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 전쟁, 과달카날 전투
1866년 현대식 어뢰 '화이트헤드 어뢰'가 등장한다. 어뢰는 크기가 커 폭탄을 많이 실을 수 있다. 항공기에서 투하하는 폭탄은 약 250~500Kg이지만 어뢰는 탄두 폭탄량이 300~500Kg로 명중하면 적을 끝장낼 수 있었다. 장갑이 취약한 배 아랫부분 '선저'를 뚫을 수 있어 치명적이다. 일본은 점감요격작전 핵심 무기로 어뢰 필요성을 깨닫고 발전을 시킨다.
일본이 어뢰 개발에 매달린 또 다른 이유는 군축회담을 통해서 함정의 수가 적기 때문에 대신 위력적인 어뢰는 소형 구축함에서도 가능해서 최대한 강력한 어뢰를 많이 배치한다.
1920년대 어뢰를 개발하던 일본은 딜레마에 빠진다. 어뢰의 한계는 사정거리가 짧았다. 그 당시 기술로서 사정거리 약 20km이다. 사정거리가 긴 거대 함포 기술이 발전하면서 함포 사정거리가 20Km를 훨씬 넘어섰다.
그 당시 미국 해군은 함포 사격의 자신감이 생기자 어뢰는 한물간 무기라고 판단하여 순양함 어뢰 발사관을 철거한다. 대신에 당시 개발된 55구경장 8인치 함포를 중순양함 공격력 강화를 위해 장착한다.
일본은 어뢰 사정거리를 늘이는 해법으로 산소어뢰가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기존 어뢰 추진방식은 공기를 산화제로 연료로 연소하여 가스 발생하면 가스 압력으로 스크루 프로펠러가 가동하여 앞으로 나가는 방식이다. 어뢰 공기탱크에 공기 대신 고압산소를 넣는다면 획기적으로 사정거리를 늘릴 수 있겠다는 생각을 많은 열강 해군들이 이전부터 하고 있었다. 하지만 기술적으로 어렵고 성공을 장담할 수 없어서 쉽사리 추진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영국에 간 일본 기술진의 첩보에 의하면 영국은 산소 어뢰를 개발해서 배치한다는 소식이 들린다. 이 첩보는 잘못된 첩보였다. 1925년 산소 57% 고농축 산소 어뢰를 배치한 것이다. 이것을 일본은 100% 순수 산소로 착각한다. 일본은 서둘러서 산소 어뢰를 개발하여 성공시킨다. 1939년 '산소 어뢰' 93식 어뢰를 개발하는 데 성공한다. 산소 어뢰는 핵기적으로 사정거리가 늘어났다. 기존의 어뢰의 사정거리는 20Km가 한계였지만 빠른 속도로 50Km 나갈 수 있어 함포 사정거리와 맞먹는다.
'결정 병기' 산소 어뢰의 가공할 위력으로 최후의 함대 결전에서는 어뢰를 한꺼번에 250발 이상 발사할 계획을 했다. 이런 산소어뢰를 장착한 순양함들을 사보섬 해전에 투입한다.
1942년 8월 8일밤 11시 45분 무렵 사보섬으로 향한다. 미군입장에서는 밤 중에 일본이 공격할 것이라 예상치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은 이미 야간전투 전술을 개발해 두었다. 일본의 야간전투 매뉴얼에는 비행정으로 정찰하여 적함을 발견하면 예광탄 사격으로 신호하고 적함에 순양함이 접근하여 서치라이트를 비춰서 사격관제 지점을 향해서 함포와 어뢰를 발사한다는 훈련을 엄청나게 해 왔다. 사보섬에서 성과를 거둔다.
사보섬 해전 시간은 약 40분 정도 걸렸다. 어뢰 첫 발사 3발을 명중시키고 연합군 함대 차례차례 공격 후 새벽 2시 20분 철수한다. 미,호주 연합군 중순양함 4척이 격침되고 참패한다.
승리를 한 '미카와 군이치' 일본 해군 제8함대 사령관은 미 항공모함이 와서 함재기로 공격할까봐 불안해하며 돌아가려고 한다. 사보섬을 돌아서 라바울로 원위치한다. 일본군 입장에서 미드웨이 치욕을 씻었다고 생각한다.
미군 순양함이 부서져서 과달카날에 상륙한 미 해병대를 지킬 함대가 사라졌다. 8월 7일 무혈입성한 미 해병대 1사단은 사보섬 해전을 보고 있었다. 물자를 전달해 주는 수송선이 도망을 갔다.
해병대는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일본이 80% 정도 만든 비행장 공사를 재개한다. 일본군이 버리고 갔던 롤로도 사용하며 4일만에 비행장을 완공시킨다. 수송기가 와서 보급은 해결된다. 비행장은 일본군은 이름을 짓지 못했는데 미군은 미드웨이 해전에서 돈틀리스 폭격기 지휘하다 전사한 '로프톤 핸더슨' 미 해병대 소령의 이름을 따서 '핸더슨' 비행장이라 이름 붙인다. 미국은 과달카날을 불침항모로 만든다.
핸더슨 비행장은 제공권 확보로 제해권 장악에 도움이 되고 지상작전에서 지상군을 지원해줄 수 있다.
전략 전 위치에 비행장을 확보한 미군 연합군은 반격의 기틀을 마련한 것이다.
비행장을 건설하던 조선인 노무자, 일본 경비대는 도망갔다. 과달카날은 제주도 섬의 3배 크기이다. 중앙부 산지는 해발고도 2,000m 이상이며 남쪽 해안은 절벽이어서 접안이 불가능하고 북쪽 해안은 상륙 포인트가 수두룩 하다. 원주민이 거주하고 있었고 도망친 경비대, 건설 노무자 약 2,000명이 살아있었다.
미 해병대 1사단 총원 16,000명 중 5,000명은 툴라기 일대 상륙작전에 투입됐다. 과달카날에는 미 해병대 1사단 병력 11,000명이 방어를 하고 있었다.
라바울에서 일본기 폭격기가 출격한다. 거리가 있어서 정오 미 해병대 점심시간에 과달카날에 도착한다.
점심시간에 폭격을 하니 점심시간 방해하는 '도조타임'이라 부른다.
라바울에서 과달카날까지 직선거리 약 1,000Km 정도여서 당시 항공기로써 5시간 비행거리로 왕복 10시간 거리이다.
미 해병대 1사단과 우리나라와 인연이 있다. 6.25전쟁에서 맹활약을 했다.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상륙 주력부대였고 서울 연희동 일대에 방어선을 구축한 북한군의 결사항전을 뚫고 서울 수복 전투에서 활약한 대한민국 해병대와 미 해병대 1사단이었다. 장진호 전투에서 약 12만 명의 중공군 공세를 막아냈다.
과달카날 전투는 미 해병대가 최초로 치른 혈전이었다. 1942년 8월 7일 미 해병대 1사단이 과달카날에 상륙해서 비행장을 장악했다. 1943년 2월 7일에 마지막 일본군 병력이 퇴각할 때까지 약 6개월에 걸친 기나긴 전투였다. 그동안 비행장을 뺏고 뺏기기 위한 양쪽의 처절한 전투가 있었다.
과달카날 전투는 합동작전이 중요했다. 해상보급에 따라서 육군의 지상작전에 영향을 주고 육군의 지상작전으로 비행장 점령 여부에 따라 제공권 확보에 영향을 주고 제공권을 확보하면 제해권을 확보할 수 있는 서로가 맞물려 있는 전투 양상이 벌어진다.
1942년 8월 10일 일본 대본영의 명령은 "과달카날에 상륙해 신속히 탈환하라'였다.
공격부대 '이치키 지대' 2,000명을 파견한다. 일본육군 대좌 '이치키 기요나오'는 2진을 기다리지 않고 1942년 8월 19일 '타이부 곶'에 선발대 900여 명으로 상륙하여 해안을 따라 미 해병대 방어선으로 진격한다.
미군의 병력이 1만 명인줄 몰랐던 것이다. 모래사장에서 '반자이'를 외치며 총검돌격을 한다. 1차 공격을 실패한다. 바닷가로 뛰어들어가서 공격을 하다 실패한다. 일본군은 중국대륙에서 싸우던 방식으로 총검돌격에 나서지만 미 해병대의 압도적 화력 앞에 실패한다. 테나루 전투에서 이치키 지대는 거의 전멸한다.
이어서 일본 육군 소장 가와구치 기요다케가 이끄는 '가와구치 지대'가 파견된다. 1942년 8월 24~25일 동부 솔로몬 해전이 일어났고 항모 기동부대가 격돌해서 쌍방 손실이 있었다. 미군이 부분적으로 제해권을 가지고 온다. 낮에는 미국이 제해권을 가지고 밤에는 일본이 제해권을 갔는 형태가 진행된다. 가와구치 지대는 이치키 지대 생존 병사와 2진이 합류하여 병력 약 6,000명이 남쪽 정글로 우회해서 미 해병대 방어선 배후를 공격한다. 에드슨 능선이다.
이른바 '피의 능선(Bloody Ridge)이라 부르는 이곳에서 엄청난 혈전이 벌어지게 됐고 가와구치 지대는 엄청난 피해를 입은 채 공격에 실패한다. 패잔병을 이끌고 다시 정글를 뚫고 1942년 9월 16일 '코쿰보나' 마을로 고난의 행군을 시작한다.
미 해병대의 화력 수준은 볼트 액션 5연발 소총 스프링필드 M1903을 썼다. 미 해병대와 일본 육군 개인 화력을 비슷했다. 하지만 미 해병대는 37mm 대전차포, 브라우닝 M1919 기관총, 브라우닝 M1917 경기관총, 60mm, 81mm 박격포, 산탄총이 있었다. 정글에서는 산탄총의 위력은 대단하다.
이치키 지대 선발 1진은 917명으로 800여 명이 야간에 돌격한다. 일본군 야습의 원칙이 은밀하게 움직이는 기도비닉을 위해서 야간에 사격을 하면 안 된다.
※기도비닉은 흔적, 자취, 소리를 남기지 않고 은밀하게 움직이는 것을 말한다.
총검만 꽂고 돌격을 하면서 반자이를 해야 한다. 뛰어가면서 소리를 지르니 미 해병대는 기관총을 날린다.
어처구니가 없는 상황이다. 조용히 하려고 총은 쏘지 않는데 소리는 지르며 공격한다는 것이다. 일본군은 경험해보지 못한 미 해병대의 화력을 보게 된다. 기관총의 위력을 일본군은 처음 본 것이다. 박격포, 대전차 포탄도 쉴 새 없이 날아왔다. 불과 10여 분만에 거의 전멸했다. 미 해병대가 중화기를 단시간 내에 많이 배치할 줄 몰랐던 것이다.
일본군은 포로가 15명이었고 생존자는 20여 명이었다. 미 해병대는 이미 일본군이 올것을 알고 있었다.
호주는 <영연방 솔로몬제도 방어군> 해안감시대로 원주민들이 활약하고 있었다. 일본군에게 붙잡힌 해안감시원 '자콥 보우자'를 이치키 대좌가 직접 심문한다. 미 해병대 정보를 말하지 않고 결박당한 채 총검에 찔린다. 죽지 않고 살아있다가 포박을 풀고 도망쳐 일본군 상륙을 보고한 후에 기절한다.
자콥 보우자는 미국에서 은성훈장을, 공로훈장을 받고 영국에서는 조지훈장을 받고 기사 작위를 받는다.
'과달카날의 영웅'으로 기리게 된다.
일본이 제해권을 차지하는 밤마다 구축함으로 조금씩 보급품을 수송한다. 일본군은 자조적인 별칭 '생쥐 수송'이라 했다. 미 항모 출현 급강하폭격기의 악몽, SBD 돈틀리스 공격 범위 320Km를 감안해서 라바울에서 과달카날까지 밤에 왔다가 해뜨기 전에 귀환한다.
미국의 핸더슨 비행장은 '신의 한수'였다. 핸더슨 비행장에서 계속 출격해서 일본군 수송선을 바로 공격할 수 있었다. 반면 일본군은 일본 라바울 항공기지에서 출격하여 1,000Km 날아와 엄호해야 하기 때문에 같은 수의 비행기가 있어도 상대가 안 된다. 누린 수송선 대신 빠른 구축함을 이용한다. 구축함으로 수송하면 중장비는 많이 실어 나르지 못한다. 중화기, 중기관총, 대포가 실리지 못한다. 구축함 수송은 기본적인 탄약, 생필품만 보급된다. 과달카날은 해안 접안 시설이 없어 구축함 수송이 어렵다. 수송선이 와도 한꺼번에 물자를 내릴 수가 없고 거룻배로 옮겨야 한다. 수병들이 지고 날라야 하기 때문에 하역 시간이 오래 걸린다. 그 사이 날이 밝으면 미국 항공기가 와서 폭격을 개시하기 때문에 일반적인 수송선으로는 감당이 불가하다.
이치키 지대가 전멸하자 병력을 대대적으로 증원하는 계획을 세운다. 라바울로 병력이 집결한다. 35보병여단을 팔라우에서 라바울로 보낸다. 일본 육군 분산된 사단 병력을 모아 제2사단을 투입 결정한다.
문제는 병력과 물자 수송이었다. 라바울까지 올 수 있지만 과달카날에 오는 것이 문제였다. 생각해 낸 방법으로 함에서 내려서 상륙용 단정을 타서 가보자 하여 동원을 한다.
일본의 상륙용 단정은 나무 거룻배로 모터를 단 발동정, 발동기정이라 부른 '통통배'수준이었다.
'개미 수송'이라 부른다. 밤동안 갔다가 올수 없으니 밤에는 수송하고 낮에는 해안지대 맹그로브 숲이나 야자수 그늘에 숨겨놓는다. 개미수송 거리는 500km였다. 라바울에서 부겐빌 부속섬 쇼트랜드로 이동하고 과달카날로 개미수송을 하기 위해 발동기정을 타고 500Km를 3박 4일 코스로 이동해야 한다.
가와구치 지대가 투입되어 개미수송을 시도한다. 가와구치 병력 수송 일부, 구축함 수송 병력 5,600명을 살아서 도착하고 개미수송 병력 약 1,000명 중 350명은 사망했다.
제해권이 밤낮으로 교차한 이유
일본은 야간 전투 기술이 매우 뛰어났다. 야간 어뢰, 함포 운용은 세계 최강이었다. 미 남태평양해역군 사령관 로버트 곰리는 소극적이었다. 체스터 니미츠 미 태평양방면 최고사령관은 곰리를 너무나 패배주의에 젖어있다고 평가한다. 결국 로버트 곰리는 1942년 10월 18일 해임된다.
곰리 제독이 모험심이 없고 소극적이었기 때문에 야간에 일본군이 활동하도록 방치한 것도 있다.
일본의 보급 상황은 전쟁을 지속하기 위해 남방 자원을 일본 본토로 수송해야 했다. 보급의 첨병 '상선'을 이용해서 하고 상선을 징발해서 병력, 물자 수송선으로 운용했다. 전쟁 중에 상선을 미국의 공격에 의해서 많이 잃었다. 일본 상선은 군용으로 징발되어서 사라졌다. 상선들을 징발해서 배치하는데 육군용 상선, 해군용 상선, 민간용을 따로따로 관리한다. 일본 해군은 좋은 상선을 징발해서 해군용 수송으로만 사용하려 한다. 그런데 과달카날 투입 군대는 육군이다. 육군용 상선은 따로 있었지만 수량이 많지 않았다. 육군 상선 보호에 일본 해군은 소극적이었다.
1942년 11월 과달카날에 고립된 일본 육군 2사단은 상선 37만톤을 징발 요청한다. 일본 정부나 육군성에서 거절한다. 결국 군용 상선 징발이 어려운 상황을 감안하여 단계적으로 상선을 징발해 주기로 결정한다. 고립되어 있는데 군용 상선이 없어서 고립된 육군들을 실어 나르지 못하는 상황인 것이다. 일본의 전략은 남방 자원 확보를 해놓고 수송을 해서 자존 지위 확립을 해야 한다. 그 중요한 수단인 선박을 징발해 침몰시키면서까지 이 전쟁을 해야 했을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
애초에 과달카날 위치 조차 대본영(육군)은 몰랐었다. 미국은 일본의 과달카날 보급을 막으려 하고 일본은 보급을 해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과달카날 전투에서 미군의 행보
미국 대응책은 핸더슨 비행장을 중심으로 공중 폭격을 하고 강력한 포병을 배치해서 집중적인 화력으로 격퇴시킨다는 대응책을 마련한다. 처음 이치키 지대가 실패한 후 가와구치 지대는 방비가 허술한 남쪽 밀림으로 돌아서 핸더슨 비행장을 배후 기습하려 행군을 하지만 발각이 된다. 일본의 초반 기습은 성공했지만 미 해병대 화력전에 주춤하고 있는 사이 미 해병대 증원 부대가 도착한다.
가와구치 지대는 1942년 9월 12~14일 에드슨 능선 전투에서 격퇴가 된다.
일본군의 야전 식량도 문제였다. 야전식량으로 건빵만 지급되어 밥을 지어먹어야 했다. 연기가 나서 미군 정찰기나 전투기가 보고 폭탄을 투하한다. 전쟁은 보급, 야전 식량 시스템의 부재는 전투력이 약화되는 영향을 미친다.
로버트 곰리 제독이 일본 해군 야습작전에 소극적으로 대처했다면 황소라는 별명을 가진 미 남태평양해역군 신임 사령관 '윌리엄 홀시'제독이 임명된다. 적극적인 지원 약속과 함께 물량을 대거 투입하며 해전의 양상은 치열하게 바뀐다. 미 해군은 함선 피해가 컸다. 이 지역을 '아이언 바텀 해협(Iron Bottom Sound)'라고 부른다.
가라앉은 양측 선박은 약 57척으로 '마치 바다에 쇠 바닥을 깐 것 같다'는 것이다.
1942년 10월 중순 미국은 본격적으로 소모전을 전개한다. 홀시 사령관으로 교체된 10월 중순부터 미국은 과달카날은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1942년 10월 24일 미 합참에 보낸 루스벨트의 지시는 최우선으로 과달카날에 물량을 투입하라는 것이었다. 니미츠는 직접 과달카날에 찾아온다. 병사들과 악수를 하면서 격려를 한다.
당시 미군들은 일본군 시체에서 금니를 뽑는다. 시체를 훼손하기도 하고 일본군 해골을 기념품 삼아 미국에 보내기까지 한다. 미군이 일본군에게 증오심을 보인 이유는 인종주의가 작용한 결과이고 일본군 문화를 이해하지 못한 결과일 것이라 의견이 나뉜다. 또한 미국의 입장에서는 선전포고도 없이 공격한 진주만 공습은 비겁한 공격이라 생각했다. 많은 부분에서 선진 기술을 전수했는데 공격을 당하니 배신감도 컸을 것이다.
미군이 일본군이 항복한다고 해서 들어오면 일본군이 갑자기 수류탄을 던지는 일이 허다하자 미군입장에서는 이러한 경험들이 전파되면서 일본군은 포로로 잡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러한 종합적인 요소들이 합쳐져서 미군은 일본군에게 증오심이 넘쳐나게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 추측된다.
일본군도 총공세를 준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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