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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지식

일본 제국주의 전쟁, 태평양 전쟁

by 소시민스토리 2024. 1.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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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주의 전쟁, 태평양 전쟁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다. 나치 독일과 맞서느라 '힘의 공백 상태'에 놓인 아시아 태평양을 노린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전쟁, 태평양 전쟁은 1941년부터 1945년까지 이어진다. 

 

<태평양전쟁의 원인과 배경>

메이지유신 이래 일본은 팽창정책을 추진한다. 20세기 초 일본의 국력은 세계 5~6위 수준이었다. 

갑신정변을 일으켰던 조선의 젊은이들은 일본의 근대화를 배우기 위해 일본으로 갔다.

갑신정변(1884년)은 청의 내정간섭에서 벗어나고 근대화를 목표로 삼았던 '개화당'의 무력 정변이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계몽주의 사상가이며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라 불린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일본은 우월하다는 국수주의 사상을 지녔고 '탈아입구'를 말한다. '탈아입구'는 일본은 아시아와 다르며 아시아에서 탈출해 서구 대열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스즈키 켄타로가 가장 먼저 언급한 '탈아입구' 사상은 근대화를 위한 제국주의 침략전쟁의 명분이 된다.

 

조선의 젊은이들뿐만 아니라 중국의 중화민국을 열었던 지도자들(중국 국민당 쑨원, 쑹자오런 등)도 일본에서 유학했다. 이 당시 일본이 제국주의의 모습을 보이기 전까지는 근대화의 하나의 모델이 될 정도의 존재였다.

 

 

일본은 '페리 원정(1854)'은 미국 해군 동인도함대에에 의해 강제 개항한다.

봉건주의 시스템 '막부'가 해체되고 근대화 통일국가 체제를 구축한다. '부국'을 향한 근대화의 길로 가는 수단은 '강병'이었다. 청과 러시아와의 전쟁, 한반도 침탈 등 팽창적 제국주의의  야욕을 드러낸다.

 

산업혁명 이후 제국주의 개념은 달라진다.

근대 이전의 제국주의는 영토 확장을 위한 정복과 내 편으로 만드는 것이었지만 근대 제국주의는 시장 선점을 위한 무력 침략을 해서 독점적 시장을 확보하고 자원 약탈의 식민지 쟁탈전이다. 

두 개념을 혼합한 것이 일본 제국주의다. 일본 제국주의는 시장 확보와 자원 약탈의 식민지를 정복하는 성격을 같이 가지고 있다. 유럽 제국주의는 식민지가 생기면 동인도회사를 파견하여 군대 대신 경비대를 파견하여 식민지를 경영한다. 하지만 일본은 일본 사람들을 식민지에 이주를 시킨다. 

 

 

제국주의 군사력은 식민지 건설을 위한 수단이다. 군국주의는 전쟁으로 위기를 타결하고 전시체제처럼 국가를 운영하는 것이다. '야마가타 아리토모(1838~1922년)는 청일전쟁 당시 육군대신, 러일전쟁 당시 육군참모총장 겸 병참총감이었다. '일본군의 아버지'로 추앙받는다.

근대 일본 육군의 롤 모델 '프랑스 군대'를 따라하려다 1870~1871년 보불전쟁으로 프랑스군을 압도한 '프로이센 군대'가 유럽 최고의 군사 강국이 되어 독일제국을 수립하는 것을 목도한다. 입헌군주제까지 비슷하니 독일식 군대를 모델로 삼는다. 독일식으로 일본군은 근대화한다. 

 

일본의 군대는 기존의 막번체제였다. 막번은 쇼군의  '막부'와 지방 영주 다이묘의 영지 '번'을 합쳐 부르는 말이며 영주는 쇼군을 주군으로 섬기되 독자적으로 군대를 운영했다.  이것을 국가에 충성하는 중앙군으로 군제를 개편하여 왕에게 충성하는 군대를 만드는 것이다. 

작전을 하거나 병력을 운용할 때는 내각, 정부에서 군령에 관여하면 안 되고 독자적인 군권을 확립하는 것으로 근대화한다. 원래는 군의 정치적 중립을 위한 제도였다. 하지만 나중에는 오히려 군이 정치에 관여하는 평태로 변질된다.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육군 원수 시절 두 번째로 총리에 올라 2차 야마가타 내각(1898~1900)을 수립한다. 

이 시기 메이지유신에 공을 세웠던 '원훈' 사람은 일왕의 추천으로 권력 독점이 가능했다. 

 

일본 제국주의 무기는 38식 소총이다. 러일 전쟁 이듬해부터 제식 소총이 된다. 러일전쟁 당시 사용한 30식 소총을 개량한 것이다. 38식 소총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때까지 사용한다. 

2차 대전 참전한 국가들은 옛날보다 짧아진 보병 간 교전 거리와 시가전이 많아짐에 따라 각국은 반자동 소총, 연사력이 좋은 돌격 소총 등을 개발한다.

 

일본군 무기는 폐해가 있다. 일본군은 기관총이 비싸서 잘 사용하지 않았다. 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기관총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고 가벼운 경기관총 개발에 박차를 가한다. 

당시 일본군 보병이 사용하던 5연발 클립을 6개 장착할 수 있는 경기관총을 만든다.  일본은 날씨가 습하며 원활한 작동을 위해 기름칠을 잔뜩 해야 한다. 일본에서는 문제가 없었지만 중국에서 벌어진 만주사변과 중일전쟁 때 대륙의 먼지바람은 기름칠을 한 기관총에 달라붙어 총이 나가지 않았다.  일본군은 중국군 경기관총을 노획해서 사용한다. 중국군 경기관총을 노획해서 사용한 일본군병사들은 군법회의에 회부된다. 

'일왕 폐하가 하사한 무기에 결함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일본군 무기체제 곳곳에 허점이 있었다.

 

일본 해군의 '호쇼'는 영국의 지원 아래 세계 최초로 항공모함으로 설계, 건조, 취역한것이다. 

일본 육군 입장에서는 무기에 돈을 쏟기 보다는 병력 사단 규모를 유지, 확장이 더 중요하다. 무기의 발전 속 일본군이 고집했던 38식 소총으로 '백병돌격'을 만들어 낸다. 총검돌격으로 태평양전쟁 당시 38식 소총 총구에 총검을 꽂고 연합군을 향해 돌진하는 자살 공격 '반자이 돌격'을 한다. 

총검을 꽂으면 38식 소총 길이는 약 1.5m 정도이다. 총알 떨어지면 근접해서 찌르는 백병전을 한다. 

일본 군부 생각은 '백병전'은 일본군 상징으로 정신력을 발휘하는 독특한 전술이라고 생각한다. 러일전쟁 때도 겨우 이겼는데 만회하는 방법은 오로지 정신력 강화와 일왕에 충성뿐이다고 생각한 일본 군부는 무기를 개발하려 하지 않았다.

 

총 한자루 바꾸는 것이 쉽지 않았던 것은 일본군의 정신, 편제, 교육까지 모든 시스템이 얽히고설켜 결부되었기 때문이다.  전쟁을 준비하고 치르는 전시체제에서 더욱 매뉴얼 개선이 어려웠다.

일본은 청일전쟁부터 1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진 승리에 도취되어 배우려고 하지 않았다. 메이지 시대부터 19세기말까지 서구 열강을 너무나 열심히 배웠지만 승리에 도취되어 배우는 것에 소월 해진 것으로 보인다.

 

<일본은 어떻게 경제적 대국이 되었을까?>

청일전쟁, 러일전쟁의 승리로 배상금으로 국가가 팽창할 수 있는 한몫을 챙긴다. 청일전쟁으로 배상금 2억냥(당시 일본의 4년 치 예산), 러일전쟁으로 사할린섬 남부, 랴오둥반도, 한반도 지배권 확보한다. 

군수물자 조달로 국내 경제는 활성화된다. 일본은 전쟁을 통해서 성장한다. 1894년 청일전쟁, 1904년 러일전쟁,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서 일본이 경제가 침체기일 때마다 전쟁이 터져 일본 경제는 일어선다. 

 

일본의 공산품은 품질이 낮았지만 제1차 세계대전 특수로 일본 공산품을 전쟁무기를 만들기 바쁜 유럽 국가가 구매한다. 조선을 강제병합 직전 일본은 식민지를 가질 능력이 안되는 나라였다. 

일본 내부에서 논쟁을 벌이다가 군부 입김으로 강제병합한다. 식민지를 경영할 비용이 없던 와중에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이 터진다. 전쟁이 포화로 뒤덮인 유럽은 참호, 기관총이 부른 참혹한 살상극이었다.  전차, 잠수함, 공중전, 시가전까지 등장하며 전사자만 약 1,000만 명이었다. 

 

 

<일본은 어떻게 승전국이 되었을까?>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은 일본을 급성장시킨다. 영국과 일본은 러시아 견제가 공동 목표였다. 3번이나 영일동맹을 맺는다. 영일동맹을 명분으로 일본은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다. 

하지만 일본은 중국의 독일 조차지로 간다. 

※조차지는 정치, 경제, 군사 등의 목적에 따라 다른 나라로부터 빌려 통치하는 영토이다. 영토권을 빌려준 나라에 통치권은 빌린 나라에 속한다. 

일본은 독일 해군 기지가 자리한 '자오저우만' 의 항구도시 '칭다오'로 간다. 칭다오 맥주가 유명한 것은 독일이 조차 해서 맥주 공장을 만든 곳이다. 

 

또한 독일 식민지가 있는 남태평양 독일령 뉴기니로 간다.

※독일령 뉴기니는 마리아나 제도, 팔라우 제도,캐롤라링 제도, 마셜 제도 등이며 , 이 섬들은 위임통치하게 된 일본은 '남양군도'라 부른다. 

독일 조차지 칭다오를 시작으로 산둥반도 확보는 만주로 가는 루트가 확보된다. 제1차 세계대전 특수로 유럽에 공산품 수출하며 일본은 전쟁 특수를 누린다. 중국을 통째로 집어삼키기 위해 만주, 보하이만 확보에 목을 맸던 일본에게는 제1차 세계대전은 최고의 호재였다. 러일전쟁 때 미국 영국에서 빌린 외채 약 8억 엔(당시 환율 기준)을 갚고 채무국에서 채권국으로 바뀐다. 

 

유럽에 참전했던 미국은 일본의 전쟁 행보에 불쾌했다. 급성장한 일본에 대한 견제수단은 군축이었다.

영국이 일본과 동맹을 맺은 이유는 러시아의 남하를 일본이 막아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국은 태평양이 앞마당이었다. 미국의 선교사들은 중국을 주요 선교무대로 삼았다. 일본의 태평양지역의 팽창은 미국입장에서는 복잡한 심경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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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 미국, 스페인 전쟁 승리로 스페인의 식민지 필리핀을 헐값에 넘겨받은 미국은 일본과 필리핀이 가까운 거리에 있는 것이 신경쓰인다. 오키나와와 필리핀 직선거리는 약 1,403km로 서울 부산거리의 약 3배 정도이다. 일본이 오키나와를 합병한 다음 필리핀으로 내려가지 않을까 걱정하기 시작한다.

일본과 영국의 2차 영일동맹의 조약 중 하나가 미국의 심기를 건드린다. 공수동맹으로 다른 나라와 교전할 때 동맹국 자동 참전이었다.  물론 영국은 미국을 침략할 일이 없지만 초조했던 미국은 신경쓰인다. 

 

워싱턴 군축회의가 열린다. 1만 톤급 이상 주력함 척수 비율은 영국 5: 미국 5: 일본3으로 한다. 

일본의 팽창에 제한을 둔  1930년대 런던 해군 군축조약은 일본 해군에게 타격을 준다. 

해군의 보조함 보유 수량을 제한한다. 보조함 보유 비율은 미국 10: 영국 10: 일본 7 비율이다. 

 

<워싱턴에서 군축회의를 연 이유>

영국은 1906년에  '드레드노트급'전함을 만든다. 20세기 초 판도를 뒤바꾼다. 러일전쟁의 쓰시마 해전의 교훈을 받아들인 배였다. 쓰시마 해전 당시 일본 해군은 모든 화포를 일제 사격으로 나선다. 그 당시 전함에는 화포 구경이 다양했다. 발사 거리, 탄도 곡선이 다르고 효과가 없었다. 일본 해군의 일제사격을 분석한 영국은 둘쑥날쑥한 구경을 없애고 동일 구경으로 거대 함포로 통일한다. 

함포의 사정거리 안에 재빠르게 전함의 기동성이 중요하여 강력한 증기 터빈 엔진을 장착한다. 혁신적인 화력, 동력, 방어력을 갖춘 드레드노트 전함이었다.  기존 전함보다 위력은 3배가 되었다.

 

모든 나라의 전함은 구식이 되버렸고 충격과 공포를 느낀다. 하지만 독일의 빌헬름 2세는 전함을 만들기로 하며 전함 건조 경쟁이 시작된다. 세계 2위의 해군 군가로 성장한 독일제국은 세계 최강 영국 해군력의 50% 수준으로 급부상한다. 영국은 제1차 세계 대전 여파로 경제가 휘청거리는 데 신흥강국 일본과 미국이 떠오르고 있었다.

해군 신흥강자 미국과 일본도 전함 건조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영국은 미국을 견제하고 있었다. 미국은 1916~1919년까지 건조한 '클레슨급'은 구축함만 156척이었다. 영국의 2배에 달하는 군함을 만든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세계를 움직이던 패권 국가는 영국이었지만 이후에는 세계 경제의 1위는 이미 미국이었다.

 

이때 영국은 구세주를 만나는데 미국 제29대 대통령 훠런 G. 하딩이다. 

하딩은 대륙에 대한 불간섭을 공약으로 내건다. 세계대전의 비극이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너나 할 것 없이 전함을 안 만들면 된다고 말한다. 영국은 환영한다. 일본에서도 환영한다. 이유는 군부 통제가 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은 군부가 아닌 정당정치 내각이 수립된 민간 정부 시기였다. 이에 일본 정부는 군부를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해  적격적으로 워싱턴군축회의에 참가한다.

하지만 1936년 1월 일본은 군축을 둘러싼 힘겨루기 끝에 군축회의에서 탈퇴하고 만다.

 

일본은 전쟁이 끝나자 마자 위기에 봉착한다. 1918년 쌀 소동이 벌어진다. 

일제 강점기 '한반도 쌀 수탈'의 계기가 된 주부 300여 명의 시위가 있었다. 이후 시민들이 가세해 일본 전역으로 번져나간다. 러시아 혁명에 불거진 소문에 시베리아 출병설이 있었다. 쌀 상인들이 사재기를 하면서 갑자기 쌀 값이 폭등한다. 전국적으로 번진 쌀 매점매석 항의  시위가 일어난다. 

쌀 소동 여파로 조슈와 사쓰마 군벌들이 일본 정계를 장악하고 있었는데 민간 출신 정치가에게 정권이 넘어간다. '다이쇼 데모크라시'가 시작된다. 하지만 다이쇼 데모크라시는 실패한다.

※다이쇼 데모크라시는 1912~1925년 일본에서 일어난 민주주의, 자유주의 운동을 통칭한다. 

 

전쟁으로 성장해온 일본은 산업의 기반에 군수산업이 얽혀있다. 경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전쟁이 필요하다. 

전후 불황 속 민간경제를 살리는 활성화 정책이 필요한 시기지만 실패한다.

1920년 제1차 세계대전 특수가 사라지며 수출 부진에 따른 불황을 초래하는 반동공황이 일어난다. 

수습하기 전에 1923년 관동대지진이 일어난다. 엄청난 인명, 재산 피해를 낳는다.

민심이 좋지 않자 일본 군부는 숨을 고르며 군부마저 4개 사단을 축소하고 해군의 함대 확장 계획을 중단한다. 경제를 살리려고 안간힘을 쏟고 있을 때 1927년 쇼와 금융 공황이 터진다. 

정부와 부실 기업의 정경유착이 터지며 뱅크런이 벌어지고 대규모 예금 인출 사태가 벌어지며 은행이 파산한다.  경제 활성화 시기에 실책을 남발하며 긴축재정을 선택을 한다.

 

1929~1930년 일본 경제를 뒤흔든 금본위제 복귀 논란이 일어난다. 

※금본위제는 각국의 통화 가치를 금 무게를 기준으로 정하는 제도이다. 

국가 간 거래, 무역에 필요한 환율은 고정되었으나 제1차 세계대전 비용 조달을 위해 금본위제에서 일시 탈퇴했다. 일본도 탈퇴했다. 유럽은 복귀를 했고 일본도 복귀를 하라고 압박을 받고 있었다.  이때 1929년 '검은 화요일' 월스트리트 주가가 대폭락 한다. 세계 대공황이 시작되고 있었다. 일본은 간과하고 금본위제로 복귀 선언을 한다. 금본위제로 환율이 고정되어 엔화를 달러로 바꾸는 대규모 환치기 사태가 벌어지고 천문학적인 외화가 유출되어 경기가 침체되었다.

 

거듭된 경제 위기 속에 대공황이 닥친다. 불황과 혼란의 반복 속에서 민간 정부에 대한 신뢰도는 바닥을 친다. 여기서 일본은 독특한 기회 '만주사변'으로 대공황을 극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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