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동구리무, 한국화장품 100년 역사
동네마다 북소리를 요란하게 내며 온 동네 아이들의 시선을 집중시켰던 추억의 동동구리무 장수가 있었다.
화장품 샘플을 잔뜩주며 화장품을 팔았던 80년대 방문 판매원까지 한국화장품은 오늘날까지 100년의 역사를 가진다.
동동구리무(동동구루무)는 1950~60년대 여성들의 대세화장품이었다. '동동구리무'라고 이름을 불은 이유는 그 당시 화장품을 파는 일명 '동동구리무 장수'가 북을 동동 치면서 팔았다고 해서 '동동' 붙여진 이름이다.
'구리모'는 '크림'의 일본식 발음이다. 합쳐져서 '동동구리모'가 됐다.
동동구리무의 판매 방식은 소비자가 빈 통을 가져오면 원하는 대로 퍼주던 방식이었다.
얼마만큼을 줄 것이냐는 동동구리모 장수 마음이었다.
1950~1960년도에는 화장품 기술이 발전하지 못했고 화장품 장수들이 화장품을 직접 만들어서 판매했다.
동동구리모 만드는 방법은 우유에 쌀가루, 옥수수가루 찹쌀가루를 넣어서 삮여서 만든다. 화학적인 성분이 들어가지 않는다. 주변의 단순한 재료로 만들었던 영양크림이었다.
한국의 최초의 화장품은 1916년도에 만들어진 박가분(朴家粉)이었다. 1916년 박 씨 성이 만든 분이라 해서 박가분이었다.
미백 효과가 뛰어나서 백옥같은 피부가 된다고 입소문이 났다. 박가분이 유행을 타자 '서가분', '조가분' 등 유사품도 등장한다. 여기에 일본에서 물 건너온 '구라부백분'도 잘 나갔다.
당시 3대 화장품은 박가분, 조가분, 서가분이었고 그중에서 박가분이 제일 압도적이었다. 귀부인이 쓰는 화장품으로 알려져서 당시 박가분 하나 못사주는 남편은 무능한 남자 다는 말이 나올 지경이었다.
박가분의 인기는 20년 만에 떨어진다. 분을 만드는 재료에 문제가 생긴것이었다. 화장품에는 절대 사용하면 안 되는 중금속, 납이 들어있었다. 당시 박가분을 쓰던 여성들 사이에 점점 이상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피부가 푸르게 괴사 하거나 볼에 경련이 일어나거나 구토를 하기도 했다. 심지어 일부는 실의에 빠져 자살을 시도하거나 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런 사건이 이어지지 박가분은 '살을 파먹는 가루다'는 소문이 났고 결국 20년 만에 자진 폐업하였다. 이 모든 부작용의 원인이 납중독 증세였다는 것으로 밝혀진다.
박가분에 납가루를 넣어서 화장이 잘 먹고 피부도 뽀얗고 하얗게 보이도록 만들었는데 당시 이런식으로 만든 미백 화장품이 수많은 납중독을 가져오게 되었다. 잘못 만든 미백 화장품이 수많은 납 중독자를 양산하였다.
이 사건은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줬고 이후 화장품 광고에는 '절대 납이 들어 있지 않았어요'라는 문구가 필수로 들어갔다고 한다.
국내 화장품의 신뢰가 뚝 떨어졌다. 1950~60년대 미국 헐리우드 영화가 한국에 개봉되기 시작한다. '오드리 헵번', '엘리자베스 테일러' 등 너무나 아름다운 서양 미인들이 동경의 대상이 되었고 이러한 관심은 이들이 사용하는 화장품으로 건너갔고 서양 미인이 쓰는 '외제 화장품' 인기가 급증했다.
1960년대까지 국내 산업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미제, 일제, 블란서제 등 외래품을 단속했다. 1961년에는 특정외래품 판매 금지법으로 법으로도 금지를 했다. 과일, 과자, 양담배, 양주 등이 수입 금지되었고 외제화장품도 포함되었다.
하지만 아름다워지고 싶은 여성들의 욕구를 막을 수는 없었다. 단속을 하자 몰래 밀수해서 화장품이 시장에 나오게 된다. 심지어 당시 여배우들이 몰래 외래 화장품을 밀수하다가 경찰에 붙잡혀 신문 1면에 실리기도 했다. 너무나 인기가 높았지만 수입이 어려워지자 외제 화장품 위조품이 속출하기 시작했다.
정부는 심각함을 느끼고 특단의 조치를 취한다. 전국에서 외제 화장품 화형식을 했다.
1960년대 초 밀수하다 적발된 외제 화장품을 시민들이 보는 앞에서 소각한다. 밀수근절 운동으로 화장품뿐만 아니라 양담배, 미제껌 등 많은 미제품을 불태웠다. 서울뿐만 아니라 전국 곳곳에서 소각행사가 이루어졌다.
정기적인 소각과 단속을 해도 외제품 사용은 완전히 막는 것은 불가능했다. 결국 1982년 특정외래품 판매금지법은 폐지된다.
당시 화장품 시장을 주름잡는 상징적인 인물이 있었다. 화장품 방문 판매원들이다. 가방과 유니폼을 입고 집집마다 벨을 누르며 화장품을 판매하던 시절이었다. 거실에 화장품 펼쳐놓고 화장품 설명을 하며 판매하기도 하고 누우면 얼굴 팩을 해주기도 하면서 고객 유치를 했다. 우수고객에게는 샘플도 더 주곤 했다. 마을마다 마당발 아주머니(반장 아주머니)가 있었는데 그 아줌마를 공략하면 다른 고객도 유치해 주고 한 집에서 다 모여서 화장품을 팔기도 했다. 나중에 슬쩍 마당발 아줌마에게 샘플을 몇 개 더 챙겨주기도 했다. 같이 밥을 해서 먹기도 했고 오히려 방문판매원을 기다리기도 했다. 같이 모여 시댁, 남편 흉도 보고 세상 사는 이야기도 하고 하면서 주부들이 살림만 하다가 즐겁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방문 판매원은 암묵적으로 예쁘고 날씨해야 했다. 그래야 화장품을 더 많이 팔수 있었다.
80년대 중반까지 우리나라 화장품 판매 90%이상이 방문판매였다. 점점 화장품을 구입할 수 있는 곳, 인터넷, 홈쇼핑, 매장 등이 다양해지면서 방문판매는 거의 없어졌다.
한국 화장품의 역사 중 1980년대 등장한 칼라텔레비젼 때문에 화장품 인기가 폭발한다.
1980년 12월 1일날 칼라텔레비전 첫 방송을 했다. 이전 로션, 크림 외에는 흑백텔레비전에서는 보지 못했던
립스틱, 아이새도, 볼연지 등 색조화장품 시대가 활짝 열린다.
화장품 업계의 대 반등이 시작된다. 컬러 텔레비전 영향으로 화장품 시장은 계속 30~40%가량 성장한다.
당시 럭키화장품에서 광고한 '드봉'은 소피마르소를 광고 모델로 기용하면서 제품도 인기를 끌었다.
당시 최고의 스타는 모두 화장품 광고를 찍었다. 당시 청춘스타 '임예진, 이미숙, 최명길, 금보라 등 최고의 피부 미인 타이틀을 두고 경쟁을 벌이기도 했다. 최고의 인기는 '컴퓨터 미인'이라고 칭송을 받았던 배우 황신혜였다. 피부가 탱탱하고 주름 없는 조각 미인으로 주목받으면서 황신혜가 광고한 에센스도 불티나게 팔렸다. 1980년대 초반 배우 원미경부터 1980년대 후반 채시라, 김희애 등이 인기 화장품 모델로 각광을 받았다. 화장품 회사들이 스타의 이미지를 브랜드 콘셉트로 활용하기 시작하면서 화장품을 팔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화장품 가격이 비쌌고 화장품을 한 번 사면 알뜰살뜰 아껴서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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