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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지식

첫 번째 승리, 미드웨이 해전

by 소시민스토리 2024. 2.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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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승리, 미드웨이 해전 

1942년 6월 4일 새벽 4시 15분, 미드웨이에서 출격한 미군 뇌격기는 일본 항공모함을 공격한다.

 

태평양전쟁, 미드웨이

 

태평양전쟁, 미드웨이

태평양전쟁, 미드웨이 1941년 루스벨트 대통령이 합동참모본부에 도쿄를 폭격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바로 도쿄 공습작전, 둘리틀 작전이다. 미국 반격의 작전, 둘리틀 공습 미국 반격의 작전, 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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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식 항모는 영일 동맹 시절 영국 항공모함 건조 기술을 들여왔기 때문에 격납고는 폐쇄식이다. 폐쇄식 격납고는 항공모함이 거친 바다를 항해할 때 날씨에 영향을 받지 않고 함재기 유지 관리에 유리하다. 일본항모의 굴뚝(연돌)은 옆에 있는 외현 굴뚝이다. 항공모함의 비행기가 이착륙하면서 수직 굴뚝에서 연기가 나면 소용돌이 '와류'를 형성해서 또는 연기 때문에 함재기 이, 착함이 방해될 수 있다고 해서 일본항모는 옆구리에 설치한다.  단점은 내부에서 폭발이 일어나거나 유증기가 발생 시 환기가 취약하다. 또한 수직연돌은 보일러 옆 내부공간을 넓게 활용할 수 있다. 하지만 옆구리에 있는 외현 연돌은 항공모함 내부 중앙을 가로지르게 되어

내부 공간을 많이 차지한다. 항공모함 옆 공간은 승무원 거주 공간이다. 매연으로 환기는 불가하고 결핵, 이질로 고생한다. 

 

반면 미군항모들은 커튼식 개폐장치의 개방형 격납고가 있었다. 연돌(굴뚝)이 함교 상부에 설치되어 있다. 

함재기를 띄우는 사출기 유압식 캐터펄트를 사용하여 투석기 원리처럼 압축공기와 유압장치를 이용해 함재기를 발사한다. 하부 갑판에서 캐터펄트를 이용해서 항공기를 사출할 수 있었다. 상부갑판에서 항공기를 운영하기 힘들 때는 하부 갑판에서 급한 대로 몇 대 항공기는 날릴 수 있었다. 항공모함 기술을 미국이 일본보다 앞서 있었다. 처음 미군 항공모함은 개별적으로 한 척씩 운용했다. 일본군 항모 기동부대가 진주만을 공격하자 충격을 받고 기동부대로 개편한다. 

 

 

미드웨이 1차 공격으로 일본 제로전투기가 출격할 때 미 해병대 항공대가 선제공격한다. F2A 버팔로, F4F 와일드캣이었다. 암호 해독으로 미국은 공격 시간대까지 알고 있었다. 

 

 

 

 

미드웨이 섬에 PBY 카탈리나 비행정(초계기) 27대를 배치하고 있었다. PBY 카탈리나는 정찰용으로 연료탱크 추가하면 최대 항속거리는 5,000km에 달한다. 암호 해독으로 일본군이 온다는 정보를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초계기를 띄어 감시하고 있었다. 1942년 6월 4일 오전 5시 30분 무렵 일본 기동함대를 발견한다. 

6월 4일 오전 6시 미 해군 항공대 출격, 1차 교전이 벌어진다.

 

일본의 예상과 달리 27대 미 전투기가 공격한다. F2A 버팔로는 2 선급으로 제로전투기보다 성능이 뒤떨어졌다. F4F 와일드캣은 방호력은 제로전투기보다 방호력만 좋았다. 1차 교전에서는 일본 제로전투기가 미군 전투기를 압도했다. 일본 폭격기가 미드웨이를 공격했는데 미드웨이 기지는 3인치 대공포로 방어하고 있었다.

비행장도 텅 비어 있었다. 일본 1차 공격대 20%가 손실을 입는다.

F2A 버팔로와 F4F 와일드캣은 일본함대 1차 공격대 대응용이었다. 2차 교전은 미 항공모함 주변에서 벌인 전투였다.  F2A 버팔로는 없었다. 미 항공모함에 최신예 항공기를 배치했는데 주력 함상 전투기 F4F 와일드캣, 급강하 폭격기 SBO 돈틀리스, 뇌격기 TBD 데베스테이드, 편제를 맞춰서 일본군 전투기 폭격기를 상대한다. 

 

급강하 폭격기 SBO 돈틀리스는 급강하 속도 제어하는 다이브 브레이크할 때 다이브 플랩에 구멍이 뚫려있어 급강하 시 속도제어에 유용했다. 미드웨이에서 혁격한 공을 세운다. 

뇌격기TBD 데베스테이드는 안에 어뢰를 탑재하고 있었다. 속도가 느렸다. 뇌격기가 항공모함을 공격하려면 고도를 낮춰서 수평으로 가야 된다. 항공모함을 호위하고 있던 일본 전투기들의 공격을 손쉽게 받아 가장 희생이 컸다. 뇌격기는 거의 전멸하고 만다. 뇌격기와 급강하 폭격기가 같이 출동하자 일본 요격기가 미군 뇌격기를 잡으러 간 사이 상공은 텅 비었다. 이때 급강하 폭격기가 상공에서 나타나 일본항공모함을 공격했다.

 

뇌격기가 많이 희생된것은 작전상 실패였다. 뇌격기는 최소한 전투기들의 엄호를 받아야 했는데 전투기가 엄호를 해주지 못하자 느린 뇌격기만 돌입해서 희생이 커졌다. 생존한 뇌격기 조종사들이 함대로 돌아와서 전투기 조종사와 한판 붙게 된다.  당시에는 항법장치, GPS가 없던 시절이기 때문에 목표물과 길을 찾는 것이 어려웠다. 뇌격기의 희생으로 얻어낸 승리라고 할 수 있다. 

 

미드웨이에서 일본군의 패배 원인은 너무나 많은 베테랑 조종사와 항공모함 베테랑 승무원을 잃었다는 것이다. 미드웨이 개전무렵에 불안요소는 진주마에서 미드웨이까지 참전한 일본 연합함대 제1항공함대는 계속해서 작전에 투입되고 있어 조정사 체력이 고갈상태였다. 일본 해군 파일럿은 5,000명이었는데 3,500명이 최전선에 일선에 있었다. 당시 일본 항공대의 방침은 전투에서 질적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숙련된 조종사가 항상 최일선에 있어야 됐다.  따라서 본토에서 훈련받는 훈련생들은 베테랑 조정사에게 훈련받을 기회가 없었다.

신참 훈련병도 일선에서 근무할 기회도 부족했다. 최소한의 전투만 할 수 있게 훈련만 받은 상태였다.

 

반면에 미국과 유럽은 베테랑 조정사 에이스들은 후방에서 교관으로 근무한다. 유능한 조교가 있어야 훌륭한 강군이 나온다는 것을 당연히 생각했다. 매뉴얼과 교범으로 전투기술을 배우는 것은 한계가 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노하우' 암묵지(暗默知)는 직접 가르쳐야 하는 영역이다. 미국과 유럽은 노하우 전수는 베테랑 교관에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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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항모 4척이 짧은 시간에 폭발한다. '데미지 컨트롤'능력의 차이가 있었다. 일본 항모들은 어뢰, 폭탄 교체로 일본 항모 격납고에는 인화물질이 가득해서 미 급강하 폭격기가 날린 폭탄이 격납고에서 폭발했기 때문에 유폭이 일어나서 연쇄 폭발과 화재가 일어났다. 걷잡을 수 없는 화염 속에서 결국 항공모함을 포기하고 탈출한다. 당시 일본 해군도 '데미지 컨트롤'의 중요성을 알고 각 항모마다 50여 명의 소화대책반을 배치한다. 

당시 일본 해군은 이산화탄소 소화기를 사용했다. 두루 화재에 사용하기에는 좋지만 함내 유류화재, 폭발물화재에는 효과가 뛰어나지 않았다.

 

미 해군은 포말 소화기를 배치했다. 포말 소화기는 화학 약재가 거품처럼 분사되면서 함내 유류화재, 폭발물 화재에 사용하기 적합했다.

일본도 이 사실을 알고 일본 최신예 항공모함 쇼카쿠, 즈이카쿠에만 포말 소화기를 배치했다.

아카기, 카가 항공모함에는 탑재하기 전에 해전이 벌어진 것이다. 

일본의 데미지 컨트롤팀은 소화대책반 전담 임무를 하는 팀만 임무를 한다. 

 

반면 미군은 미 항공모함이 폭격을 맞았을 때 부함장이 책임을 진다. 화재가 나면 부함장 책임하에 사고대책반은 물론 전투요원, 보조요원 등 가용할 수 있는 인력풀을 최대한 가동한다. 사고 나면 많은 인원으로 빠르게 대응할 수 있었다. 미군은 당시 초기형 레이다, CXAM레이다를 항공모함에 우선 배치했다. 탐지거리 약 80~100Km 정도 된다. 일본군이 온다는 것을 레이다로 빨리 파악할 수 있어 응급조치를 시작하여 연료 공급 차단, 소화기 대기, 폭탄을 치우고 대기하고 있던 항공기들은 다 이륙시킨다. 적이 오는 15~20분 사이에 철저하게 대비한다. 폭탄이 항공모함에 떨어지면 연쇄 폭발 사전 차단으로 피해가 대비하지 못했을 때보다 적어진다.

 

당시 일본은 레이다가 배치되기 시작했다. 레이다는 전함부터 배치시켰다. 당시 탐지거리는 100Km 정도였으므로 일본은 포탄이 제대로 떨어지는지 탐지하는 데 쓴다. 그래서 거포를 탑재한 전함에 먼저 설치한다. 

미국은 레이다에 잡힌 신호를 보여주는 오실로스코프였고 일본은 1942년 5월에 2호2형 레이더 시험 개시한다. 미군과 일본의 레이다 기술 활용 방법이 데미지 컨트롤 차이를 만들었다.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 해군은 강력한 일격을 맞았다. 미드웨이 해전은 일본에게는 첫 번째 패전이었고 미국 입장에서는 첫 번째 승리였다.

일본이 그토록 믿었던 신이 눈을 감았을까? 일본이 자랑하던 정규 항모 4척과 정예 항공대를 잃은 충격의 패전을 겪었지만 여전히 일본의 전력이 건재한 가운데 미국은 미드웨이 승리로 반격의 시간을 벌었다. 

 

태평양전쟁의 분수령이 될 반격의 시작

1942년 5~6월 일본군과 미 연합군의 상황 

 

여전히 일본군은 본인이 말한 방어선을 확보하고 있었다. 1차 세계대전 때 독일로부터 빼았았던 일본 연합함대 근거지 남양군도, 투르크 환초에서 내려가서 호주령 라바울을 함락시켜 17군 사령부와 해군기지, 비행장을 건설하여 요새화를 시킨 상황이다. 라바울 아래에 있는 호주 견제를 위해 일본이 노린 항공 요충지 포트 모르즈비를 공략하기 위한 작전으로 1942년 5월 3일 툴라기를 점령한다.

 

해상교통로로 유럽-아프리카-아시아 루트 요충지는 싱가포르지만 남미쪽에서 올 때는 태평양의 중간기착지가 필요했다. 따라서 이 지역 섬들은 미국, 영국, 독일의 각축장이 된다. 사모아는 독일, 미국, 영국이 나누어서 점령하다가 독일의 패전으로 미국과 영국이 점령한 상태였다. 만약 이 지역을 일본이 점령하면 호주가 위험해진다.  호주는 연합국에게 꼭 필요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호주는 동남아시아와 가깝게 위치해 있어 호주를 방어해야 미국이 태평양전쟁과 더불어서 호주와 함께 동남아시아에서 전쟁을 수행할 수 있었다. 이곳으로 일본이 점점 내려오고 있는 상황을 막아야 된다. 

호주 북부가 일본에게 공격당한다면 호주 핵심기지를 사용할 수 없다. 호주는 연합군의 핵심 기지이며 후방기지이기 때문에 중요한 곳이다.

 

 

미드웨이 해전의 패배를 기점으로 일본해군은 항공모함에 대한 신뢰가 사라졌다. 침몰할 수 있는 항공모함보다 섬이 중요하다고 판단한다.이때부터 '섬'항공기지 확보에 혈안이 된다. 섬은 항공전 수행을 위한 불침항모로서 의미가 부각된다. 1942년 6월은 승패의 전환점이라고 볼 수 있다. 1942년 7월 호주에서 약 2,000Km 떨어진 과달카날에 일본 비행장이 건설되기 시작한다. 뉴기니에서 과달카날은 약 900Km 떨어져 있다. 

과달카날을 점령하면 뉴기니 공격의 전초기지로 이용될 수 있다고 판단한다. 

당시 항공기들의 항속거리는 1,500~2,000km 정도였다. 따라서 작전 가능 거리는 반경 500~700Km 정도가 한계다. 피지와 사모아를 견제하려면 더 남쪽으로 나가야 하는데 결정적 위치가 보이는 곳이 과달카날이다. 지리적 위치와 해군 함선 보급 및 항공기지 건설이 가능한 규모로 적합했다.

 

미국입장에서도 과달카날을 점령해야 일본군 근거지 '라바울'을 견제할 수 있어 절대 물러설 수 없는 섬이었다. 모트 모르즈비와 함께 협공할 수 있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미군은 정찰기를 통해 일본군이 과달카날에 비행장을 짓는 것을 포착한다.

1942년 6월 미국, 태평양전쟁 반격 작전을 구상했다. 피지와 사모아 호주와의 교통로가 위협받고 있는 상황을 타개하고 솔로몬제도 진공을 해서 라바울까지 가기 위한 반격작전을 구상하게 된다. 이때 해군과 육군의 입장이 달랐다. 남서태평양 지역군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는 본인이 주도해서 가겠다고 주장한다. 미 함대 총사령관 어니스트 킹은 해군이 주도하겠다고 주장한다. 어니스트 킹은 1944년 12월 미 해군 원수로 진급한다. 성격이 괴팍하기로 유명하고 똑똑했다. 

미 육군과 해군의 갈등 사이에서 1942년 5월 일본군이 '툴라기'를 점령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이번에는 '툴라기 탈환'을 두고 3주 동안 싸운다. 

 

결국 합동참모본부가 중재한다. 남태평양해역군 사령부(SOPAC)를 구성한다. 합참 통제가 공식적 입장이지만 실제는 니미츠 제독의 통제를 받는다. 남태평양해역군(SOPAC)사령관으로 로버트 곰리가 임명된다.

일본의 과달카날 진격 소식이 들려오고 즉각 반격을 개시한다. 

 

 

과달카날 상륙 작전명은 망루작전 Operation Watchtower이다. 일본군의 비행장이 있는 타이보를 목표로 한다. 1942년 8월 7일 미 해병 1사단 11,000명이 과달카날에 무혈입성한다. 비행장을 건설하는 노무자는 대부분 조선사람이었다. 과달카날 주둔 일본군 설영대에 건설 노무자 2,700여 명 중에 조선인은 약 2,000명이었다.

소수의 일본군 경비병력 약 430명이 있었다. 미군 상륙 소식에 일본군은 다 버리고 도주했다. 

'이노우에 시게요시' 일본 해군 제4함대 사령관은 과달카날에 비행장을 건설하자고 주장한 인물이었다.

남서방면 사령관들은 과달카날은 미군이 절대 못 오는 지역이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해서 수비 병력을 배치하지 않았었다. 

 

비 해병대의 과달카날 비행장 접수는 일본군은 충격에 휩싸인다. 일본해군과 육군이 힘을 합쳐 탈환하려고 미군의 수송선부터 격침시키기 위해 교전을 벌인다. '사보섬 해전'이 시작되었다.

미국, 호주 연합군 함대는 툴라기와 과달카날 사이 사보섬 해역에 분산 배치되어 있었다.

1942년 8월 9일 새벽 1시 38분 일본군은 '한밤중의 기습'으로 연합군의 허를 찌른다. 연합군은 중순양함 4척이 격침되고 1,023명이 전사한다. '미 역사상 최악의 참패'를 당한다.

 

일본 수상함대의 비결

 

일본해군은 미드웨이 참패 이후에 항공모함을 투입할 여력이 없었고 라바울 근처에 있던 중순양함을 보낸다.

1942년 8월 7일 미카와 군이치 중장, 함대를 소집하여 중순양함 5척, 경순양함 2척, 구축함 1척을 출진한다.

급조부대의 고질적 난관이 발생한다. 복잡한 작전을 수행할 수 없었다. 일본해군 제8함대 사령관 미카와 군이치는 기함 '쵸카이'를 선두로 일렬로 가기로 한다. 밤에 야습을 하기로 하고 일렬로 접근해서 과달카날과 툴라기 관문 '사보섬' 남쪽으로 진격한다. 연합군 수송선단, 전함을 발견하자마자 산소 어뢰를 발사하고 빨리 사모섬을 돌아서 아침에 미 해군 항공대 출격 전에 철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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