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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지식

진주만 공습과 남방작전

by 소시민스토리 2024. 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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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만 공습과 남방작전

1941년 태평양 전쟁 발발 당시 일본해군은 세계 최강 기동함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개전 당시 일본군의 정규군은 약 240만 명이었다. 1931년부터 만주사변, 1937년 중일전쟁을 거치면서 대부분 전선에 투입돼 실전 경험을 지녔다. 태평양전쟁 후반 1945년에는 예비군 약 300만 명이었다. 일본 육군은 사단수는 많지 않아서 태평양전쟁 동원 병력을 51개 사단이었다. 태평양전쟁 개전 당시 일본군 편제는 일본 본토 5개 사단, 관동군 등 해외 파견 46개 사단으로 병력 동원 조직화에 한계가 있었다.

 

 

항공기는 7,500대, 작전 수행시간은 500시간 이상 파일럿이 3,500명 정도였다. 일본 해군의 주력 함선 전투함은 230척이었다. 개전 당시 출진 항공모함은 9척이었다. 전력은 일본이 압도적이었다.

전쟁은 경제력이 뒤바침돼야 한다. 1940년 일본 국민 총생산(GNP)은 약 90억 달러였다. 일본은 미국의 경제적 상황이 일본보다 강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미국의 잠재력을 우려했다. 그래서 일본은 단기결전을 했다.

예비군 포함 일본군 병력은 240만이라고 했지만 240만 병력이 미국과 싸울 수는 없었다. 일본 육군의 대다수는 중일전쟁 중으로 중국에 있었고 일본 본토, 조선에 주둔하고 있어서 사실상 태평양전쟁에 동원 가능한 규모는 10개 사단이었다. 일본군 전력은 미국보다 압도적이지 않았다.

 

 

미군 병력은 약 150만 명이었고 제대로 훈련된 병력은 약 50만 명 정도였다. 항공기는 1,157대였다.

미국은 전투함이 347척이었다. 개전 당시 출진 항공모함은 3척이었다. 영국은 1척 정도였다.

미군 파일럿들은 플라잉 타이거즈(Flying Tigers)로 싸웠던 소수가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비행훈련만 약 200시간 수료한 정도였다.

※플라잉 타이거즈(Flying Tigers)는 중국을 지원하기 위해 중일전쟁에 파견한 미군 파일럿 대대이다.

미국 국민총생산(GNP)는 약 1,100억 달러였다. 일본과 12배 차이가 나는 경제 강국이었다.

일본 대비 미국의 생산량 차이를 보면 철강은 20배, 석탄은 10배, 전력은 6배, 알루미늄은 6배 차이를 보인다. 

가장 중요한 전략물자 석유 비축량은 약 14억 배럴이었다. 일본의 700배 많은 석유 비축량을 가지고 있었다. 

 

일본의 목표는 남방자원지대를 포함한 대동아공영권을 확보함으로써 자존 지위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남방자원지대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미국 태평양함대 사령부를 무력화시켜 제해권, 제공권을 장악하고 나면

남방지대를 확보할 수 있다. 남방자원지대 방어를 위해서 외곽지역을 강화시키고 미국이 반격을 해오면 미국을 격퇴하면 된다. 미국을 격퇴하면서 결국에는 미국의 전쟁 수행 의지를 박탈시킴으로써 그들을 우리가 원하는 협상테이블로 끌어내는 것이 이번 전쟁의 최종 목표였다. 

 

일본의 사회 분위기는 전쟁을 원하고 있었다. 1941년 미국의 '헐 노트' (침략전쟁으로 얻은 모든 이익을 포기하라는 미국의 최후통첩)로 인해 태평양전쟁에서 '일말의 희망'을 찾는다. 

일본은 미국의 석유 금수조치로 석유를 얻을 수 없게되자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유전지대를 확보하려 한다. 

 

※대본영은 일왕을 필두로 육군 참모본부, 해군 군령부 수뇌들이 모여 전반적인 회의와 작전을 논한다.

전시체제를 이끌어가는 일왕 직속의 군 최고 통수부이다. 하지만 일본 정부의 총리, 외무대신 등 문관은 열외가 된다. 재본영의 결정은 정부연락회의를 통해 알려준다. 당시 총리 도조 히데키는 대본영에 참석한 것이 아니라 육군대신을 겸하고 있어서 참석한다. 1893년 대본영은 법제화되었다. 청일전쟁을 시작으로 유사시, 전시에 조직된다. 태평양전쟁 끝까지 대본영이 통솔한다. 대본영은 태평양전쟁 개전 결정의 중추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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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 현지시각 1941년 12월 7일 오전 7시 49분, 성공 암호 "도라 도라 도라"를 타전하라는 명령으로 진주만 기습이 시작된다. 공격 최우선 목표는 미 태평양함대 항공모함과 전함이었다. 오전 7시 58분 미 해군 항공대 경보가 발령된다.

"진주만이 공격받고 있다! 이것은 훈련이 아니다"

2차례 걸친 공습으로 해군은 물론 민간인 희생이 속출하고 있었다.

 

미국은 진주만 공격 예상은 항상 하고 있었다. 하지만 400대가 넘는 항공기, 대규모의 항공모함 항공 기동대로 기습을 할 것이라 예상하지 못했다. 일본 기동함대는 사할린 군도로 집결해서 출진한다. 선박 왕래가 적은 북태평양 항로 '북방항로'로 이동한다. 진주만에서 230해리 (약 426Km) 떨어진 원거리에서 항공기를 출격시켰다. 예상치 못한 공격 방법이었다.

 

 

미국은 진주만의 해군 기지는 난공불락의 요새로 구축했지만 일본의 기습공격으로 하루아침에 충격과 공포에 휩싸인다.

진주만  공습 이전 잠수함을 침투시켰다가 대(對)잠수함 방어 체계를 갖춘 미 해군에 발각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진주만에서 보면 미 본토 방향인 북쪽에서 적 항공기가 기습할 줄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하와이 오하우 섬에서 시험가동 중인 미 육군 레이다 기지에서 일본 항공기를 포착하지만 아군 미 육군항공대로 오인한다. 

 

일본이 진주만 공습 1시간 10분 전, 남방작전을 개시한 일본은 태국령 '싱고라'를 공격했다. 미국은 어디를 방어해야 할지 혼란에 빠진다. 

일본군은 진주만 공격 1차때는 성공한 작전이었다. 하지만 2차 때는 일본의 피해가 컸다. 2차 공격한 파일럿들은 진주만에 유류 저장고와 선박 수리 독 시설이 남아있어 파괴해야 한다고 보고한다. 진주만 3차 공격을 준비한다. 그러나 일본 해군 제1항공함대 사령관 '나구모 주이치'가 3차 공격을 취소한다. 

'나구모 주이치'의 고민은 2차 공격 때 손상된 급강하폭격기가 너무 많았고 폭격 정확도가 하락할 것이며 2차 공격 때 파일럿의 피해가 많았는데 3차 공격을 하다가 중일전쟁 실전 경험의 베테랑 파일럿을 잃을 수도 있다는 고민으로 3차 공격을 취소한다.  나구모 주이치는 해군 군령부의 지시를 충실히 따른다. 해군 군령부의 생각은 진주만에 보낸 제1항공함대는 속히 귀환해서 남방지대로 출진을 하라는 명령을 한다. 진주만에서의 전과보다 기동함대 전력을 보전해서 남방작전 수행이 급선무였다. 

당시 영국 해군은 싱가포르에 주둔 중이었다. 

 

<태평양전쟁 직전 유럽 열강의 동남아 식민지 현황>

유럽제국에게는 동남아는 중요했다. 자원 확보, 독점적 시장이었으며 유럽이 생각하는 핵심 시장 중국으로 가기에는 거리가 멀고 영토가 넓어서 우선 중국의 '둘레'부터 식민지화시킨다. 

영국은 인도, 버마(미얀마), 말라야(말레이시아, 싱가포르)를 식민지화 한다.

네덜란드는 동인도회사를 지으면서 인도네시아를 식민지화한다. 

프랑스는 인도차이나(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반도를 식민지화한다.

유일하게 태국은 독립국가로 남아 있어 중립국을 표방하며 주권을 지킨다.

호주는 위임통치령으로 파푸아뉴기니 북부와 나우루에 영향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일본은 동남아지역에서 가장 핵심적으로 타깃을 삼았던 나라가 인도네시아였다. 석유, 석탄, 주석, 고무 등 자원이 풍부했기 때문이다. 말레이시아에는 주석, 천연고무가 많이 나왔다. 전략물자를 얻을 수 있는 동남아시아는 지하자원의 보고였다.

이곳은 이미 영국의 영향력 하에 있었다. 영국은 영일동맹이 깨진 다음부터 일본을 가상적국으로 여기고 면밀한 계획을 실행한다. 영국 본토에서 주력함대가 올 때까지 싱가포르를 방어할 계획이었다. 

 

일본은 영국 본국에서 지원이 오기 전에 빠르게 싱가포르부터 점령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싱가포르를 점령하고 말라카 해협을 차단하면 영국 해군의 태평양 진입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싱가포르를 먼저 치려고 한다. 싱가포르는 인도네시아, 인도차이나로 가는 지름길이었다.

게다가 싱가포르는 영국해군 기지가 있었고 싱가포르에 비행장을 건설하면 제공권을 확보할 수 있고 제해군까지 확보할 수 있었다.

싱가포르는 지정학적 위치로 남아시아, 동남아시아, 인도네시아를 연결할 수 있는 중심지역이다.

 

1902~1921년까지 3차례나 영국과 일본은 동맹을 맺었었다. 하지만 이제는 영국의 뒤통수를 치기 위해 작전을 짠다. 일본 육군의 전략은 싱가포르를 먼저 공략하는 것이다. 반면에 일본 해군은 강력한 적, 미 태평양함대를 견제하려고 한다. 견제하려면 필리핀을 먼저 공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1941년까지 일본 육군과 해군은 작전을 두고 대립한다. 결국 육군의 뜻대로 싱가포르를 공격하고 일본 해군 미태평양함대 견제는 필리핀 대신 진주만 공습으로 선회한다. 결국 동시 공격으로 타협한다.

원심공세로 한 점에서 출발하여 목표지점 여러 곳을 동시타격한다. 원심공세는 가용할 병력과 전투력이 우세하고 충분하다면 최단 시간 내 최대 효과를 얻을 수 있고 상대방에게는 진짜 목표를 숨기는 기만효과가 있다.

※원심공세는 후대에 군사사학계에서 일본의 태평양전쟁 개시 작전에 붙인 명칭이다.

 

 

일본은 진주만 공습 직전에 대미 선전포고를 전달하려 했으나 암호 전문 해독 지체로 공습 후 전달한다.

하지만 영국을 처음부터 무시하면서 1941년 12월 8일 오전 9시 무렵 일본 외무대신이 주일 영국대사를 불러 선전포고문을 전달한다.

일본 시각 기준 1941년 12월 8일 오후 2시 15분에 일본 육군이 말레이반도 상륙을 개시한다. 오후 3시 19에 진주만 1차 공습을 개시한다.

오후 6시 일본 육군은 홍콩을 침공하고 오후 7시 55분에는 일본 제23군 비행대가 홍콩 공습을 개시한다.

오후 8시부터 8시 30분까지 일본 제3비행단은 말레이반도 비행장 공습을 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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