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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지식

일본군, 싱가포르와 필리핀을 휩쓸다

by 소시민스토리 2024. 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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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싱가포르와 필리핀을 휩쓸다

일본군 상륙 약 1개월 후 1942년 1월 2일 영연방군의 반격작전이 시작된다. 반격작전은 성공한다.

영연방군의 반격과 저항으로 일본군 제5사단의 진격을 저지된다. 영연방군은 고무농원 뒤에 방어진지를 설치한다. 고무농원 앞에는 대전차 장애물을 설치한다. 영연방군의 장교만 영국인이고 병사는 인도군이었다.

일본군 지휘관은 전초부대를 투입해서 위력정찰과 수색을 했는데 인도군에게 타격을 받는다.

 

남방작전 코드명 E, 과거 동맹군을 적으로 만나다

 

남방작전 코드명 E, 과거 동맹군을 적으로 만나다

남방작전 코드명 E, 과거 동맹군을 적으로 만나다 일본은 난공불락 싱가포르를 정면 공격하지 않고 북쪽에서 내려와 싱가포르 후방을 공격한다. 1938년 싱가포르섬 북쪽에 영국 해군기지가 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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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하고 있던 그때 일본군 전차가 고무농원을 통과하면서 격렬한 전투를 벌인다. 

일본은 대전차 장애물을 만나서 지지부진하고 있었는데 일본군의 공병부대가 빗발치는 총탄속에서 15분 만에 대전차 장애물을 치우고 영연방군의 방어진지를 무너뜨리고 인도군을 유린한다. 영연방군은 후퇴하지만 일본군 전차 사격에 목숨을 잃는다.

인도군 병사들은 실전에서 전차를 처음 보았고 전차 대응 훈련이 부족했기 때문에 후퇴하기 바빴다.

 

말라야 전역을 지휘한 일본군 사령관

일본 육군 제25군 사령관 '야마시타 도모유키'는 '말라야의 호랑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었다.

군국주의를 신봉하고 일왕의 친정을 주장하는 황도파 지지자였다. 포로학살, 싱가포르 민간인학살에 관여한 인물이며 B급 전범으로 사형당한다.

야마시타 도모유키는 자전거부대, 기갑부대 도입, 밀림 전투기술 훈련등을 지휘했다.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 주재 무관시절에 배운 전략, 전술을 활용한다. 야마시타 도모유키는 일본 육군의 전형적인 엘리트 코스를 밟은 군인이다. 

 

말라야 전역에서의 영연방군 문제점

말라야 사령부 사령관은 '아서 퍼시벌' 중장이었다. 영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항복을 해서 치욕적인 '졸장'으로 이름을 남긴다. 하지만 촉망받는 인재였으며 실제 전쟁 이전에 말라이 사령부 영국 극동군 참모장으로 부임했을 때 아서 퍼시벌은 일본군의 공격 예상으로 싱가포르의 뒷문을 칠 가능성을 제기했고 말레이반도 육로 기습에 대비한 방어선 구축을 지지했다. 이후 총사령관으로 다시 왔을 때는 영국은 유럽,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힘겹게 독일군과 싸우는 중이었다.

 

아서 퍼시벌이 능력을 발휘할 만한 전투에 필요한 병력과 물자 지원이 부족했다. 개전 이전 증원 병력은 인도군 2개 보병사단, 호주 제8 보병사단, 소규모의 뉴질랜드 공군이었고 여전히 전차는 없었다. 또한 영국, 호주, 인도, 뉴질랜드 지휘관들 사이에 갈등이 있었다.

현지 노무부대와 방어진지를 만들기 위해 현지 노무자와 행정기관의 도움이 필요했지만 협조를 해주지 않는다. 영국군의 육해공 갈등 때문에 전쟁 초반에 제공권을 뺏기는 원인이 되었다.

일본군 전투기에 맥을 못 춘 영국 공군의 2선급 전투기 F2A 버펄로가 비행기 착륙 후 공격을 당했다. 비행장에 대공포가 없었다. 대공포는 육군소속으로 공군 비행장에 배치를 하지 않았다. 공군 비행장에 적이 나타나도 육군에게 지원 요청을 하지 않았다. 협조가 되지 않아 열심히 싸우고 착륙을 하면 일본군 전투기의 기습 공격에 지상에서 격추당한다.

 

영연방군의 군 병력 구성

병력수는 일본보다 우세했다. 일본 육군 제25군은 3개 사단 약 5 만명이었고 싱가포르에 주둔하고 있던 영연방군은 8만 명 이상이었다.  영연방군의 한계는 부대마다 전투력이 천차만별이었다. 영국정규군은 2만 명이고 식민지 인도군 3만 명, 호주군 1만 5천 명이 긴급편성됐고 말레이군은 1만 5천 명으로 현지 차출이었다.

병력 실력 편차로 효율적 운용의 어려움이 있었다.

영국이 일본의 공격을 예상하면서도 전쟁 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은 이유는 일본에 대한 이해 부족과 아시아에 대한 무시가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싱가포르를 함락당한 영연방군의 결정적인 실책

싱가포르는 말레이반도와 1~1.2Km 조호르 해협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는 섬이다.

연안을 요새화 시키면 방어가 용이하다. 개전 이후 지휘관들의 건의는 말레이반도에서 싱가포르로 들어오는 북쪽 해안에 방어선을 구축하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퍼시벌은 기각을 한다. 싱가포르 방어선 구축보다 말레이 다리 폭파가 먼저라고 하면서 전쟁 초기인데 싱가포르 함락 방어는 병사들 사기에 좋지 않다며 각하한다.

결국 싱가포르 북부 연안 방어선이 요새화되지 못해 나중에 속수무책으로 뚫리게 된다. 

 

1,100Km 말레이반도 진격 후 섬 상륙을 위해 필요한 일본군의 상륙 도하작전의 도하 위치를 영국군은 잘못 판단한다. 도하위치로 싱가포르의 북동쪽 해안을 예상해 영국군 제18사단을 배치한다. 북서쪽 해안에는 빈약한 호주사단을 배치한다.

일본군은 영연방군의 병력 배치의 노림수를 간파하고 호주사단이 지키는 북서쪽 연안으로 도하, 상륙한다.

일본군 도하, 상륙 루트에 자리한 말레이반도 '조호르바루'가 있다. 조호르바루는 '조호르 술탄국'의 수도이다. 

※술탄국은 이슬람 세계의 세습군주 '술탄'이 다스리는 나라다.

말레이반도는 오랜 역사를 지닌 술탄국들이 자리한다. 영국은 이 술탄국들을 '식민지 말레이연방'으로 묶어 간접 통치했다. 조호르 술탄국은 영국의 보호령으로 어느 정도 자치를 인정받았다. 당시 조호르 술탄국에는 조호르 21대 술탄 '이브라함 술탄'이 다스리고 있었다.

 

 

조호르바루에 술탄의 궁전이 있었는데 궁전에 딸린 건물 중 술탄의 집무실로 쓰였던 '이브라함 술탄 빌딩'이 건물 한가운데 우뚝 서 있었다. 일본군이 관측소로 쓸 것 같으니 포격으로 부술 것을 건의하지만 퍼시벌은 전쟁 후 외교 문제가 될 수 있다며 빌딩을 부수지 않는다. 결국 '야마시타 도모유키'가 술탄 빌딩에 올라가 상륙부대 내려다보며 작전을 지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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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에게는 보급 문제가 있었다. 두 달이 넘는 전투기간 보급이 따라가지 못했다. 야마시타 도모유키는 영연방군이 결사항전을 할까봐 두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일본군의 상수도 파괴로 농성을 이어갈 수 없었던 영연방군은 항복하고 만다. 

영연방군은 병력은 많았지만 효과적으로 운영되지 못한데는 이유가 있었다.  어디든 상륙이 용이해 먼저 방어하기 힘든 싱가포르 지형으로 해안선을 따라 분산 방어를 해야 했다.  제해권 상실로 집중 방어가 불가능했다. 

집중 방어하려고 하면 일본 해군 제로전투기의 공습 타깃이 될 수 있었고 후방으로 상륙해서 퇴로를 차단했다. 영연방군 병력의 훈련부족과 질 차이를 극복할 수 없었다.  퍼시벌은 1937년 말라야 첫 부임 당시 일본군의 상륙 루트를 예상하고 1939년 그때 방어 기지를 구축했다. 퍼시벌의 방어기지는 싱가포르 해안에 만들지 않고  해협 건너편 조호르바루에 만든다. 퍼시벌은 나름 노력을 많이 했지만 본국에서의 지원이 부족했다.

무능한 지휘관으로 낙인이 찍혔지만 다시 재평가가 필요한 인물이다. 

 

1942년 2월 15일 70일만에 영연방군은 일본에 항복한다.  영연방군의 항복 조건은 싱가포르 치안군의 무장을 허용해 달라 요청했다. 

싱가포르 전선에 조선 청년들이 동원됐다. 항복 후 포로가 된 8만 여 명의 영연방군은 싱가포르 창이 포로수용소에 수감된다. 조선 청년들은 이들을 감시하고 군사 시설 건설 현장에 투입되기도 한다.

포로 감시원으로 동원된 조선인 청년들은 신문에 남방 포로감시원 모집공고를 보고 지원해서 간 사람들이었다. 나중에 전쟁에 차출될 것을 알고 있어서 비교적 안전하다고 느낀 포로 감시원으로 지원한 것이다. 

이것이 문제가 된다. 전쟁이 끝난후 BC급 전범으로 조선인 포로감시원 중 129명이 징역에 처해지고 23명은 사형을 당한다.

 

포로수용소에서 가혹행위가 행해졌다. 포로감시원 모집 지원 이후 군부대에서 받은 2개월간의 훈련에 가혹행위가 포함되어 있었다. 가혹행위자를 가려내는 전범재판에서 포로들은 최일선으로 전쟁포로와 마주했던 조선인들을 지목했다. 국가가 나서서 그들을 대변하고 보호해야 했지만  이미 재판은 끝나버렸고 풀리지 않은 숙제로 남아있다. 가혹행위를 했더라도 포로 학대를 하지 않을 경우 지휘관들에게 받아야 했던 불이익들이 있었다. 태평양전쟁 당시 조선인 포로감시원은 3,000여 명이었다. '전쟁범죄'에 연루되었다는 굴레 속에서 전쟁이 끝난 후에도 진상규명과 보상을 향한 외로운 싸움을 치러야 했다.

 

※극동 국제 군사재판 분류 기준

A급 전범 :전쟁을 기획, 주도한 자

B급 전범: 전쟁법, 전쟁 관습법을 어기고 민간인 학살 등을 저지른 자

C급: 상부의 명령으로 민간인과 포로에게 가혹행위를 한 자 

 

필리핀을 노리는 작전 코드 M

가쓰라-테프트 밀약은 1905년 7월 일본은 대한제국, 미국은 필리핀에 대한 서로의 지배와 주도권을 인정한 협약이다. 일본이 남방으로 진출하는 도약대는 필리핀이었다. 필리핀은 7,107개의 크고 작은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섬나라 필리핀 공격의 거점이 된 섬은 루손섬이었다. 루손섬은 필리핀에서 가장 큰 섬으로 수도 마닐라가 있으며 국토의 1/3을 차지하며 인구의 반 이상이 살고 있는 가장 발달된 지역이다.

 

일본의 공격 타깃이자 연합군의 최대 방어지역이었다. 일본군의 필리핀 침공 계획은 2개 사단이 링가예만과 라몬만으로 상륙해서 진격하고 위아래로 협공하며 마닐라 인근에서 결전할 계획을 세운다.

미 필리핀 연합군은 미군 약 3만명과 필리핀군은 약 12만 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미국은 1935년 필리핀 자치령 성립 후 독립을 약속하며 '필리핀 경찰대'를 중심으로 필리핀군을 육성한다. 지휘관은 미군이며 방어 병력 대다수는 필리핀군이 다수였다. 

 

일본군은 2개 사단 약 4만 3천 명이었다. 점점 증원이 되면서 병력 증원으로 최종 13만여 명이 된다.

개전 당시 병력은 미 필리핀군이 우세했다. 

일본은 제공권을 장악하기 위해서 육해군 합동작전을 한다. 일본해군은 항공모함 함재기로 공습하고 일본 육군은 타이완 비행장에서 육군 항공대가 출격하고 공습했다. 미군의 주요 비행장을 파괴한다.

 

 

클라크 미 공군기지가 파괴된다. 최대 미군 항공기지 클라크 미 공군기지는 태평양에서 가장 중요한 미 군사 시설 중 하나로 1903년 건설돼 미국 육군항공대 폭격기 거점지대로 사용됐다. 

1991년 화산 폭발로 인해 공군기지는 폐쇄되고 이후 지역 경제 발전을 위해 경제특구로 지정되어 관광단지로 개발됐다.

 

일본 해군 육전대,14군 일부 병력은 필리핀 북쪽 바탄섬에 상륙해서 바스코 비행장을 점령한다.

공습과 동시에 미군 비행장 지상 공격 및 점령하러 일본 육군 부대가 상륙한다. 비간, 아파리에 상륙해서 비행장을 점령하고 팔라우에서 떠난 일본군이 필리핀 남쪽 레가스피에 상륙해서 비행장을 장악한다.

일본 육군은 제공권 장악을 위한 5개 거점에 선견부대부터 투입했다. 동시에 마닐라 주변의 비행장, 해군기지를 폭격하고 미 필리핀 연합군을 정신없이 만든다. 동시다발 공습 후에 지상군이 상륙한다.

 

14군 제48사단(주공부대) 링가옌만으로 상륙하고 14군 제16사단이 라몬만에 상륙한다. 두 부대가 상륙을 하는 순간 필리핀의 운명은 정해졌다. 

 

 

일본군이 자랑하는 경전차로 말라야전역에서 활약을 펼쳤다. 필리핀에서는 전혀 다른 상황이 펼쳐진다. 필리핀 상륙 시 전차 제4연대, 제7연대가 경전차, 중전차를 100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미군 전차 M3 스튜어트 경전차를 만난다. 37mm대전차포로 주무장하고 있었다. 500m 밖에서 쏴도 일본군 전차는 뚫렸다. 일본군이 쏜 포탄이 M3 스튜어트 경전차에 맞으면 튕겨나갔다. M3 스튜어트 경전차의 전면 장갑이 43mm로 일본 포탄을 튕겨버렸다. 반면에 일본군 97식 중전차는 전면장갑이 25mm였다. 

일본 97식 중전차의 57mm 유탄포를 500m 밖에서 발사하면 M3 스튜어트 경전차에 페인트가 벗겨졌다. 

영점 거리(zero distance)에서 발사하면 M3 스튜어트 경전차에 약간 균열이 갔다.

이때부터 일본 경전차는 무용지물이 된다. 미군이 가지고 있는 전차는 약 40대뿐이었다. 일본군 2개 연대 전차 100대가 무너진 것이다. 이에 일본은 보병의 자살 돌격을 시도한다.

한 일본군 전차 장교가 미군 전차에 밀리자 방법을 찾던 중 25mm 철판을 구해 장갑을 덧대니 효과가 있었다. 

열심히 싸웠는데 이 장교는 군법회의에 회부가 된다. 감히 왕이 내린 전차에 손을 댔다는 것이다. 

 

일본군 전차부대는 1941년 12월 22일 필리핀에 상륙했다. 1942년 4월 9일까지 고전을 한다. 이때 일본 본토에서 일본 97 전차를 개량해서 57mm 유탄포를  47mm 대전차포로 탑재한 새로운 전차가 와서 겨우겨우 난국을 수습한다.

당시  미 극동군 육군 사령관은 맥아더 장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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