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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지식

미 필리핀 연합군 항복, 바탄반도 죽음의 행진

by 소시민스토리 2024. 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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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방작전 성공과 내분

당시 미 극동군 육군 사령관은 더글러스 맥아더였다. 1930년대 경제불황으로 군축에 나선 미국 32대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맞서 삭감을 반대하다가 육군 참모 총장에서 물러난다. 더글라스 맥아더의 아버지는 '아서 맥아더 2세'로 필리핀 미 군정 초대 총독이었다. 그 인연으로 더글라스 맥아더는 필리핀 육군 원수 겸 군사 고문으로 좌천된다.

 

일본군, 싱가포르와 필리핀을 휩쓸다

 

일본군, 싱가포르와 필리핀을 휩쓸다

일본군, 싱가포르와 필리핀을 휩쓸다 일본군 상륙 약 1개월 후 1942년 1월 2일 영연방군의 반격작전이 시작된다. 반격작전은 성공한다. 영연방군의 반격과 저항으로 일본군 제5사단의 진격을 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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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글라스 맥아더는 전운이 감돌던 1941년 여름 필리핀 주재 미 극동군 육군 사령관으로 복귀한다.

일본과의 전쟁에서 필리핀은 수세적 방어 위치여서 일본군 상륙 시 최대한 지연, 저지하는 곳이며 바탄반도로 집결해 본국의 증원 병력을 기다리는 장기 방어전을 펼쳐야 한다.

미국의 전쟁 플랜은 레인보우 5 계획이었다. 일본군이 상륙하면 전군이 바탄반도로 후퇴하여 마닐라만을 방어하고 약 6개월 버틴 후 증원 병력이 도착하면 함께 반격한다는 것이다.

바탄반도는바탄반도는 마닐라만 입구를 봉쇄하는 방위상 요충지로 방어하고 있으면 일본 해군은 필리핀을 활용하지 못한다. 바탄반도는 열대 밀림 산지, 계곡이 발달해 해안가 몇 곳만 막으면 요새화가 가능했다.

 

레인보우 5계획에 반발한  맥아더는 변경한다. 마닐라만 방어에서 필리핀 전체 방어로 바꾸고 일본군 상륙 시 예상지점에 병력을 전진 배치한다. 그러면서 일본군이 임박해 오니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해안 방어선 강화할 병력, 장비, 증원을 요청하지만 무위로 돌아간다. 주력을 맡아야 할 필리핀군의 전투력이 충분하지 않은 상태에서 일본군에게 일격을 당한다. 

제공권, 제해권을 상실하여 일본군 상륙에 속수무책 당한다. B-17 폭격기로 타이완의 일본군 비행장을 선제 공습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일본군 상륙 2일 만에 원래 계획대로 바탄반도로 철수를 결정한다.

 

현실을 깨닫고 바탄으로 가려고 했지만 장기 농성전을 대비한 기본 비축이 되어 있지 않았다. 분산된 병력에 따라 보급품이 흩어져 있었다.

마닐라만을 방어해야 하는 바탄반도에서 물자부족으로 고전한다. 희망을 잃지 않고 2개월 넘게 병사들을 독려한 맥아더의 모습은 미국 언론에 집중 조명되며 여론의 지지를 받는다. 언론 플레이에 능했던 맥아더는 1942년 3월 루스벨트 대통령의 명령에 따라 호주로 피신하면서 대통령의 명령으로 어쩔 수 없이 간다는 제스처를 취한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희망을 위해 싸우고 있다는 메시지를 던지며 여론의 지지를 받는다. 

 

더글라스 맥아더는 군사전략적으로는 누구가 인정하는 명장이지만 세간의 다른 평가는 독단적이었다는 것이다. 필리핀에서는 일본군을 , 한국전쟁에서는 중공군을 과소평가하며 일격을 당했다는 평가도 존재한다.

 

맥아더의 실책

1941년 11월 24일 미 해군부 전문 발송으로 "필리핀, 괌을 포함한 어디서든 일본군 기습공격 가능성 있다"는 경보가 왔다. 1941년 11월 27일 마셜 미 육군참모총장 전문 발송 "전쟁에 대한 최종 경고"와 함께 맥아더 사령관에게 정찰 강화 등 필요한 조치를 시행하도록 명령한다. 

하지만 맥아더는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런 실책은 6.25 한국전쟁에서 똑같이 일어난다. 중공군 개입 첩보에도 과소평가하고 1950년 10월 15일 트루먼 대통령에게 압록강을 넘어 진격할 중공군은 5~6만 명이므로 공군을 동원해 물리칠 수 있다고 자신했다.

 

일본군의 필리핀 공격 상황

1941년 12월 24일 미군은 바탄반도로 철수를 시작했고 마닐라를 비무장도시(Open city)로 선언한다.  1942년 1월 2일 일본군은 마닐라에 진입하고 점령한다. 마닐라 점령이 끝난 일본은 일본군 주력부대 48사단을 네덜란드령 동인도로 차출한다. 16사단 등 남은 병력과 타이완에서 증원된 65 여단으로 바탄반도를 공격한다.

미군의 바탄반도 1차 방어선을 돌파한다. 하지만 일본군은 보급 및 말라리아 등으로 진격은 무리였다.

바탄 방어전은 2~3개월간 소강상태로 접어든다.  미군도 역시 보급문제에 어려움이 있었다. 미군의 바탄반도 비축물자는 예상인원 약 43,000명으로 6개월간 분량을 준비했지만 실제 바탄반도로 철수한 실제 병력은 약 8만 명이었다. 피난민 26,000명 포함 총 10만여 명이었다. 미군은 기아에 허덕이다가 병력을 증원한 일본군의 2차 방어선 총공세로 항복하고 만다.

 

 

비극의 시작, 미 필리핀 연합군 항복, 바탄반도 죽음의 행진

 

1942년 4월 9일 바탄반도 항복 직후 미 필리핀 연합군 포로는 약 7만 5천 명이었다. 포로들은 오도넬 포로수용서까지 120Km 정도를 행진해야 했다. 행진을 시키면서 음식과 물은 거의 주지 않았고 낙오되면 처형했다.행진 중에 2만이 사망한다. 도착한 포로들의 몰골은 처참했다.

 

1907년 제2차 헤이그평화회의에서 전쟁 규칙 합의가 있었다. 전쟁포로에 대한 인도적 대우 등을 명시했다.

전재포로의 인권을 지켜주는 교전국의 의무는 인식하던 시기였다. 미 필리핀 연합군 항복 조건은 제네바 협정에 따라 전쟁포로로 대우해달라는 약속이 조건이었다. 영양실조와 말라리아라는 이중고가 더해진 바탄 방어전에서 일본의 총공세로 1942년 4월 9일 항복한다. 필리핀전투의 핵심 바탄반도를 일본군에게 넘기고 무장해제 후 포로가 된 미 필리핀 연합군은 약 75,000명으로 오도넬 포로수용소를 향한 '죽음의 행진'에 오른다.

 

이 만행의 전범으로 지목된 당시 14군 사령관 '혼마 마사하루'는 일본 대사관 무관으로 영국에서 8년 복무했다. 일본 군대에도 민주주의를 도입해야 한다고 해서 일본 군부에서 이단아 취급을 받았다. 영어를 잘하고 서구적인 마인드의 '인텔리'로 유명했다. 필리핀 함락에 6개월 이상 걸렸다는 이유로 혼마 마사하루는 일선 지휘에서 해임된다. 한직으로 밀려났다가 1943년 전역한다. 전쟁이 끝난 후 전범으로 체포됐을 때 바탄 죽음의 행진 만행을 몰랐다고 항변했다. 

 

네덜란드 식민지 인도네시아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를 약 340년 동안 식민지로 지배하고 있었다. 17세기 해군력과 자본력으로 네덜란드 황금시대를 연다. 17세기 초반 인도네시아에 동인도 회사를 세우고 식민지화를 한다.

인도네시아는 인구 약 2억 7천명으로 세계 4위로 인구가 많다. 인도네시아 인구의 87% 약 2억 3천 명은 무슬림이다. 네덜란드는 작은 나라여서 넓은 인도네시아에 군대를 직접 데려와서 통치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군사력을 동원해 잔인하게 인도네시아를 통치했다.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네덜란드의 가혹한 통치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인도네시아는 섬이 많고 부족이 다양하다. 다민족, 다부족 국가 인도네시아는 통치하기 어려운 지형과 지리를 가지고 있어 통치하는 것이 어려웠다.

미국은 필리핀 인구 83%의 종교가 카톨릭인 섬나라 필리핀을 신탁통치했다.

 

인도네시아를 공략하는 일본군 전술

일본군 지상군 병력이 충분치 않았다. 반면에 인도네시아는 섬이 많다. UN등록기준 약 16,000개의 섬이 있고 유인도는 약 6,000개다. 일본군 전략은 중요 섬만 점령하는 것이었다. 발리, 티모르를 장악해서 중요섬을 장악하면 주변부는 자연스레 흡수된다. 일본군이 노린 중요 섬은 제공권 장악에 필요한 비행장이 있거나 비행장을 만들 수 있는 곳이다. 제공권을 장악하면 제해권을 장악할 수 있어 짧은 시간 안에 빠르게 점령하는 개구리 뜀뛰기 전술(와조전술)로 점령을 한다. 

 

일본군 중요 거점 점령에 특수부대, 육군의 공수부대를 투입한다. 남방작전의 핵심 거점 '팔렘방' 유전지대에 투입된다. 2월 14일 오전 11시 26분 남방 최대의 유전지대인 수마트라섬 팔렘방에 기습 강하하여 점령한다.

공수부대 투입 이유는 일본군이 해안 상륙 후 팔렘방까지 90Km 이동하는 사이 네덜란드군이 유전에 불 지를 수 있어 유전지대가 파괴되기 전에 재빨리 낙하해서 탈취하는 작전을 구상했기 때문이다.

 

1940년에 창설한 일본 공수부대는 네덜란드령 동인도 (인도네시아)전역에 처음으로 실전 투입된다.

육군 공수부대 '제1정진단'이 기습 강하해서 정유공장을 장악하고 후속 지상군이 가세해서 정유기술자를 투입하고 복구해서 생산을 재개시킨다.

일본은 '팔렘방 유전 장악' 승전보를 대대적으로 선전한다. 하지만 일본 육군 공수부대는 약 400명 투입됐다. 팔렘방을 수비하던 네덜란드군은 약 1.200명이었다. 서로 교전하는 과정에서 네덜란드 군은 유전, 정유공장을 상당 부분 파괴한다. 일본군 공수부대 강습 다음날 상륙부대(38사단 선발대)가 팔렘방에 도착해서 정유공장 재가동에 성공한다.

 

네덜란드의 가혹한 통치를 겪은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일본군에 대한 반감은 강하지 않았다. 네덜란드 식민지 인도네시아, 프랑스 식민지 인도차이나,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는 지배 국가를 향한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영국 식민지 인도,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등은 영국에 대한 반감이 상대적으로 낮은 편이었다. 필리핀도 미국에 대한 반감이 낮은 편이었다.

 

일본군이 상륙했을 때 유럽 제국주의에 대한 반감이 강한 나라에서는 일본군을 해방군이라 생각한다. 일본군은 인도 무장독립세력 등 독립운동 세력을 지원했고 동남아 국가들은 남방작전 초기 유럽의 식민지배에서의 해방의 기회가 아닐까 생각한다.

일본은 유전지대를 확보한다. 유전지대는 일본군 전진 루트의 최남단이다. 미 연합군 역습에 언제든지 뱃길 위험도가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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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초기 승승장구하는 일본군은 이제 대영제국의 핵심을 이루는 인도와 호주 앞마당까지 위협한다.

싱가포르 함락 이후 일본군은 버마전선으로 향하여 석권하고 말라카해협을 장악하며 인도양을 진출하기 위한 길이 열린다. 그 당시 인도양을 통제하는 영국 해군의 핵심기지는 스리랑카의 실론섬 콜롬보항이었다. 본국에서 증원한 전함 등 영국 동양함대가 집결하고 있었다. 영국 동양함대 항공모함 1척을 격침하는 등 일본 연합함대는 압승을 거둔다.

 

일본의 다음 목표는 호주다. 호주는 인도네시아 최남단에서 직선거리 약 400Km에 호주 북단 다윈이 있다.

다윈은 오지에 속하는 '노던 준주(Northern Territory)'의 주도이며 당시 인구는 약 5,000명 수준이었다.

다윈은 연합군의 반격 거점이 될 군사적 요충지였다. 호주 해군, 공군 기지가 있었다.

호주는 동남아를 앞마당이라 생각했다. 일본은 동남아시아를 제압하려면 호주를 제압할 필요가 있었다.

다윈은 호주 북부에 유일하게 전략적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일본군은 방어태세 확인을 위해 2차에 걸쳐 다윈을 공습한다. 1942년 2월 다윈 1차 공습에 제로전투기가 호주 공군은 대패하고 피해를 입는다. 

 

그런데 일본군은 갑자기 철수한다. 일본군이 인도양에서 교전을 하기 위해서는 전제 조건이 있었다. 독일, 이탈리아 추축국과 연계이다. 독일 해군과 연합작전이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독일 해군의 수상함대는 1940년대 노르웨이 전역에서 해군 전력의 반 이상을 잃었다. 1941년 독일 해군의 자랑이었던 전함 비스마르크마저 추격전 끝에 침몰한다. 당시 독일 해군의 전력은 '유보트' 잠수함대였다. 따라서 일본군은 독일해군과 연계 작전이 불가능했다. 일본 해군에게 인도양 진출은 현실성이 없는 계획이 된다.

 

이 시점에서 일본 육군과 해군의 갈등은 첨예해진다. 일본 육군과 해군이 합의한 남방작전은 완료가 되었다.

일본 해군 군령부는 호주 공격할 절호의 찬스라고 했고 공격 목표는 피지와 사모아 섬이다. 피지와 사모아 섬은 하와이에서 호주 동부의 핵심도시를 잇는 교통로이므로 계속 진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일본 육군은 남방군 10개 사단을 투입해서 싸운것은 무리하게 차출한 대가이다. 더 이상 지원해 줄 수 없다고 주장하며 대립한다. 실론섬과 호주를 공략하는 것은 자칫하면 육군의 무덤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한다.

 

호주 다윈에 상륙은 가능하지만 호주는 엄청나게 크고 도로는 발달되지 않았다. 북부 다윈에서 육로로 시드니, 브리즈번에 진격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일본 육군의 관심사는 중일전쟁을 빨리 해결하고 싶어했다.싶어 했다. 육군의 야망, 관동군으로 소련을 침공하고 싶어 했다. 해군 군령부와 해군 연합함대의 의견이 갈린다. 해군 군령부는 호주 침공작전에 피지, 사모아섬 장악으로 남서태평양 교통로를 차단하는데 방점을 두고 싶어 했다. 

 

해군연합함대는 영국 동양함대 격멸시키려면 실론섬을 공격해야되고 미 태평양함대를 격멸할 수 있는 미드웨이를 공격하고 하와이를 재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해군 군령부는 해군의 총사령부 컨트롤타워 역할을 하고 연합함대는 군령부 지휘를 받아야 하는 구조였다.  하지만 진주만 공격, 태평양전쟁을 하면서 연합함대의 규모와 권한이 커진다. 모든 영광을 가져간다.  연합함대가 커지다 보니 작전을 하는 것에 군령부와 대립을 하게 된다. 모든 일본 언론에 연합함대의 활약상이 연일 대서특필되고 있었다. 일본 해군의 중심이 연합함대가 되어 버렸다. 여론이 연함 함대 사령관 '야마토모 이소로쿠'를 칭송하고 있었다.

일본 해군 연합함대는 연합함대 사령관은 일왕 직속이었으나 작전은 군령부 총장, 군정은 해군대신의 지시를 받는 독특한 구조였다.

 

일본은 남방작전 이후 내분에 휩싸이고 있었다. 내분 속에서 연합함대의 의견대로 미드웨이로 진출하기로 한다. 하지만 일본 해군 군령부는 미드웨이 공격을 계속 지연시킨다.

이 시기 1942년 4월 18일 '둘리틀 공습'이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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