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근동 신화와 물을 가른 예수
이스라엘의 야훼 하느님은 유일한 창조신이다. 이스라엘은 작고 약한 나라이고 비교적 후발주자이며 지정학적인 요충지에 자리 잡은 나라이다. 그 믿음은 굉장히 독특했다. 인류사에 어떤 무력이나 유명한 문학 작품이나 큰 건축 등으로 이름을 남기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독특한 믿음의 체계를 남겼다.
지금 그리스도교와 이슬람 그리고 유다교를 통해서 전 세계에 상당히 많은 인구가 믿음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다. 당시 작은 나라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독특한 믿음을 표현하기 위해서 주변 세계의 신화적 모티프를 비교적 많이 썼다. 주변 세계에서 질서의 신, 창조의 신은 물을 가르고 세상을 창조한다고 했는데 이스라엘도 '우리의 신도 그렇게 한다'라고 썼다. 하지만 이스라엘을 거기에 그치지는 않았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물 한가운데 궁창이 생겨
물과 물 사이를 갈라놓아라
하느님께서 이렇게 궁창을 만들어
궁창 아래에 있는 물과
궁창 위에 있는 물을 가르시자
그대로 되었다
하느님께서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셨다"
-창세기 1장 6절
물과 물을 가르셨다. 이것은 고대근동 신화와 거의 유사하다. 메소포타미아 질서의 신이 혼돈의 신을 반으로 갈라서 세상을 만든느데 야훼 하느님도 그렇게 만드셨다. 이것은 고대근동 신화의 모티프로 우리 창조신을 고백한 것이다라고 할 수 있다. 이스라엘은 이것으로 자신의 신이 비록 작은 나라의 신이고 외국에서는 안 믿는 신이지만 이스라엘의 신이 가장 큰 세상의 창조주라는 신학을 이야기한다.
구약성경을 앞에서부터 읽어나가면 창세기 제일 처음에 물을 갈랐는데 탈출기, 개신교에서는 출애굽기라고 말하는 책에서도 거의 첫 번째 물을 가른다. 그것이 이집트의 탈출 사건이다.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뻗었다
주님께서 밤새도록 거센 샛바람으로
바닷물을 밀어내시어 바다를 마른 땅으로 만드셨다
그리하여 바닷물이 갈라지자
이스라엘 자손들이 바다 한가운데로 마른 땅을 걸어 들어갔다
물은 그들 좌우에서 벽이 되어 주었다"
-탈출기 14장 21절
이집트 탈출 사건에서 10가지 재앙이 있고 10가지 재앙이 다 끝난 다음에 맏배(맏이)가 죽고 그래도 파라오가 마음을 계속 완고하게 가져서 탈출하는 백성들을 끝까지 쫓아가니까 갈대 바다에서 물이 드디어 갈라진다.
이집트 탈출 사건은 우주를 만든 사건이다. 새로운 질서가 나온 사건이다. 물을 가르고 새로운 질서를 만들었기 때문에 창조의 수준으로 격상되는 사건이다. 이집트 탈출 사건의 이전의 역사는 이후의 역사와 완전히 다른 것이다. 고대근동 신화의 눈으로 이것은 완전히 새로운 창조이다라고 이야기한다. 이집트 탈출 사건은 새로운 창조, 제2의 창조, 역사를 새롭게 창조한 사건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
고대근동 신화, 창조 신화의 모티프로 이 사건을 표현함으로써 자신들이 지닌 역사적 체험, 신앙의 체험이 단순히 인간들이 느끼는 인간사에 중요한 하나의 사건에 머무르지 않고 우주적 질서의 차원에서 새로운 창조 세계의 사건으로 고백된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의 신앙을 표현하기 위해서 주변의 신화적인 언어를 자주 쓴다.
"그것을 고대 히부리인들이 마치
다양한 신화론적 이야기를 쌓아 놓은
창고 같은 것을 지니고 있어서
그것으로부터 우주적 전투를 묘사하는 표상들을 끌어내서
구체적 역사에 적용하는 것 같다"
-맥컬리 R. 포스터
이스라엘 사람들은 역사적 사건을 겪으면 이 사건의 역사적 의미는 무엇일까 성찰하다가 옛날에 어떤 신이 누구를 물리친 사건과 같다고 이야기를 한다. 이 사건에 의미를 집어넣는다는 것이다. 이 의미를 집어넣는 언어는 무엇인가, 현대인들은 문학이나 철학의 언어로 의미를 표현한다. 그런데 고대근동 세계 사람들은 고대근동 신화의 언어로 그 의미를 표현했다는 것이다.
신화적 언어가 어떻게 구약성경에서 사용되었는지 살펴보면 이런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구약성경을 보면 창세기 1장에서 한번 물을 가르셨고 세상의 질서를 세웠다. 이집트 탈출 사건 때 또 한 번 물을 가르셨다. 이집트 탈출 사건은 세계의 질서가 새롭게 열리는 사건이다. 그런데 야훼 하느님이 여호수아기 3장에서 물을 한 번 또 가른다.
"드디어 궤를 멘 이들이 요르단에 다다랐다
수확기 내내 강 언덕까지 물이 차 있었는데
궤를 맨 사제들이 요르단강 물가에 발을 담그자
위에서 내려오던 물이 멈추어 섰다...
주님의 계약 궤를 멘 사제들이 요르단강 한복판
마른 땅에 움직이지 않고 서 있는 동안,
온 이스라엘이 마른 땅을 밟고 건너서
마침내 온 겨레가 다 건너간 것이다"
-여호수아기 3장 15~17절
사제들이 계약 궤를 메고 가는데 물이 딱 끊어져서 마치 이집트 탈출사건 때 물을 가른 것처럼 태초의 창조 때 물을 가른 것처럼, 이때도 물을 갈랐다는 것이다. 물이 멈췄고 그 사이에 백성들이 지나갔다는 것이다.
요르단강을 건너는 사건도 새로운 질서가 열리는 창조적 사건이다. 이 세 사건은 전부 역사의 한 사건이 아니라 '우주적 의미를 지닌 사건'이라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것은 그냥 사건이 아니라 역사의 한 사건이며 그것으로 인해서 우리가 사는 새로운 질서가 열리는 사건이었다.
새로운 질서가 열리는 사건이라고 의미하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신화적 언어를 통해서 알 수 있다.
구약성경에서 야훼 하느님의 창조적 권능을 표현하는 대표적 모티프가 혼돈을 가르는 것인데 구약성경에는 혼돈의 물을 꾸짖고 밟는 것도 많이 있다. 혼돈의 세력이 야훼 하느님에게 도전하면 하느님이 그것을 물리치는 모티프도 예언서에 많다. 구약성경은 '질서의 신이 물을 제압한다, 물을 이긴다'이런 모티프를 자주 사용함으로써 '우리 하느님의 권능이 혼돈을 이기고 질서를 잡고 계신다'는 이야기를 자주 하는 것이다.
고대근동 세계는 거대한 하나의 정신세계가 있고 이스라엘은 그 세계의 일원이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독특한 신앙을 표현하기 위해 그 언어를 차용했다. 그래서 고대근동 신화의 언어와 이스라엘 언어가 비슷하다.
그런데 그 내용은 조금씩 달라진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이 내용을 야훼 하느님에게만 쓰면서 이스라엘 안에서 독특하게 발전하는 게 있었다. 고대근동 신화가 신약성경 시대에도 그대로 다 살아 있다.
신약성경 시대의 예수님은 물론이고 예수님의 제자들이나 군중들도 이런 신화적 모티프를 다 알고 있었다.
이 사람들이 왜 이렇게 반응하는지를 알려면 '신화적 모티프를 알고 있으니 이 사람들이 이렇게 반응하는구나'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구절이 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하고 말씀하셨다
그때에 거센 돌풍이 일어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쳐서
물이 배에 거의 가득 차게 되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며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깨어나시어
바람을 꾸짖으시고 호수더러,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하시니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졌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마르코 복음서 4장 35~41절
혼돈의 세력이 지금 예수님과 제자들이 있는 곳을 침범하고 있다. 이것을 물리칠 세력은 창조주, 질서의 신 밖에 없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느님이 하시듯이 바람을 꾸짖었다. 바람이 물러났다.
제자들이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 서로 말하였다
"도대체 이 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마르코 복음서 4장 35~41절
물과 호수, 혼돈이 지금 침범하고 있다. 그러자 예수님은 어떤 해결책을 냈냐면 혼돈의 물을 꾸짖어서 물러가게 했다. 물을 꾸짖는 창조신의 권위를 행사했다. 예수님은 인간이 아니라 신이다. 그래서 다음 장면에서는 군중이 놀라는 것이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하느님, 옛날 구약성경에서 하셨듯이 물을 꾸짖어 주십시오, 그러면 물이 돌아갈 것입니다'하였다면 예수님도 인간이니 하느님한테 기도해서 하느님이 물리치셨구나'이렇게 사람들이 받아들였을 텐데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본인이 마치 하느님인 것처럼 그런 말을 해 버렸다.
그래서 군중들이 놀랐다. '이 사람이 누구지?'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는 사람은 하느님밖에 없는데, 이 사람이 신인가? 하며 놀랐다. 고대근동 신화를 이해하면 이 장면이 이해가 된다.
왜 제자들이 놀랐는지, 그냥 바람이 잠잠해져서 놀란 것뿐이 아니라 무슨 권위를 가지고 예수님은 이런 일을 하지? 해서 놀란 것이다.
신화의 언어를 잘 이해해야 한다. 예수님이 이때 하셨던 일, 그 옆에 있었던 제자,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를 들은 군중은 물론 이 이야기를 적은 복음서의 저자들, 이 복음서를 읽는 독자들까지도 맥락을 모두 다 알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이 신적인 권위를 행사했구나'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위치에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독성죄로 고발돼야 된다. 왜냐하면 이것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예수님이 하느님을 사칭하네'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만약 하느님이 '제발 혼돈을 꾸짖어 주십시오'이렇게 말했다면 안전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예수님은 본인이 신이라 생각해서 그런 행동을 하셨다. 이 점이 매우 독특하다. 그리고 이 점을 이해해야 복음서 앞뒤의 맥락을 이해할 수 있다.
마태오 복음서 14장을 보게 되면 예수님이 호수를 걸은 적이 있었다. 예수님께서 호수를 걸으시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유령이라고 하며 놀라워했다. 베드로도 놀랐다. 배안에 있던 사람들은 예수님이 물을 밟는 것을 보고 '스승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라고 고백을 한다.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하느님의 지상 대리자이며 여기 계신 하느님이라는 뜻이다. 물을 밟고 물을 통제하는 사람은 창조주뿐이다. 고대근동 신화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당연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데 예수님이 호수를 밟았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 신이시구나'이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구약성경에서 야훼의 창조적 권능을 표현하는 모티프, 혼돈의 물을 가르고 혼돈의 물을 꾸짖고, 밟고 통제하고 하는 모든 것이 신약성경에는 예수님이 한다.
구약과 신약을 신화의 눈으로 보는 사람들은 '예수님은 하느님이시구나, 인간이 아니네, 보통의 인간이 하는 것과는 다른 권위를 행사하고 있네' 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다.
고대근동 신화로 신화의 모티프를 연구해서 그들이 갖고 있는 의미의 세계를 이해한다면 고대근동 세계에서 나온 문헌이 구약성경이고 신약성경도 사실은 고대근동 세계의 강한 영향 아래에서 나온 문헌이다. 그래서 이 문헌에 어떤 의미가 쓰여 있는지를 조금 더 깊이 알 수 있다.
다음시간에 이어집니다.
주원준의 <성경과 고대의 신화>를 공부하고 정리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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