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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지식

태평양 전쟁의 서막, 운명의 1930년대

by 소시민스토리 2024. 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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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전쟁의 서막, 운명의 1930년대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나고 1932년 만주국이 수립되면서 만주붐이 일어난다.

일본은 만주로 진출하면서 새로운 시장을 얻고 만주의 자원과 이익을 독차지하며 사실상 대공황을 극복한다. 

일본 내에서 만주, 몽골은 일본의 국방, 안보의 생명선이라는 우익 논리를 펼친다. 

 

 

'이시와라 간지'는 관동군 작전 주임 참모였다. 남만주철도주식회사의 선로를 폭파하는 자작극을 빌미로 만주 침략을 개시한다. 확전을 시켜 조선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이 월경을 해서 확전이 된다. 상부의 재가 없이 군대가 움직였다. 만주 침략을 위해 독단전행(자기 혼자만의 판단으로 멋대로 행동함)이 용인되었다. 

만주사변 주모자들은 처벌을 하지 않고 진급했다. 여론이 만주사변을 찬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으로 가는 길을 내달라며 일으킨 임진왜란, 1894년 청일전쟁, 1904년 러일전쟁,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칭다오 전투,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킨 것은 대륙 진출이 목표였다.  호시탐탐 '북진'을 노렸던 일본에게 만주는 중국을 침략하는 전진기지였다.

 

 

러일전쟁 비용으로 인해 각종 전쟁 세금을 부담했던 일본 국민들은 러일 전쟁 직후 '피의 대가'로 현금 배상금을 요구하는 시위가 도쿄 히비야공원에서 일어난다. 과격해진 시위는 방화사건으로 번졌고 다른 지역으로 폭동이 확산되자 급기야 계엄령까지 선포된다. 일본 사회 자체가 군국주의화, 우익화, 전쟁을 지지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있었다. 전쟁을 돈벌이로 여겼다. 

일본은 러일전쟁의 대가로 조선에 대한 우위 인정, 만주 철도 부설 특혜, 랴오둥반도 뤼순, 다롄조차, 사할린 남부 할양 등을 얻었다. 

1920~30년대 거듭된 경제 혼란과 위기에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한 일본 정부로 인해 사회 전체는 승리 배상금을 얻을 수 있는 전쟁을 지지한다. 

 

1930년 하마구치 총리 저격, 1931년 만주사변, 1932년 5,15사건(극우 청년 장교들이 군축을 지지하던 쓰요시 총리를 암살한 반란사건), 1936년 2,26 사건,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난다.

1936년 2월 26일 새벽, 일왕의 친정을 주장한 육군 파벌 '황도파' 청년 장교들이 병력을 이끌고 쿠데타를 강행한다. 해군 대장 출신의 전임 총리 '사이토 마코토', 군사 예산을 축소하려던 재정부 장관 '다카하시 고레키요', 육군 교육 총감 '와타나베 조타로'를 암살한다.

2,26 사건은 일본의 군국화에 영향을 미친다. 쿠데타 자체는 실패한다. 일본 군부의 최고 엘리트들이 '이상향의 세상을 만들어보자'라며 일으킨 사건이다. 

쿠데타 주동자들은 처형된다. 가담은 안 했지만 지지했던 군인들은 그 여파로 만주국에 주둔하던 관동군으로 이동한다. 만주의 관동군과 남만주철도주식회사에서 만주를 이상국으로 만들고자 한다. 

광복 이후 대한민국 군 수뇌부 일부는 관동군 만주국 육군군관학교 출신이다.

 

일본 육군 파벌 통제파는 '군부 통제 아래 전쟁 준비에 매진하는 국가를 만들자' 였다면 황도파는 '일왕을 받들어 부패한 기득권을 몰아내고 국가를 개조하자'였다. 

황도파를 비호했던 세력은 청년장교들이었다. 황도파는 농촌 출신 야전 장교들로 군에서 기득권이 없는 세력이었으며  통제파는 육군대학 출신 엘리트들이었다.

황도파는 가난한 출신으로 기득권층에 대한 불만이 많았는데 여기에 영향을 준 사람이 '기타 잇키'였다.

'기타 잇키'는 일본의 사상가, 사회운동가, 파시스트로 국가 개조론을 주장한다.

 

쿠데타를 일으킨 청년 장교들은 일본왕이 지지할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일왕은 자신의 대신들을 죽였다고 분노한다.  일왕의 '쿠데타 진압 및 강력 처벌 명령'에 주동 세력은 자결 및 저항을 포기한다. 주동 세력 청년장교 16명은 총살된다. 역설적으로 실패한 쿠데타이지만 성공한 쿠데타이다.  황도파는 제거되고 통제파가 장악하여 군국주의 일본으로 나아간다. 군부의 내각 통제 수단이 부활 <현역 무관 군부대신제>한다.

육군대신, 해군대신이 내각의 일원으로서 참여를 해야 된다. 현역 중장, 대장이 내각의 일원인 육군대신, 해군대신을 겸임하는 것이다.

 

관동군과 남만주철도주식회사는 합작으로 만주에 일본제국의 위한 이상국을 건설하려 했다.

영화 <마지막 황제>에 만주국 성립이 나온다.일제 강점기 아래에 있었던 조선 청년들도 만주국으로 이주한다. 만주국에 대해 잘 만들어진 영화가 <좋은놈, 나쁜놈, 이상한놈>이다. 1930년대 만주국에 모여든 사람들을 정확하게 보여준다. 만주국은 이상향을 만들려 했던 일본 엘리트 장교의 꿈의 장소였고 식민지 조선, 타이완 청년들은 꿈을 펼치려 모여든다.

1945년 만주에 있던 일본인(민간인)만 100만 명 이상이었다.

 

일본 입장에서 만주의 실권을 장악한 관동군은 영웅이었다. 관동군 입장에서는 만주는 진급, 출세의 무대였다. 관동군은 반인륜적인 실험을 자행한 731부대를 운영한다. 

 

<태평양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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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한다. 이에 일본을 방치할 수 없다고 생각한 미국은 석유 금수 조치를 한다. 

석유 금수 조치로 명줄이 조여오자 일본은 동남아시아 자원으로 눈을 돌린다. 

이런 논리로 일본 우익은 미국의 강요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맞선 정당한 전쟁이다고 주장하지만 일본관동군은 일본 육군의 대표주자로서 소련을 주적으로 삼고 할힌골 전투(노몬한 전투)등 무력 충돌을 일으키고 있었다. 

일본 해군은 이전부터 가상 적국을 '미국'으로 삼고 나름대로 전쟁계획을 준비, 착수하고 있었다. 

일본 육군과 해군은 각자의 활로를 전쟁에서 찾고 있었다. 

 

일본은 진주만 공격을 한다. 진주만의 미 태평양함대를 타격하면 재건에 필요한 시간은 2년이 걸릴것이고 그 사이 태평양의 주요 거점을 요새화하고 미 함대가 재건해서 왔을 때 함대 결전에서 이긴다면 유리한 국면에서 협상할 수 있을 것이다고 예상했다. 

제2차 세계대전 유럽전선에서 나치 독일은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영국과 네덜란드가 혼란에 빠진 상황에서 식민지 동남아로 진출하면 쉽게 차지할 수 있을 것이라 예상한다. 일본의 계산은 독일편에 잘 붙어 승전국이 되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한다. 

 

미국은 석유와 군수물자를 끊는다. 일본은 영국과 미국에 수출하는 주력 상품은 비단이었다. 명주실 생사를 수출했는데 1935년 대미 수출액은 5.4억엔 중 생사가 3.3억 엔이었다.

일본의 교역 구조는 미국에 생사를 수출하면 미국의 석유, 원자재, 기계를 수입한다. 일본의 주요 수입품은 면화였다. 가공을 해서 면직물을 생산하고 영국에 수출한다. 그 돈으로 영국산 기계를 수입하는 구조였다. 

 

일본은 석유금수 조치를 타게 하기 위해 여러 가지 조치를 취한다. 

메이지시대부터 석유회사를 설립해 유전 탐사를 나선다. 일부 나왔지만 석유량은 충분치 않았다. 사할린 등 해외 탐사와 함께 만주에서도 석유 채굴을 한다. 헛다리 짚으며 시추를 실패한다. 

인조석유 석탄액화공업을 추진하며 만주, 조선, 홋카이도, 미이케, 닛산, 야마가사키 인조석유를  건설하지만  경제성은 낮고 소재, 부품, 장비 부족으로 실패한다.

석유를 얻기 위한 타깃은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에 자리한 팔렘방 유전이었다. 태평양 전쟁의 구실이 된다. 

 

'히로히토 일왕'은 일본의 상징이자 통합체로 일본군의 통수권자로 전쟁에 대한 책임이 있지만 전쟁이 끝난 후 전쟁의 책임이 없다며 처벌받지 않았다. 

'고노에 후미마로'는 중일전쟁 개진 당시 총리였고 '태평양 전쟁의 시스템을 만든 인물'이다. 해군 군축에 반대해 온 우파 성향인물이다.

침략전쟁을 정당화하는 정치 슬로건 '동아신질서'를 주장하였고 '대동아공영권'의 아이디어가 된다. 

모든 정당을 해산하고 '대정익찬회'로 하나로 통합하고 1당 독재체제를 구축한다.

진주만 공습을 약 50일 앞두고 총리를 사퇴한다. A급 전범 조사를 피할 수 없자 자살한다.

'도조 히데키'는 태평양 전쟁을 주도한 일본 총리이고 군부와 내각의 주요 요직을 겸직한다.

가장 책임이 큰 전쟁 범죄자로 교수형에 처해진다.

'마쓰오카 요스케'는 외교관으로 태평양전쟁 직전 외무대신이다. 미국 소련과의 전쟁도 불사했던 강경파다.

 

히로히토 일왕을 필두로 한 어전회의에서 12월 초 태평양전쟁의 개전을 결정한다. 

1941년 8월에 석유를 금수 시키고 11월에는 미 국무장관 코덴 헐이 일본의 노무라 장관과 교섭을 하다가 사실상 최후통첩인 '헐 노트'를 던진다.

※헐 노트는 중국 및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철수, 중국대륙에서 챙긴 모든 이권 철회 등을 명시한 것이다.

일본입장에서 이득을 포기, 전쟁 시작 중 양자택일을 해야 했다. 독일과 힘을 합치면 미국을 이길 수 있겠다는 판단을 내린다. 점감요격작전을 준비한다. 

※점감요격작전은 매 해군 함대를 순차적으로 소모시킨 다음 일본 해군이 원하는 장소, 원하는 시간에 함대결전으로 격멸시킨다는 것이다.

일본은 1920년대부터 미국을 가상 적국으로 삼아 준비해 왔다. 1단계로 뇌격전이 벌어지면 잠수함대가 어뢰로 요격해 미 주력함대를 감소시킨다. 2단계로 남양군도에 건설한 항공기지 및 항공모함 함재기를 동원한 미 항공모함의 항공전력을 감소시킨다. 3단계로 최정예함대의 야간 기습 공격으로 미 해군의 주력함을 감소시킨다. 1~3단계로 전력이 비슷해지면 태평양 한복판에서 주력함끼리 결전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점점 전쟁의 그림자가 태평양을 드리우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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