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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지식

필리핀해 해전 서막

by 소시민스토리 2024. 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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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사이판 공격 

1944년 3월 30일 미 해군의 팔라우 대공습으로 팔라우 일본군은 초토화되었고 일본 연합함대 참모장 '후쿠도메 시게루'는 필리핀으로 비행기를 타고 퇴각하다가 폭풍우를 만나 불시착하였고 필리핀 게릴라에게 잡혔다. 

 

트루크 환초 대공습, 필리핀 게릴라 부대

 

트루크 환초 대공습, 필리핀 게릴라 부대

트루크 환초 대공습, 필리핀 게릴라 부대 타라와 전투는 길버트, 마셜 전역에 해당하며 트루크 환초 목전까지 도달한다. 일본은 연합함대와 요격대를 가세하여 마셜제도에서 결전을 치르기로

bringbacon.tistory.com

 

팔라우 대공습으로 일본 연함함대 수뇌부 탑승기가 추락사고가 발생하자 악몽이 떠오른다. 야마모토 이소로쿠 일본 연합함대 전 사령장관이 미국의 복수 작전으로 격추당했던 사건, 갑(甲) 사건과 비슷하다.

이번 사건은 을(乙)사건으로 명명한다. 일본 해군 군령부는 대대적인 수색작전을 지시한다.

일본 입장에서 행방불명된 후쿠도메 참모장, 고가 사령장관을 찾아야 하고 비행기에 있던 일본 해군 기밀서류를 찾아야 했다. 기밀서류는 新Z작전 문서였다. 일본 해군 군령부는 필리핀 주도 제14방면군에 수색명령을 내린다. 미군은 수색 명령 암호 전문을 감청한다. 일본보다 먼저 찾기 위해 미군 역시 필리핀 현지 게릴라와 연락한다. 일본은 세부섬 수색 끝에 추락 비행기 잔해가 발견하고 게릴라 부대로 넘겨진 생존자 행방을 파악한다.

 

이곳의 게릴라부대는 제임스 M.커싱 미 극동군 (육군)중령에 의해 통제가 되고 있었다. 필리핀에서 '은 광산' 사업하던 집안 출신으로 미 극동군 공병대 중령으로 복무하고 있었다.

세부섬의 일본군에게 '커싱 게릴라부대'는 예전부터 눈엣가시였다. 이 기회에 없애버리려 상부로부터 병력을 지원받고 커싱 게릴라부대를 포위 공격한다. 1944년 4월 10일~11일 아침까지 이어진 혹독한 토벌전으로 커싱은 백기를 들고 포로교환하자고 한다. 기존의 잡혀간 게릴라 부대원들과 일본군인들을 맞교환하자고 한다.

커싱 중령은 포로 중에 일본 연합함대 참모장이 있는 줄은 몰랐다. 

 

포로 맞교환이 성사된다. 1944년 4월 11일 오전 11시 후쿠도메 참모장 일행이 석방된다. 곧장 세부를 통해서 도쿄로 압송되어 조사를 받는다. 乙사건 진상조사가 시작되는데 살아 돌아왔다는 것에 대해 수치심을 느끼게 한다. 당시 일본군 문화는 포로는 활복해야 한다. 포로가 되는 것을 수치로 여긴다. 후쿠도메 시게루는 비정규군에게 납치당한 것이라 변명한다. 사건의 전모가 그대로 알려지면 수치가 될 수 있어 해군 군령부는 납치당했다고 결론 내린다. 

 

 

하지만 新Z작전 기밀 서류는 완전히 파괴되지 못했다. 기름종이로 방수, 포장해서 슈트케이스에 담아두었는데 비행기가 불시착할 때 물에 둥둥떠서 바닷가로 밀려갔다.

세부섬의 원주민이 기밀서류를 주워서 물제 젖은 기밀서류를 잘 말려다가 일본군이 준다는 현상금에 잠시 망설이다가 커싱 중령의 게릴라부대에 넘긴다.

일본군은 기밀서류에 현상금 5만 페소 (약 25,000달러)를 걸었다.

 

커싱 중령은 포로 맞교환 후쿠도메 참모장 석방 다음날 기밀서류를 받는다. 기밀서류와 전령을 후방으로 가기 위해 일본군 포위망을 뚫고 비사야스 제도 안전지대 네그로스 섬 해안가로 이동한다. 

남중국해에 있던 미 잠수함 '크러밸리'가 급파되어 1944년 5월 11일 기밀서류를 픽업하여 잠수함이지만 바다 위로 부상해 질주하여 호주로 직행한다.

호주의 고속경비정이 미리 대기하고 있다가 다윈연안에서 기밀서류를 인계한다.

미 남서태평양지역군 브리즈번 사령부로 급하게 보내진다. 

1944년 5월 19일 서류 입수 37일 만에 브리즈번 사령부에 기밀서류가 도착한다. 일본어를 밤새 번역하여 新Z 작전의 전모가 낱낱이 공개된다. 

1944년 5월 23일 新Z작전 번역본 초안이 완성된다. 1944년 5월 23~28일 마셜, 맥아더 및 해군 지휘부에 배포된다.

 

미군은 번역본에 원본 복사본까지 챙겨두고 원본은 다시 제자리로 보낸다. 처음 발견된 원래 장소로 보내 물 위에 둥둥 띄워놓는다.  결국 일본군이 가방을 습득하고 안심한다.

일본군은 新Z작전을 아호작전으로 이름을 바꾼다. 아호작전은 마리아나 제도 방면으로 미 해군 주력을 유인해서 항모결전을 펼치겠다는 것이고 1944년 4월 일본 해군 작전 입안을 해서 1944년 5월 3일 대본영에서 작전 발령하게 된다. 

1944년 초반 일본의 상황은 절대 국방권이 무너지고 있는 상황이다. 미국은 B-29 슈퍼포트리스 실전 배치 중이고 도조 히데키 총리도 알고 있었다. 패전의 그림자가 다가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불안한 현실 인식을 누구와도 공유하지 않는다.

 

미군의 해상 봉쇄가 본격적으로 개시 되고 전력폭격기의 위협이 가시화되는 상황이다. 해볼 만한 군사적 조치는 전략폭격의 위협을 제거하는 것이다. 1944년 초반 대본영은 3가지 대작전 입안, 결정한다.

1944년 대본영의 첫 번째 작전은 임팔작전이다. 두 번째 작전은 중일전쟁 최후의 대공세 대륙타통(통타)작전으로 미군이 사용하는 비행기지 제거, 점령하는 것이다. 세 번째 작전은 新Z작전이다. 첫 번째 두 번째는 육군이 작전하고 세 번째는 일본 해군이 한다. 히로히토 일왕은 新Z작전은 절대 국방권을 지켜내는 유일한 작전이라 기대한다. 사이판을 사수해 전략폭격의 위협을 제거하고 함대 결전으로 미군에 타격을 주어 전쟁을 유리하게 끝낼 수 있다는 희망 계획이었다. 히로히토 일왕은 그동안 전쟁 패배로 인한 스트레스로 우울증과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었다가 희망 계획을 듣고 우울증에서 극복되어 적극적으로 해군에게 지시한다.

 

1944년 6월 11일 미국이 사이판 공격을 개시한다.

하늘에서 시작된 사전폭격 일본군 비행장을 쑥대밭으로 만들며  2일 넘게 이어진다. 1,100의 함재기 공습으로 제공권을 확보하고 1944년 6월 13~14일 일본군의 해안 방어시설을 향한 미 전함, 순양함의 함포 사격이 개시된다.  그러나 사전폭격과 포격은 서막에 불과했다.

 

 

일본 입장에서 사이판은 절대 국방권의 최전선으로 중요성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만주에 있던 전차부대를 배치한다.1944년 3월 사이판으로 전속 배치된 제9전차연대 주력은 97식 전차 개량형 31대, 95식 경전차 13대

배치시켰다. 1944년 6월 15일 미군은 사이판 상륙을 개시한다. 미군에게 사이판은  B-29기착지로 중요했다. 3개 사단 약 7만 1,000명의 병력을 투입한다. 미군 상륙 이튿날 6월 16일 밤 미군이 확보한 해안 교두보를 박살 내려고 만주에서 급파된 제9전차 연대가 야간 습격을 감행한다.

 

 

6월 17일 새벽 3시 30분경 급작스러운 습격에 처한 미 27사단은 오로지 보병만으로 일본군 전차를 맞이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M1A1 2.36인치 바주카포가 있었고 침착하게 대응한다. 기세 좋게 일본군 전차들은 돌진하지만 30여 대의 선도부대를 미군은 바주카포로 공격한다. 일본 전차부대는 30여 대는 전멸한다. 그날 밤까지 일본군 50여 대의 전차부대가 전멸한다. 보병에게 전차 50대가 격퇴된 것이다. 

 

 

사이판전투에서 일본군 수비병력은 약 44,000명이며 일본군 포로는 약 2,300명으로 포로비율은 5%였다. 이전까지 일본군 포로는 병력의 약 1%였다. 미국의 적극적인 선전 효과가 있었고 이 시기에 와서 일본군 내에서 변화가 생겼다는 것을 의미하고 전투력 저하가 있었을 것이다. 또한 조선, 중국등에서 징집을 많이 했다. 전쟁 후반에서 종전 즈음 일본군 포로를 심문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식민통치하에 한국과 난징, 대만인 등이 있었다. 

일본군 식민지에서 징집된 군인들이 늘어나면서 포로가 증가한 것일 수 있다. 실제 타라와 전투 당시 한국인 포로가 있었다. 

 

사이판은 미군의 잠수함 기지가 된다. 1944년 7월 미 해군 사이판 기지를 건설한다. 일본이 드나드는 모든 바다에 미 잠수함이 활개를 치게 된다. 일본의 경제는 점점 말라간다.

※만세절벽은 사실상 전투에서 패한 1944년 7월 9일, 사이판에 거주하던 민간인 약 5천 명이 뛰어내린 절벽이다.

사이판 전투가 끝나고 나서 후쿠도메 시게루는 사이판을 잃었을 때 마지막 기회가 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이야기 한다.

 

미군도 1만여 명 부상, 약 3,400명이 전사했다. 사이판 상륙부대 미 해병대 2개 사단과 육군 27사단이었다. 사이판 공격에  좌, 우익은 해병대가 맡고 중앙은 육군이 맡았다. 사이판 상륙부대 전술 지휘는 미 해병대 제5상륙군단장 홀랜드 스미스였다. 양쪽 날개를 맡은 해병대 피해가 너무 컸다. 가운데 진격하는 육군 진격속도가 너무 느려서라고 판단한다. 미 육군 제27보병사단장 랄프 스미스를 비난하면서 해임시킨다.  사상 초유의 사건이다. 해임 명령서에 레이먼드 스푸루언스 미 해군 제5함대 사령관이 최종 사인을 했는데 비난은 홀랜드 스미스가 한 몸에 받는다.  이때 로버트 리처드슨 미 태평양해역군 육군 사령관은 격노하며 악담을 퍼붓는다.

사이판 함락 후 찾아와 직접 만나기 까지 한다. 미 육군참모차장이 중제를 하면서 앞으로 작전에서 홀랜드 스미스는 육군 지휘를 배제시킨다. 

육군을 지지하는 언론이 보도되면서 홀랜드 스미스는 비난을 받는다. 여기에 더글라스 맥아더까지 가세하여 해군을 비난한다. 해병대를 지지하는 언론까지 합세하여 육군이 못 싸워서 벌어진 일이라 비난한다. 정치적인 문제로 비화되고 1948년 전후에도 다시 옥신각신한다.

 

1944년 7월 9일 오후 미 해군은 사이판 점령을 발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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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해 해전 서막

 

바다에서 1944년 6월에 필리핀 해전이 시작된다. 전시 대량생산체제 가동으로 미군은 막강해진다.

미 해군은 항공모함 15척, 전함 7척, 미 해군 항공기 동원 956대이었고 일본 해군은 항모 9척, 전함 5척, 일본군 항공기 동원 750여 대를 동원한다. 

필리핀 해전은 일본 해군의 홈그라운드 해역이었기 때문에 불침항모 필리핀, 괌의 육상 항공기지에서 출격하는 부대까지 합세하면 일본 해군은  '승부를 내 볼 수 있겠다' 판단한다. 

일본 연합함대 제1기동함대가 등장한다. 항모 4척을 잃은 미드웨이 해전 이후 제1기동함대를 폐지시키고 남은 항모는 모두 제3함대 소속으로 편성한다. 새로 건조한 항모들과 새로 보충한 항공대를 다 모아서 제1기동함대를 부활시켜서 필리핀해 해전에 투입한다.

 

 

일본 해군이 자랑하는 새로운 항공모함 신형항모 '다이호'가 투입된다. 기존 항모 즈이카쿠, 쇼카쿠까지 정규 항모 3척, 경항모 보조항모 6척이 합쳐져서 외형상으로는 미드웨이 해전을 능가하는 위용을 갖춘다. 

 

일본 제1기동함대 사령장관은  항공주병론자로 유명한 '오자와 지사부로'가 지휘관을 맡는다.

미드웨이 해전 때 제1항공대함대 사령장관 '나구모 주이치'는 중부태평양방면함대 사령관으로 사이판 전투에 투입된다. 사이판 전투에서 패하자 할복 자살한다.

'오자와  지사부로'는 어뢰를 능하게 쓰는 수뢰전대 출신이다. 일본 1930년 대 항모 기동부대가 등장하여 오자와 지사부로는 제1항공전대를 지휘하며 기동부대 육성을 한다. 전함 중심에서 항모 중심으로 거듭나야 된다고 생각한다. 1941년 12월 10일 영국 전함 프린스 오브 웨일스를 격침시킨 말레이 해전의 주역이 바로 오자와의 남견함대이다. 

남방작전이 성공하며 인도양으로 진출했던 일본 연합함대를 지휘하여 실론섬 해전에서 영국 동인도함대를 타격한다. 

그런데도 미드웨이 공격 때 제1항 공대 사령장관 자리는 나구모에게 넘어간다. 나구모 주이치는 항공 전문지휘관가 아니었다. 미드웨이 패전 후 1942년 11월에 제3함대 사령장관으로 복귀한다.

 

 

1944년 6월 15일 미군, 사이판 상륙을 개시한다. 일본은 아호 작전을 개시한다. 긴 항속거리의 제로 전투기를 신봉했기 때문에  상대방의 사정거리 밖에서 공격하는 아웃 레인지, 아웃 복싱 전법을 쓴다.  함대를 전위부대와 본대를 나눈다. 전위부대는 본대보다 약 190Km 전방에 배치한다. 전위부대는 제3항공전대 경항모 3척을 배치한다. 본대는 갑, 을 부대로 분리한다. 갑부대는 제1항공전대 정규항모 3척, 을부대는 제2항 공전대가 정규항모 2척, 경항모 1척으로 배치한다.

전위부대 함재기가 출격을 하여 미 함재기가 공격하면 전위부대가 공격할 수 있고 미 함대가 만약 일본 본대를 공격하고 돌아갈 때 전위부대가 공격할 수 있도록 배치한 것이다. 전위부대는 앞에서 미끼역할을 하고 본대는 최대한 아끼겠다는 전략이다. 그러면서 미 함대를 공격하겠다는 것이다.

 

 

드디어 필리핀해 해전이 시작된다. 일본시각 1944년 6월 19일 오전 6시 30분 일본이 예상했던 사이판 서부 해역에 미 기동함대가 진입한다. 오자와는 공격개시를 명령한다. 1944년 6월 19일 오전 7시 25분 일본 1차 공격대가 발진한다. 1차 공격대는 전위부대 항모에서 함재기가 발진하고 그 이후 공격은 5시간 동안 총 4차례 공격한다. 일본 1차 공격대 함재기 64대가 출격한다. 6월 19일 오전 7시 35분 본대 갑부대 제1항공전대 2차 공격기 128대가 출격한다. 날아가던 2차 공격대 중 3대는 미군기로 오인받아 전위부대 대공포에 격추된다.

 

일본군은 원하는 장소에서 원하는 방식으로 싸울 수 있다고 판단하고 함재기가 출격하는 순간 눈물을 왈칵 쏟는다. 하지만 일본 해군 항공기들이 미 항모부대를 덮치기 전에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있었다.

바로 지옥에서 온 고양이 'F6F 헬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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