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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지식

태평양전쟁, 미드웨이

by 소시민스토리 2024. 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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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전쟁, 미드웨이

1941년 루스벨트 대통령이 합동참모본부에 도쿄를 폭격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바로 도쿄 공습작전, 둘리틀 작전이다.

미국 반격의 작전, 둘리틀 공습

 

미국 반격의 작전, 둘리틀 공습

미국 반격의 작전, 둘리틀 공습 진주만 공격으로부터 2~3주가 지난 시점에서 처칠은 워싱턴으로 날아온다. 진주만 공격 이전에는 유럽이 전쟁의 중심이었다. 유럽을 중심으로 놓고 영국과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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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웨이 '핸더슨 비행장'은 2004년 11월 폐쇄한다. 2008년 전세기 운항만 재개한다. 미드웨이는 태평양 가운데에 있는 섬으로 산호초로 둘러싸여 있다. 면적은 6.2Km이다. 미 해군은 비행장을 만들고 미 해병대가 주둔한다. 하와이로 가는 전초기지이며 하와이로부터 약 2,300Km 떨어져 있다. 미드웨이 외에는 섬이 없다.

 

일본은 둘리틀 공습 이후 미드웨이를 주목한다. 일본 군부는 미드웨이에서 미 태평양함대를 감시하고 있어야 다시는 둘리틀 같은 공습을 겪지 않을것이라 판단한다.  미드웨이는 제국을 방위하는 전초기지가 된다. 

일본 연합함대 입장에서는 미드웨이 섬을 장악한 다음 하와이 공격을 염두해 두고 있었다. 미드웨이 섬은 하와이 공격을 위한 교두보였다. 일본 해군 군령부는 미드웨이를 점령하면 미국의 주력이 움직일 것이고 함대 결전을 벌일 수 있는 조건이 된다.  

 

일본은 항공모함 4척을 모두 미드웨이로 보낸다. 우수한 전투기, 폭격기, 우수한 파일럿이 집중 배치된다. 항공모함 4척 함재기 총 244기가 탑재된다. 

당시 미국 항공모함은 엔터프라이즈, 호넷, 요크타운으로 3척이었다. 요크타운은 직전 산호해해전에서 큰 타격을 입어 전쟁에 참여할 수 있을지도 불투명했다.

일본은 4만 톤급 항공모한 아카기, 카가, 2만 톤급 항공모함 소류, 히류였다. 미국 항공모함은 대부분 2.5만톤 내외이다. 일본이 4척을 보낸 것은 산호해 해전에서 파손 및 재정비가 필요한 요크타운을 제외하면 미국은 함대가 2대뿐이므로 4:2 전력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1942년 5월 28일 새벽 '체스터 니미츠' 미 태평양 방면 최고사령관이 진주만 1번 드라이 도크의 요크타운에 진입한다. 요크타운을 고치라고 명령하였고 운항 가능한 수준으로 72시간 만에 수리를 한다. 

요크타운 함대는 출항을 한다.

 

 

1942년 6월 4일 새벽 4시 45분 일본군 항모 4척에서 탑재된 함재기 절반이 출격을 시작한다. 1차 공격대는 곧 미군 전투기에 요격을 받게 되지만 오히려 미군 전투기들이 많은 피해를 입게 된다. 일본 폭격기 편대가 미드웨이 섬을 공습한다. 그런데 비행장에 있어야 할 미군 비행기들이 보이지 않는다. 

1차 공격대는 6월 4일 오전 7시에 미드웨이섬 2차 공격이 필요하다고 '나구모 제독'에게 보고하면서 귀환하던 시점에 아까 보이지 않던 미군 뇌격기들이 일본 항공모함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갑판에 2차 공격을 대기하고 있었던 일본 항모는 미군 뇌격기 출현에 당황했으나 엄호하고 있던 제로전투기가 요격하고 항공모함 회피 기동으로 피해를 입지 않는다.

 

나구모 제독은 2차 공격을 결심하고 갑판 위 함재기는 어뢰 대신 폭탄으로 장착하라고 명령한다.  재무장이 끝날 쯤 미드웨이섬에서 출격한 미 급강하폭격기가 히류를 공격하지만 제로전투기와 대공포 요격으로 실패한다.

오전 8시 30분 일본 정찰기는 미 항모 호넷을 확인하고 미항공모함을 공격하기 위해 갑판의 폭격기는 격납고로 내려 보내고 오전 8시 47분 귀환한 1차 공격대부터 착함, 재무장시킨다. 동시에 격납고로 내려간 일본 함재기에 폭탄을 떼고 다시 어뢰를 재장착한다. 그 순간 오전 9:20분~10:10분 미항모 호넷, 엔터프라이즈, 요크타운에서 뇌격기가 출격하여 차례로 공격을 개시하지만 모두 실패한다. 

 

 

오전 10시 22분 무렵 엔터프라이즈, 요크 타운의 급강하 폭격대가 출격하여 일본 항모를 공격한다. 

불과 5분만에 아카기, 카가, 소류를 침몰시킨다. 미드웨이 해전의 운명을 5분 만에 가른다.

반격에 나선 히류는 요크타운을 침몰시키지만 결국 히류도 침몰하고 만다.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은 그들의 최정예부대였던 제1기동함대가 전멸한다. 전투는 미 해군의 대승으로 끝난다. 

미드웨이에서는 일본이 압도적인 물량을 쏟아부었다. 그래서 미 해군 전술은 치고 빠지기 (히트 앤 런)를 할 수밖에 없었다. 

 

미드웨이 해전 전에 일본은 정보를 오판한다. 미 함대가  솔로몬제도에서 작전중이라고 믿었다. 1942년 5월 30일~6월 3일 사이에 진주만 부근에 비행정을 내보내 정찰이 예정되어 있어 중간에 급유를 하려고 일본 잠수함과 조우해서 급유하려고 할 때 미군 잠수함이 순찰을 돌고 있었다. 급유에 실패해서 비행정이 진주만까지 가지 못하고 돌아온다. 이때 스프루언스 소장의 미 함대가 진주만으로 이동 중이었다. 일본은 포착하지 못했다. 만약 이 사실을 포착했더라면 미군이 솔로몬제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진주만으로 오고 있다는 것을 간파할 수 있었다.

 

하와이 지역에서 감청된 무선통신 중에 긴급이라는 단어가 포함되어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미군이 일본군 공습을 예상하고 있다는 것을 감지하게 되지만 아카기 항공모함의 나구모 제독에게 전달되지 못한다. 무선 통신 보안이 있었고 아카기에 감청장비가 있으니 나구모 제독도 이미 알고 있을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카기 항공모함에는 감청장비가 없었다. 출격하기 전에 부족한 감청장비 문제를 이미 파악하고 있던 일본 함대는 미 해군 동향은 연합함대에서 파악해 전달해 주면 응답은 못하지만 듣겠다고 했었다. 

하지만 연합함대는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미드웨이 해전 직전 나구모 주이치 일본 연합함대 제1항공모함대 사령관은 본인이 직접 작성한 정보 판단 문서를 배포한다. 

 

"적 함대는 미드웨이 상륙작전이 시작되는 그때서야 교전에 나서게 될 것이다.

미드웨이 섬에서 이륙한 적의 초계기는 서쪽, 남서쪽에 치우쳐서 북쪽, 북서쪽에 방면에는 많지 않을 것이다.

적의 초계기 활동 반경은  대략 500해리(약925km)이내 일 것이다.

적은 우리의 계획을 알지 못하며 우리 기동부대를 발견하지도 못했다.

우리 인근의 적의 기동부대가 존재한다는 증거도 없다.

우리는 미드웨이를 공격하여 육상기지 항공기들을 파괴함으로써 육군의 상륙작전을 지원할 수 있다.

그 뒤에 방향을 전환해 접근하는 적의 기동부대를 맞아 격파할 수 있다.

적 육상기지의 항공기가 반격을 해와도 우리는 충분히 이들을 격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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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웨이 섬의 항공부대가 있었다. 일본은 계산하지 못했다. 미군 급강하 폭격기는 일본의 약 2배였다.

항공모함을 격침시키기 가장 좋은 수단은 당시에는 급강하 폭격기였다. 뇌격기는 수면에 바짝 붙어서 저공비행한다. 이때 호위기 기관총 공격에 취약하다. 

 

일본의 미드웨이 공격을 미군은 이미 알고 있었다.

태평양전쟁 초반에 승부를 결정짓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당시 일본의 암호를 파악하고 있었다. 미군이 해독한 일본 해군 D암호였다. 일본 해군 D암호는 1939년 6월 1일 도입했고 일본 해군 통신 약 75%가 사용되는 광범위한 암호 체계였다. 미군은 전쟁 전부터 일본의 암호를 해독해 왔다. 1942년 3월 일본 해군 D암호 개정판을 본격적으로 해독한다. 암호 해독으로 일본의 미드웨이 작전 한 달 전에 알고 있었다. 암호 해독 후 미드웨이 섬에 항공부대를 증원했다.

 

 

태평양전쟁에서 활약한 미국의 암호 해독 전담 인력은 약 2만 명이었다. 수많은 이들의 노력 끝에 1942년 5월 암호 전문의 약 40%를 해독하게 된다. 

1939년 6월에 일본 해군 D암호가 시작되면서 영국, 미국이 독자적으로 해독하기 시작한다. D암호 조합 방식은 이미 알려진 방법이었지만 난수료를 체계적으로 찾아내는 방법을 몰랐다. 전쟁이 임박해 오자 영국과 미국은 최고의 브레인들을 동원해서 방법을 찾으려 한다. 전쟁이 터진 후 처칠과 루스벨트는 대서양헌장을 선언하면서 협력을 논의하던 시기에 양쪽의 암호 전문가들이 모여서 정보 공유를 하기로 한다.

 

이때 '파이브 아이즈(Five Eyes)'가 가시화된다.

※ 파이브 아이즈(Five Eyes)는 미국, 영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5개국의 기밀정보 동맹체이며 1940년 5월 최초 협력을 논의했다. 

1941년 1월~2월에 미 육군, 해군 암호 해독 책임자가 영국을 방문해 정보 교류를 합의한다.

파이브 아이즈(Five Eyes)의 기원은 1943년 5월 영, 미 통신보안(BRUSA) 협정에서 출발했다.

일본 해군 D암호는 미드웨이 공격 진적까지 부호집, 난수집 교체 없이 계속 사용하고 있었고 미군은 미드웨이 공격 한 달 전에 관련 암호를 해독하고 있었다.  

 

미드웨이 징후가 처음 포착된 계기는 일본 1차 K작전이었다. 일본 진주만 공습 이후 진주만에 대한 정보가 끊어졌다.  일본 간첩도 잡혔고 방어막이 강화됐고 초계기를 띄워서 감시하고 있었다. 1942년 3월 밤에 비행정을 띄워서 진주만 정찰을 시도한다. 사전 정보 단계에서 가장 필요한 정보는 날씨 정보이다. 당시 비행정은 방어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밤에 몰래 가서 희뿌연 어둠 사이로 육안으로 정찰하던 시대였다. 야간 정찰은 달 밝은 밤에 가야 한다. 일본은 날씨 정보를 계속해서 찾게 된다. 미드웨이 하와이 일대 날씨를 조사해서 보내라는 전문들이 지속해서 나온다. 미 해군 통신감청부대는 이 내용을 엿듣고 수상한 낌새를 포착한다.

 

AF암호가 미드웨이를 지칭하는 것을 알아낸다. 그러나 미 해군본부 통신보안부는 AF가 미드웨이라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이유는 미 해군 통신의 미드웨이 기지 콜사인으로 미군도 AF를 사용하고 있었다. 똑같은 암호를 쓴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체스터 니미츠' 미태평양 방면 최고 사령관과 하와이 암호 해독부대는 확증을 잡기 위해 아이디어를 낸다. '가짜 정보 유출'을 한다.

 

미드웨이와 하와이 사이에는 지하 해저 케이블 유선통신망이 설치된 상태여서 무전을 안 쓰고 통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일본의 반응을 보기 위해 미끼를 던진다.

해저 케이블로 미드웨이 기지에 평문으로 "미드웨이 담수화 시설 고장으로 긴급 수리 요청" 긴급 전문을 타전하도록 지시한다. 

일본은 즉시 미끼를 문다. 일본은 해독을 해서 '미드웨이 담수화 시설 고장 대책 마련 요망'이라고 보고한다. 

일본 암호 해독에 AF가 등장한다. 이것을 미군 하와이 통신감청부대가 포착해서 확실한 증거를 잡는다.

미 해군은 미드웨이 기지에 항공부대 증원을 허가한다.  

 

미드웨이 담수화가 고장 났다는 정보를 일본이 왜 덥석 물었을까?  

일본은 미드웨이 섬 점령이 목적이다. 일본 점령군이 먹고 마실 식수가 필요하다. 만약 담수화 시설이 고장이 났다면 점령에 대비 일본 역시 담수시설 준비가 필요했다. 

 

1942년 5월 중순 중요한 정보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일본 해군 주력부대가 움직이기 시작했고 여러 곳에 있던 함정들이 미드웨이로 집결 전문들이 왔다 갔다 하면서 미군해독부대가 해독하면서 일본 기동함대의 전모가 드러난다. 1942년 6월 7일 일본의 미드웨이 섬 상륙작전 D-day 하기 사흘 전 6월 4일에 폭격을 시작한다는 정보들을 5월 말에 이미 해독하고 있었다.

 

1942년 5월 27일 미드웨이 공격 1주일 전에 일본은 암호가 다 노출된 지도 모르고 암호 코드북을 변경한다. 

부호집은 1년 6개월 만에 난수집은 6개월 만에 개정해 교체한 것이다. 하지만 이미 미군은 암호를 해독하고 있었다. 

미 해군은 미 항공모함 렉싱턴, 요크타운은 산호해 해전 이후 진주만으로 신속하게 귀환시켜 미드웨이로 보내려 했다.

 

 

불길한 징조 속에 시작된 미드웨이 결전은 미국의 암호 해독으로 전황은 일본의 예상과 다르게 흘러가고 미 급강하폭격기의 맹활약 속에 3척의 항공모함이 격침된다. 

항공모함 3척의 격침을 들은 야마모토 이소로쿠 일본 연합함대 사령관은 알류샨 열도에 가있는 류조, 준요항공모함 미드웨이 긴급 투입을 명령한다. 하지만 알류산 열도에서 재빨리 올 수는 없었다. 야마모토는 철수명령을 내린다. 마지막 남은 항공모함도 격침된다.

일본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미국이 암호 해독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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