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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지식

적벽대전과 주유

by 소시민스토리 2024. 6.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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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벽대전과 주유 

"큰 강 동으로 흐르며 천고의 풍류 인물 다 쓸어 가버렸네

옛 보루 서편은 지금도 사람들이 일컫는 삼국시대 주유의 적벽 싸움터

푸른 관건 쓰고 깃털부채 흔들며 웃고 이야기하는 사이 

조조의 백만 대군은 재로 변하여 연기와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네"

 

소설 삼국지의 적벽대전에서는 제갈량이 주역이다. 동남풍도 불고 화살도 10만 개나 모으는 등 제갈량이 여러 가지 일을 한다. 주유는 조연역할을 한다. 

하지만 실제 역사 속에서는 적벽대전을 이끌었던 인물은 주유였다.

 

 

동오의 명장 주유, 중국 호북성 적벽시에는 주유의 조각상이 있다. 높이가 9m 화강암으로 된 조각상이다.

삼국지 10대 미남 중에 탑 3가 강동에 모두 있다. 첫째가 손책이고 둘째가 주유, 셋째가 육손이다. 

손책은 꽃미남형이었고 육손은 신장이 8척 키에 얼굴이 아주 잘생겨서 주유와 더불어 강동이 낳은 한 쌍의 옥구슬이라고 했다. 주유 역시 호리호리한 아주 큰 키에 용모가 수려했다.

 

뿐만 아니라 음률에 정통했다. 누군가 노래를 조금만 잘못 불러도 곧바로 틀린 부분을 지적했다. 기록에는 

그 당시 여인들은 주유의 관심을 끌고자 일부러 비파 줄을 틀리게 튕기곤 했다고 한다. 주유와 손책은 형제 이상으로 우정을 나눈 사이였다. 

 

손책이 먼저 결혼해서 처제를 소개했다. 손책이 먼저 강동의 교씨 집안 큰딸 대교와 결혼했고 작은 딸 소교는 주유와 결혼했다. 손씨 자매는 굉장한 미인이었다. 손책과 주유는 동서지간이 되었다. 

주유 고향은 안휘성 여강 서현이다. 손책의 아버지 손견은 중원에 가서 동탁과 전쟁을 하고 있던 때였다. 주유는 자기 마을에 온 손책을 성심성의껏 도와줬다고 한다. 주유는 손책을 따라 강동 정벌에 나섰다. 무수한 전투를 치르고 전투를 겪으면서 동오 정권의 기초를 다졌다. 손책이 죽고 난 뒤 손권에게 정권이 이양됐다.

 

그 시점에서는 동오는 아직까지 국가의 개념이 없었다. 국가 형태가 아직 잡히지 않았고 군신관계 개념이 없었다. 손권의 나이는 18살로 세상을 경영하기에는 아주 어린 나이였다. 게다가 방금 평정한 강동육군은 민심이 아직 불안정했다. 이때 주유는 강북 대족大族이었다. 손책의 최고 심복이었다. 강동의 정권을 세우는 데 있어서 손책과 함께 공동 창업자였다. 독자적인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손책은 죽으면서 주유에게 손권을 잘 보살펴 달라고 말했다. 이때 주유가 엉뚱한 야심을 품었다면 손권은 자리에 오르지도 못했을 수도 있었다. 

 

 

손책의 장례식을 치르면서 '손책이 죽었지만 나라를 바로 세워야 하니까 손권 그대가 군주의 자리에 오르시오'하며 도와줬다. 손권의 정권 수립에 주유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손권은 주유를 완전히 형으로 모시고 물심양면으로 떠받들고 형 대접을 한다. 손권이 주유를 얼마나 높이 쳤는지는 손권이 육손에게 보낸 서찰에서 잘 나타난다.

손권이 동오의 대도독 3명의 능력을 품평하는 구절이 있다. 동오의 대도독 3명은 주유, 노숙, 여몽이다.

 

"세명 가운데 주유의 능력이 최고다,적진 앞에서 아주 용감하고 민첩했다, 전술과 전략이 아주 뛰어났다,  여몽도 책략이 뛰어나지만 주유보다는 한수 아래다"라고 손권이 평가했다. 

 

 

수많은 전투에 참여했고 수많은 승리를 했다. 적벽대전에서의 승리는 천고에 회자되는 명승부였다.

조조가 강력한 원소를 멸망시키고 북방을 통일하고 난 뒤 남진을 강행한다. 남진하면서 순식간에 형주를 삼켜버렸다. 손권에게 선전포고를 했다.

"내가 수군 80만 명을 데리고 왔소, 그대와 오나라에서 결전하기를 원하오"

 

동오는 풍전등화 앞에 서게 됐다. 주유는 냉정히 분석하고 충분히 승산이 있다는 사실을 알린다. 손권의 항전 결심을 끌어낸다. 주유는 분석을 했다. '조조의 후방에는 관중 군벌들이 아직 살아있고 그들이 언제 쳐들어올지 모른다, 조조는 기병전에는 아주 명수지만 수상전은 동오가 훨씬 낫다, 북방 사람들이 남방에 왔으니 환경에 변화가 생겨 질병이 발생할 것이다, 조조가 평정한 800리 전선에서 군수품 공급에 차질이 생길 것이다, 장거리 원정으로 인해 조조군은 피로가 가중되어 있다, 조조가 차지한 형주의 백성들은 조조에게 완전히 복종하지 않고 있다' 이런 치명적인 결점이 있다고 분석한다. 

 

강릉에서 조조군이 배를 타고 내려와서 적벽에서 만난다. 손권과 유비의 연합군은 주유가 지휘한다. 조조의 군대는 장강의 북쪽인 오림에 진을 치고 정박을 한다. 장강에 띄워놓은 수많은 수백 척의 배가 있었다. 그 배에 전부 쇠고리를 가지고 연결했다. 연결해서 북방에서 온 병사들이 뱃멀미를 하니 연결시켜 놓았다.

 

주유 측에서 이 사실을 알고 황개가 사항계를  낸다. "내가 일부러 조조 측에 항복하는 척을 하겠다" 하면서 배가 조조 측 오림 쪽으로 올라갔다. 조조 측은 황개가 항복하러 온다고 좋아하면서 바라보고 있었다. 조조 측 참모들이 살펴보고 있다가 배의 아랫부분이 물에 가라앉아서 와야 하는데 배가 완전 둥둥 떠서 오는 것을 보았다. 조조 측에서 항복하러 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불을 붙일 염초, 화목들이 가득 실린 배였으니 배가 가볍게 물에 흘러갔다.

 

그와 동시에 동오 측에서는 불을 붙였다. 동시에 동남풍이 불어준다. 여러 불붙은 배들은 오림 쪽으로 와서 덮쳤다. 조조의 쇠갈고리로 묶어 놨던 배들은 한꺼번에 불이 붙어 조조의 배들은 불이 붙어서 장강 전체가 완전 불바다가 되어버린다. 조조의 배들은 모두 재가 되어 사라져버렸다. 

제갈량의 동남품은 승리의 조건 중에 하나였다. 소설에는 제갈량이 천지신명에게 빌어서 겨울에 불지 않는 동남풍을 불게 했다고 한다. 만당대 시인 두목은 적벽시에서 표현했다.

 

"만약 동남풍이 주유의 편에서 불어주지 않았더라면 

강동의 미인 대교, 소교는 조조의 궁전에 갇히고 말았을 것이다"

-두목의 적벽시 中

 

동남풍의 과학적 근거를 밝힌 사람이 있다. 온주사범대학교 장징롱 교수가 <적벽지전연구>에서 밝혔다.

적벽대전은 서기 208년 음력 12월에 겨울에 발생했다. 그 지역에는 대낮에는 기류가 바다에서 육지로 불고 야간에는 기류가 육지에서 바다로 분다. 동남품이 된다. 이런 바람의 방향이 24시간 동안 규칙적으로 두 번 바뀐다. 주유는 강동을 정벌하면서 많은 작전을 했고 많은 경험을 쌓았다. 그 일대 기후 특성을 충분히 알고 이용한 것이다. 조조의 북방군은 몰랐던 것이다. 그래서 5만 군으로 20만이 넘는 조조군을 깨뜨릴 수 있었다. 

역사상으로도 약한 병력이 강한 병력을 무찌른 드문 전쟁이었다. 

 

주유의 계략으로 삼국지 최대의 전투 적벽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주유는 제갈량의 조연이 아니었다. 소설 삼국지에서는 제갈량을 주역으로 하면서 주유보다 훨씬 빛나게 만들었다. 

 

조조는 왕랑에게 주유는 어떤 인물이냐고 물었다. "강북의 호걸이자 손책 집단의 핵심 인물이다."

유비도 주유에 대한 평가를 했다. "주유는 문무를 겸비한 인물이고 그의 책략은 만인 중에서 뛰어나다"

손권은 말했다. "왕을 도울만한 재능이 있다"

주유는 모두에게 칭찬받는 뛰어난 군사가였다. 

 

폭군이 된 손권

 

폭군이 된 손권

폭군이 된 손권손권은 현명한 인재를  적재적소에 임용한 인물이었다. 손책은 운명할 때 이야기 한다."군사들을 이끌고 동서남북을 다니면서 적들과 싸워서 영토를 확장하는 데는 내가 너보다

bringbacon.tistory.com

 

삼국지는 이어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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