해는 속출했다.

이때 미 육군이 추가 투입되어 육군 제164보병 연대와 예비대가 증원되어 미군 핸더슨 비행장 전투를 승리로 이끈다.

 

 

육군의 공격을 지원하면서 동시에 접근하는 미 함대를 격멸하려고 했던 일본 해군, 1942년 10월 26일 산타크루즈 해전에서 항모 기동부대가 재격돌한다. 미군 호넷이 격침당하고 엔터프라이즈가 피해를 입었고 항공기 81대를 상실한다. 일본군은 쇼카쿠, 즈이호가 피해를 입었고 항공기 99대가 상실된다.

1942년 11월 12~15일 2차례 야간 전투가 벌어진 과달카날 해전에서 일본 해군이 대패하게 되면서 미 해군은 완벽하게 이 일대의 제해군을 장악한다. 이후 일본군의 제해권 뺏기 시도는 계속해서 시도됐지만 과달카날에 병력 증원, 추가 보급이 좌절되면서 일본군은 완전히 고립된다.

 

일본의 제로전투기가 과달카날에서 힘을 못 쓴 이유

가장 가까운 비행장은 라바울 항공기지였다. 라바울에서 과달카날까지 1,000Km 거리이므로 왔다 갔다 왕복 2,000Km거리를 가야 한다. 당시 제로전투기 항속거리는 약 2,300Km 정도여서 체공 전투 시간은 고작 몇 분 되지 않았다. 때문에 핸더슨 비행장에서 계속 출격하는 미 항공대를 상대할 수 없었다. 

 

 

1942년 8월 미국-뉴질랜드 연합부대 '캑더스 항공대' 창설하고 항공대 기지는 핸더슨 비행장이었다. 미 해군, 뉴질랜드 공군 포함 주력은 미 육군과 해병대 항공대였다. 캑터스 항공대 최대 격전 기간 한 달 동안 일본군 항공기 131대를 격추한다. 그렇게 제로전투기의 몰락이 시작되었다. 일본 제로전투기 조종사의 체력 소모가 엄청났고 멍한 상태에서 전투를 치르다가 귀환하면서 불시착을 많이 한다. 일본군 조종사들의 희생이 컸다. 

희생된 조종사들이 대부분 최정예 조종사였다. 태평양전쟁 동안 일본 해군은 항공기 총 27,200대를 손실하고 

그중에서 약 7,500대가 라바울 항공대 손실이다. 

1942~1943년 태평양전쟁의 분수령 동안 항공기 약 5,300대와 약 3,000명의 정예 조종사가 과달카날 전장에서 사라져 버린다. 일본은 더이상 질적으로 조종사 수준마저 미국에 역전당하기 시작한다.

 

과달카날에 고립된 일본 육군 상황

일본 육군 2사단 총공격이 무참히 실패하자 일본 육군 제38사단을 투입하지만 홀시 제독이 버티는 바다를 못 건너고 바다에서 다수가 수장되는 참사가 벌어진다. 겨우 상륙한 제38사단의 병력은 2,000명이었고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해 아사로 굶어 죽을 지경에 이른다. 수많은 일본군 병사들은 자살한다.

대본영 1943년 2월에 병력 철수 작전 계획을 비밀리에 세운다. 과달카날을 포기한다. 그나마 일본은 철수시키는데 성공한다.

 

1943년 1월 29~30일 퇴각로를 뚫기 위한 렌넬 섬 해전을 치르며 미 중순양함 1척 침몰, 구축함 1척을 대파한다. 이 지역을 방어하고 있던 미 항모부대가 빠지자 그 사이를 이용해서 일본은 구축함 총동원해서 3차에 걸쳐 과달카날 고립 병력을 철수시킨다.(케호작전) 철수병력은 10,600여 명이었다. 

일본 수송선단의 소수의 축차투입은 일본 수송능력의 한계였다. '수송'이라는 숙제를 풀지 못한채  패배를 맞이했다. 과달카날 전투에서 일본 육군 전사자는 총 21,000여 명이고 15,000명이 굶어서 죽는다.

 

1942년 11월 일본해군은 대본영에 과달카날 포기를 주장한다. 1942년 11월 15일 새벽 과달카날 해전이 끝나갈 무렵 퇴각이 급박한 가운데 야마모토 사령관이 내린 결단은 고립된 병사들이 보급물자를 가져갈 수 있도록 해안에 4척의 수송선을 좌초시켜라였다. 수송선 4척에 실린 무기와 장비, 식량은 약 10,000톤이었다.

그러나 날이 밝자마자 쏟아진 미군의 집중포화에 수송선은 모두 파괴되어 수장되고 불타버린다. 모든 보급물자는 상실된다. 고립된 병사들에게는 단 4일 치 식량밖에 남지 않았지만 대본영의 철수 명령은 약 70일 후에 떨어진다. 

 

일본 육군의 자존심 과달카날에서 비행장을 만든것은 육군이다. 적에게 넘긴다는 것은 수용불가이며 자존심이 걸린 싸움이 되어버렸다. 대본영의 발표는 "과달카날의 일본군은 우세한 적군을 맞아 격전을 벌인 끝에 적에게 큰 타격을 주고 작전 목표를 달성했습니다 이에 2월 초에 섬을 떠나 새로운 곳으로 전진하게 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일본인들은 과달카날 전투에서 일본이 승리한 줄 알게 된다.

 

과달카날 전투 결과

연합군 7,100여 명 사망, 함선 29척, 항공기 615대 손실

일본군 31,000여 명 사망, 함선 38척, 항공기 683대 손실

반면 미 연합군의 희생도 컸지만 불침함모 '섬'의 유리함을 체감한 미국은 해상전, 공중전, 지상전이 맞물린 입체적인 공세 전략을 터득한다.

 

미국의 영웅 

 

일본의 총공세에 맞선 미 해병대 1사단은 핸더슨 비행장 전투에서 일본군을 격퇴한다. 바로 그때 활약을 한 미 해병  중사가 '존 바실론'이다.  일본 육군 2사단 약 3,000명의 반자이 돌격으로 쳐들어오자 당시 기관총분대 하사였던 바실론은 미 해병대가 사용한 M1917수랭식 기관총은 냉각수, 탄약, 삼각대 포함 약 47Kg을 메고 맹활약을 펼쳤다. 기관총이 뜨거워 손이 데는 것도 개의치 않고 발사하며 혁혁한 공을 세운다. 해병대 최초 명예훈장을 수훈한다. 명예훈장 수훈 이후 후방으로 전출된다. 미 해병대 캠프 펜들턴 신병훈련소에 배치되어 기관총 사수 교육을 담당하는 훈련교관으로 일한다. 위급상황에서는 수랭식 "기관총 들고 쏴"를 가르친다. 1945년 이오지마 전투에서 전사 후 해군 십자훈장에 추서 된다. 영화 '람보'의 모티브가 된 인물이다.

 

미 해병대는 이전까지 존재감이 육군이나 해군에 비해서 알려지지 않은 상황이었다. 상징적인 해병대의 영웅 배출이 절실했다. 마침 바실론 중사가 롤모델로 등장했고 미 국민들 사이에서 해병대 인지도가 올라가게 된다. 바실론 중사는 드라마 '퍼시픽'에서 '영웅'으로 그려진다.

 

 

과달카날 전투로 존재감을 얻은 미 해병대

1775년 11월 10일 <대륙 해병대>가 창설된다. 미 해병대는 해안경비대, 해군기지 방어 부대로 출발했다. 해군 입장에서는 부수적인 부대였고 육군입장에서도 존재감을 느끼지 못하는 부대였다. 태평양전쟁 직전 미 해병대 병력은 약 5만 명이었다. 미군 병력의 3% 정도였다.

태평양전쟁을 겪으면서 해병대의 능력을 증명한다. 태평양전쟁의 승리를 위한 섬 장악을 하기위해서는 엄청난 피해를 감수해야 하는데 그 주역이 바로 해병대였다. 해병대가 정말 필요하다는 것을 몸소 증명해 보인다.

바로 과달카날전투가 대표적이다. 당시 미국 신문 보도를 보면 미 육군과 해군은 미디어 라인이 탄탄해서 연일 언론 플레이어를 하고 있었다. 거기에서 빠진 신문사를 파고들어 홍보를 했고 정치인들에게도 활약상을 어필하는 등 해병대를 국민에게 알리는 홍보 활동을 열심히 한다. '언더독' 해병대의 약진을 알린 결과 '해병대는 예외적이고 특별하다'는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 미 국민들 사이에서 해병대의 위상이 높아진다.

 

태평양전쟁을 통해서 미 해병대 항공전력까지 확대되어 독자적 작전수행을 위해 해병항공까지 확충된다.

완공직후 핸더슨 비행장을 지켜낸 주력이 바로 미 해병대 항공대이다.

6.25전쟁에서 미 해병대 이미지가 재생산됐고 1960년대 미 해병대가 재탄생을 하게 된다. 해병대는 '신속즉응군'으로 다시 태어난다. 해외에 가장 먼저 파견되고 전략적 부대이며 전쟁이 나면 가장 먼저 가는 부대가 된다.

1970년대 미 육군 개혁을 단행한다. 육군의 인기가 떨어지자 1973년 모병제로 전환하면서 워라밸이 있는 육군이라는 전략으로 홍보를 한다. 반면 해병대는 힘들고 어렵게 싸우는 부대라고 강조하며 오히려 더 강하게 밀어 붙이는 전략으로 홍보한다. 미국인이 좋아하는 이미지 영웅, 마초, 어벤저스를 계속 만들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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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달카날에서 승전보를 올린 미군은 과달카날에 비행장을 짓는다.  일본군 핵심 거점 라바울을 공략하기 위해서 최대한 많은 비행기를 배치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과달카날을 거점 삼은 미군의 항공 압박전략은 일본군을 더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야마모토 이소로쿠 일본 연합함대 사령관은 남은 전력을 모아 1943년 4월 7일 라바울을 거점으로 이호작전을 개시한다. 남은 항공전력을 총 투입, 약 400기 동원해서 뉴기니, 솔로몬제도 항공기지를 집중 공습한다. 4월 7일~15일 여러 차례에 걸친 항공 기습을 강행한다.

하지만 성과는 미비했고 빈약한 성적표로 이호작전은 마무리된다.

 

1943년 4월 18일 이호작전 종료 3일 후에 과달카날 쿠쿰 비행장에서 미 항공기들이 날아오른다.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운이 다했다. 일본군 지휘관으로는 이례적으로 이호작전 성과를 확인하고 솔로몬 제도 해군 항공대를 격려하기 위해 전선시찰을 나간다. 

일본군 지휘관들은 현장 시찰을 경시하며 사령부에만 앉아있으려 하는 경향이 있었다. 

야마모토는 라바울에서 부겐빌로 최전선 시찰을 결정하고 전방으로 나간다고 무전을 친다. 하지만 미군이 통신감청을 하고 있었을 줄은 몰랐다. 1943년 4월 18일 오전 8시 시찰단이 라바울에서 호위 전투기 6대를 대동하고 출발한다. 폭격기 2대에 나눠 타고 부겐빌 섬으로 향한다. 암호해독을 한 미군은 과달카날의 미 육군항공대에게 요격 임무를 명령한다. 보조 연료 탱크 장착한 P-38 전투기 18기가 준비된다. 

 

 P-38 전투기는 당시 가장 긴 항속거리를 보유하고 있었고 12.7mm 중기관총 4문, 20mm 기관포 1문을 장착하고 있었다. 미군은 수적인 우세, 우세한 제공시간, 저속선회능력 외에 최고속도, 상승력 등이 골고루 우세했다.

일본 제로전투기 조종사 입장에서도 쌍발엔진을 탑재한 P-38은 부담스러운 존재여서 '악마의 쌍발', '쌍둥이 악마'라고 불렀다.

P-38 전투기 16기가 일본 시찰단 폭격기를 기습한다. 추격전 끝에 격추시킨다. 루스벨트 대통령의 허가까지 받은 비밀작전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둘리틀 공습 1주년을 맞이한 1943년 4월 18일 아침 작전명 '복수(Operation Vengeance)'를 개시한다. 일본의 감시를 피해 우회한 뒤 예상경로로 진입한 P-38은 오전 9시 34분 야마모토 시찰단을 발견하고 P-38 공격조 4기가 집중 사격한다. 야마모토 사령관이 탄 폭격기 1대는 결국 밀림으로 추락한다. 이른바 갑(甲) 사건이다. 탑승자 전원이 사망하고 만다. 

 

미국은 이 작전을 벌이기 전에 사건의 파장을 걱정하고 있었다. 일본측에 정보가 새고 있다는 것을 간파하지 못하게 해야 했다. 일본이 암호 해독 낌새를 챌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 따라서 미국은 기만 술책을 쓴다.

원래부터 P-38 초계 비행했었다, 일상적인 초계를 하다가 발견한 것처럼 노력했다. 격추후에도 거짓정보를 내보낸다. 일상 작전 중 신원미상의 적기를 떨어뜨렸다고 역정보를 흘린다. 

 

일본 측에서는 일본 육군이 일본 해군의 암호 유출을 의심했다. 하지만 일본 해군은 암호 해독을 부정한다.이 사건은 사건 은폐를 위해 '갑'사건이라 명칭을 붙인다. 야마모토 탑승기는 전원사망했고 우가키 참모장 탑승기는 불시착했다. 우가키 마토메 참모장은 살아서 암호가 해독되었나를 의심한다. 대대적인 조사에 나선 일본 해군은 암호 해독가능성을 철저하게 조사하지만 암호 해독은 없었을 것이라고 결론 내린다. 인정을 하면 이전의 모든 것들을 책임을 져야 한다. 암호해독 불가능이라는 결론은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일본 연합함대의 핵심 참모들이 탄 폭격기 추락 후 호위전투기 6대는 무사히 돌아와 파일럿 6명 모두 생존한다.  에이스로 호위 임무를 맡았던 이들의 나이는 고작 18세에서 24세였다. 야마모토 사령관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자책으로 이후 전투에서 6명 중 5명이 격추 전사된다. 나머지 1명 '야나기야 켄지'는 1943년 6월 7일 과달카날 인근에서 교전 중 오른손을 잃는 중상을 입고 일본으로 송환된다. 

전쟁 끝까지 살아남은 최후의 1인이 된다. 훗날 그이 증언으로 야마모토 사건을 재구성한다.

 

1970년에 이르러서야 오랜 침묵을 깬 야나기야 켄지는 그의 증언에 따르면 야마모토 사령관의 탑승기가 추락하자마자 든 생각은 더 이상 살아 돌아갈 수 없다였다고 한다. 에이스로서 호위 임무에 실패한 것을 수치로 여기며 적의 더 많은 비행기를 격추하겠다고 최대 격전지로 자원했다고 한다. 그들의 선택은 자원이었을까, 암묵적 처벌이었을까 논란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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