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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지식

미국 반격의 작전, 둘리틀 공습

by 소시민스토리 2024. 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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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반격의 작전, 둘리틀 공습

진주만 공격으로부터 2~3주가 지난 시점에서 처칠은 워싱턴으로 날아온다. 진주만 공격 이전에는 유럽이 전쟁의 중심이었다. 유럽을 중심으로 놓고 영국과 미국은 사고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처칠과 루스벨트 사이에 대서양을 오고 간 편지는 약 2,000 통이다. 1941년 8월 14일에 <대서양헌장>을 만든다. 

HMS프린스 오브 웨일스에서 루스벨트와 처칠이 만나 전쟁목표와 원칙, 전후 정책을 논의하고 발표한다. 

대서양헌장은 나중에 UN헌장의 기본이 된다.

 

<대서양헌장의 주요 조항>은 두나라는 앞으로 영토 및 그 어떤 확장도 추구하지 않는다. 강탈된 주권과 자치권이 회복되기를 바란다. 자유무역과 민주주의원칙을 지킨다. 전쟁위험을 막는 군축을 한다 등이었다. 

이렇게 유럽에서의 전쟁을 막자고 하던 중에 하와이 시각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공습이 일어났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과 영국 입장이 미묘한 차이를 보인다. 

미국입장에서는 태평양을 바라보았고 영국입장에서는 미국이 태평양으로 가면 유럽전선은 어떻게 해야되냐였다. 처칠은 급하게 됐다. 미국이 대서양헌장을 발표할 때도 미국은 명확한 참전 선언을 밝히지 않았다.

처칠은 유럽에 미국이 참전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암호명 '아르카디아 회담(1941.12.22~1942.1.14)이 열린다. 

※신화 속 아르카디아는 펠로폰네소스반도에 자리한 '목축의 신'이 다스리던 땅이다.

아르카디아회담의 성과는 연합국 공동선언을 한다. (1942년 1월 1일 결의)

"추축국이 일으킨 불의의 전쟁에 맞서 싸운다"

미국, 영국, 소련, 중화민국이 전쟁 선언에 동참한다. 나치 독일에 항복한 유럽국가 포함 영연방 국가, 중남미국가 등 총 26개국 공동 선언을 결의한다. 

 

연합군 공동 선언의 핵심은 각국이 단독으로 강화하거나 휴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문구는 나중에 문제가 된다. 제1차 세계대전 중인 1917년 러시아 제국은 독일에 항복한다. 레닌은 10월 혁명 성공 후 러시아 내전으로 혼란한 정국을 수습하고자 독일과의 전쟁을 포기한다. 18년 후 독일은 전쟁에서 패한다.

연합으로 싸우면 공동작전이 필수이다. 아르카디아 회담의 성과는 연합참모회의  CCS구성이다. 

처칠은 제2차 세계대전은 유럽이 우선이다는 것을 확인받으려 한다. 미국에서도 유럽의 중요성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주만 공습 이후 미국은 유럽만 신경 쓸 수도 없었다. 

 

미 필리핀 연합군 항복, 바탄반도 죽음의 행진

 

미 필리핀 연합군 항복, 바탄반도 죽음의 행진

남방작전 성공과 내분 당시 미 극동군 육군 사령관은 더글러스 맥아더였다. 1930년대 경제불황으로 군축에 나선 미국 32대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맞서 삭감을 반대하다가 육군 참모 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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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반격의 작전, 둘리틀 공습

진주만 공격은 미국인에게 충격과 공포를 안겨 주었다. 일본에 보복해야 한다는 여론은 날로 높아져만 갔다.

1941년 12월21일 루스벨트 대통령은 합동참모본부에 도쿄를 폭격하라고 명령을 내린다. 하지만 일본은 너무 멀었고 공격할 방법이 마땅히 없었다. 당시 폭격기 성능은 미국이 최고였지만 거리가 너무 멀었다. 일본과 가장 가까운 괌은 일본군이 점령했다. 항공모함을 보내려 했으나 항공모함에서 폭격기를 이륙시키는 난제가 있었다. 거기에 일본은 항속거리가 긴 제로전투기가 있었지만 미군은 긴 항송거리 폭격기가 없었다.

고민을 거듭하다가 미 해군 참모본부 작전장교 겸 대장전 부참모장, '프랜시스 로우'가 아이디어를 낸다.

"해상 1,000Km 밖에서 이륙시켜 일본을 관통해 중국에 착륙하자"

 

비교적 가벼우면서 1,000Km 이상 날아갈 수 있는 미 육군항공대 B-25B 중형 폭격기, 애칭은'미첼'을 시물레이션 한다. 결과는 항공모함에서 뜰수는 있는데 이륙은 가능하지만 항공모함으로 귀환, 착륙은 불가능했다.

무모한 작전이었다. 일본을 폭격하고 중국으로 날아갈때까지 폭격 임무 과정의 배후지는 모두 일본군 점령지였다. 자살 공격이나 다름없었다. 

B-25B 폭격기를 무게 줄이기 위해서 개조하는데 하부 기관총좌를 제거하고 추가 연료 탱크를 탑재한다. 최소한의 기관총만 남긴다. 그 대신 일본군을 속이기 위해  나무로 만든 가짜 기관총을 장착한다.

미 육군항공대 중령 '제임스 둘리틀'이 지휘를 맡는다. 1930년대 항공선진국의 명예를 건 비행기 레이스 대회가 각광받았다. 제임스 둘리틀은 슈나이더, 벤딕스, 톰슨 등 3대 항공레이싱에서 우승한 비행기 레이서 출신으로 미국에서 영웅이었다. 

 

미 육군항공대의 최정예 조종사를 선발 해서 '둘리틀 폭격기 편대'를 구성한다. 

작전 D-Day에 임무가 공개된다. 1942년 4월 2일 샌프란시스코만에서  항공모함 호넷과 기동함대가 출항한다. 1942년 4월 18일 아침, 일본에서 약 1,200Km(650해리) 떨어진 해역에 접근한다. 목표해역까지 300해리(약 555Km)가 남았을 때 일본 해군 초계정에게 발각된다. 날씨마저 악천후여서 모든 승무원은 긴장했다.

하지만 돌아갈수는 없었다. 일본 해역 1,130Km 해역에서 둘리틀 폭격대는 출격한다. 원래 계획보다 10시간 빨리 출격을 결정한다.  엔진 출력을 최대로 올린 후 이륙거리 142m에 도전하여 특수제작된 225km 폭탄 4개를 기본 탑재한 16대의 B-25B 폭격기 16대가 일본의 심장부를 향해 날아갔다.

폭격 목적지 도쿄, 요코스카, 고베, 요코하마, 나고야를 향해 퍼지면서 날아간다. 

 

현지시각 1942년 4월 18일 정오 무렵, 도쿄 상공에 B-25B 폭격기가 등장한다. 갑자기 미군 폭격기가 나타나서 공장지대에 84발을 떨어트린다. 미국 자료 기준으로 사망 90여 명 부상 400여 명, 가옥 파손 200채 이상이었다. 일본 군부는 본토가 공격을 받은 것에 큰 충격을 받는다. 언론을 통제하여 미군폭격기 공격이 있었지만 막아냈고 일왕은 무사하다고 일본국민에게 알린다. 

둘리틀 공습은 태평양전쟁의 판을 흔들게 된다. 

 

둘리틀 폭격대는 일본 공습을 마친 후 1대는 소련으로 나머지 15대는 중국으로 가서 불시착한다. 3명이 탈출하다 사망하고 8명이 일본군에게 붙잡혔다. 64명의 승무원은 탈출해서 미국으로 돌아온다. 툴리틀 중령이 미국으로 돌아오긴 전에 임무 실패라고 생각해서 절망했지만 미국으로 돌아오자 국민 영웅으로 환호받았다. 

미국 루스벨트 정부는 둘리틀 공습을 대대적으로 홍보하였고 영화까지 만들어진다. 

 

 

영화 '도쿄 상공 30초' 는 <쿼바디스>, <애수> 등을 연출한 머빈 르로이 감독 작품으로 1944년 아카데미 촬영상, 특수효과상을 수상했다. 영화에서는 둘리틀 공습을 과장해서 보여준다. 

제임스 둘리틀은 용기와 리더십을 인정받아 '명예훈장'을 수상하였다.

 

둘리틀 공습이후 일본 외신은 둘리틀 공습에 관해 발표한다. 미미한 폭격이었고 피해가 없었다고 폄하해서 발표를 하지만 둘리틀 공습으로 일본 왕국 근처가 폭격되어 엄청난 불충으로 일본 군부 입장은 난리가 난다. 

일본의 향후 전쟁 수행 방향을 바꾸어 놓은 계기가 된다. 일본 육군의 방침은 태평양 전역을 확대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갑자기 일본까지 날아와서 미국 폭격기가 공습하자 일본 해군의 주장에 힘이 실리게 된다. 해군은 전쟁을 더 진행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둘리틀 공습에 따른 일본 군부 입장이 변화하여 해군에 반대했던 육군은 돌변한다. 일본육군은 해군의 2단계 작전을 적격적으로 찬성하면서 홋카이도 주둔 7사단을 차출하여 2단계 작전에 투입한다.

 

일본은 둘리틀 공습 직후 왕궁 주변에 고사기관포를 배치하고 독립비행중대에게 수도 방공 임무를 맡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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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전쟁 2단계 작전에 나선 일본

 

5월 뉴기니 섬 남단의 핵심 항공기지 모트 모르즈비를 공격한다. 뉴기니는 호주를 방어하는 병풍 같은 섬이다. 모트 호르즈비을 점령해야 호주를 견제할 수 있다. 일본육군과 해군은 합동하여 공격하려 하지만 '산호해 해전'이 벌어진다.

산호해 해전은 호주와 뉴기니 사이, 아름다운 산호초의 바다를 뒤흔든 최초의 항공모함 간 결전이자 함포가 아닌 함재기로만 싸운 해전이다.  일본은 가용할 수 있는 항공모함 전력을 총출동하여 미국-호주를 잇는 교통로를 막기 위해 포트 모르즈비로 진격한다. 

 

이를 간파한 미 기동함대가 출항해 먼저 공세에 나선다.  함재기들이 퍼붓는 포화 속에 일본 항공모함 쇼호가 침몰한다. 다음날 미국 항공모함 요크타운은 대파되고 치명상을 입은 항공모함 렉싱턴이 자침한다. 

산호해 해전에서 미국은 방어에 성공한다. 일본 항공모함 쇼가쿠가 손상되고 항공모함 즈이가쿠는 항공기 손실이 컸다. 일본 해군은 철수한다.

1942년 6월 7일 일본의 2단계 작전 목표 미드웨이, 알류샨열도로 일본 연합함대 전력을 집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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