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잡학지식

트루크 환초 대공습, 필리핀 게릴라 부대

by 소시민스토리 2024. 2. 12.
반응형

트루크 환초 대공습, 필리핀 게릴라 부대

타라와 전투는 길버트, 마셜 전역에 해당하며 트루크 환초 목전까지 도달한다. 일본은 연합함대와 요격대를 가세하여 마셜제도에서 결전을 치르기로 작전을 계획했는데 완전히 틀어진다.

 

혈전, 타라와 전투

 

혈전, 타라와 전투

혈전, 타라와 전투 제1차 퀘벡회담 이후 미국은 영국의 첨단 기술을 접목해 어마어마한 양의 신형무기들을 생산해 낸다. 미국의 거대한 항모기동부대가 본격적으로 거대한 위용을 드러내기 시

bringbacon.tistory.com

 

일본 함대의 가장 큰 문제는 미 함대가 어디로 어느 시점에 쳐들어올지 모른다는 것이다.

일본 해군도 최선을 다해 통신 감청, 정보를 분석해도 정확한 시점을 알 수가 없었다. 1943년 9월, 10월 길버트, 마셜제도를 두 차례 걸쳐 두들겨보자 미군이 왔다고 착각하고 일본 연합함대가 총 출격한다.

2번이나 허탕을 치자 일본 연합함대에 문제가 닥친다. 연료가 떨어졌다. 태평양 한가운데 자리한 트루크 환초에 남방지대와 일본으로부터 연료를 가져와서 저장해야 한다. 함대가 소모하는 연료의 양은 어마어마해서 한번 출격할 때마다 야마토급 전함 2척은 약 1만 톤의 연료가 사용되고 연합함대 주력은 약 10~20만 톤의 중유를 소비한다.  2번의 허탕으로 연료가 바닥을 드러냈다.

 

당시 일본 해군의 보급로는 미 잠수함이 교란 중이어서 연료 보충이 안 되어 정작 미 함대가 길버트, 마셜제도에 나타나도 출격할 기름이 없었다. 일본 해군이 계획한 Z작전은 꼬이기 시작한다. 미 해군은 이미 Z작전에서 설정한 요격대 방어선 안으로 진입해 있었다. 1944년 2월 초 미 해군 마셜제도가 점령당했고 트루크 환초는 미군 사정권 안에 있었고 길버트, 마셜제도의 일본 기지항공대가 전멸했다.

일본 연합함대 사령장관 '고가 미네이치'는 트루크 환초에서 Z작전은 무리라고 판단하고 퇴각하면서 1944년 2월 초순에 일본 연합함대 팔라우로 이동한다. 1944년 2월 17일 미 해군 항모기동부대가 트루크 환초 대공습을 개시한다.

 

 

작전명'우박'처럼 이틀 동안 대공습이 쏟아진다. 일본 연합함대 주력 수상함들만 팔라우로 후퇴했다. 트루크 환초 사단급 수비병력은 잔류하고 있었고 4개 비행장을 운용 중이었고 수송선 30여 척이 트루크 환초에 정박해 있었다. 1944년 2월 미군의 대공습이 벌어진다. 수송선 30척은 전부 침몰당한다.

침몰한 수송선단 규모는 약 20만 총톤이었다. 라바울 등 남태평양 섬에 고립된 수비부대를 위한 보급선이 부족해진다.

 

 

일본도 미군의 공세가 임박을 감지하고 있었다. 미군 정찰기 출현에 심상치 않은 무선 감청까지 있자 일본 해군 초계기도 계속 띄우고 하면서 1944년 2월 16일 공습 전날 오후 3시에 전국비상을 내린다.

출격 준비하고 기다리는데 안 온다. 밤 10시 30분 비상 해제를 한다. 1944년 2월 17일 새벽 4시 42분 미군이 출격을 개시한다.

 

 

일본은 레이다를 배치하고 있어서 공습 30분 전에 미 항공기들을 포착한다.  경보 급발동으로 제로기가 출격한다. 미 전투기 공격대는 새벽 6시에 들이닥쳤고 일본 제로전투기 조종사 입장에서는 경계심을 풀었다가 충분한 고도 확보를 못한 상황이 된다. 이미 고도 싸움에서 져서 내리꽂는 미 전투기 공격에 제로전투기들은 그대로 격추된다. 미 폭격대 공습은 제공권을 확보한다.

 

팔라우로 퇴각한 일본 연합함대 사령관장 '고가 미네이치'는 'Z작전'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팔라우는 절대 국방권 안으로 들어오는 길목이기 때문에 '신 Z작전'을 세운다. 필리핀해 마리아나 해역에서의 대결전을 예고한다. 1944년 3월 일본 해군은 新Z작전을 준비한다. 

 

중부 태평양 공세를 이어가는 미 해군의 작전

1944년 3월 중부 태평양 공세 루트 예상지 마리아나 제도 공격을 확정짓는다. 작전명은  '포리저(Forager, 약탈자)'이다. 마리아나 제도는 일본의 점령지였다. 마리아나 주요 섬 사이판, 괌, 티니안을 점령하겠다는 작전이다.

미군의 공세루트는 이원화로 합의했지만 미 육군과 해군은 여전히 갈등이 있었다.

맥아더는 뉴기니에서 필리핀 민다나오로 가는 루트가 중요했고 해군입장에서는 마리아나는 반드시 필요하다는 입장이었다. 오히려 많은 희생과 노력이 따르는 필리핀을 피하고 싶었다. 이때 어니스트 킹은 마리아나 제도를 점령하면 전략폭격이 가능하다며 헨리 아놀드 미 육군항공대 총사령관을 끌어 들인다.

은밀한 협상 끝에 헨리 아놀드는 어니스트 킹의 편을 들어 미 합동참모본부 마리아나 제도 공격을 결정한다.

 

 

마리아나 제도는 세계사가 주목할 정도로 요충지였다.

마리아나 제도의 왼편에는 필리핀이 있고 위에는 오키나와, 남중국해와 연결될 수 있는 무역, 군사상 요충지다. 대항해시대를 맞이한 스페인이 멕시코를 점령하고 필리핀 경로의 중간 기착지가 마리아나 제도였다.

탐험가 마젤란이 1521년 탐험을 하면서 마리아나 제도를 발견한다. 마리아나에 있던 원래 원주민은 '차모르 족'으로 필리핀을 경유해 마리아나 제도에 정착했다. 17세기 이전 원주민 차모르족은 최대 6만여 명이 살고 있었는데 17세기 초 약 3,500명으로 급감한다. 천연두 등의 전염병 창궐과 스페인의 의한 학살로 추정된다.

1898년 미국, 스페인 전쟁에서 미국이 승리하며 패전국 스페인은 중부 태평양에서 물러나게 된다.

필리핀, 괌은 미국에 매각하고 사이판 등 북마리아나는 독일에 매각한다. 

 

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전국이 되자 1919년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독일의 태평양 식민지는 일본에게 넘어간다. 일본의 위임통치를 하며 국제연맹의 승인 형식을 빌려 '남양군도'라 한다.  일본인들이 남양군도에 거주하면서 '남양청'을 설치하여 남양군도를 관리하고 다스리는 행정기구역할을 했다. 주요 섬에 설치된 남양청의 본청, 지청 출신끼리 그룹을 결성한다. 남양군도는 사탕수수 등 열대작물 재배 거점으로 부상하여 규슈제국대학이 '남양군도 농업'을 연구하고 책임진다.

 

반응형

 

미국입장에서는 마리아나 제도 진출에 사활을 건다. 일본본토 전략폭격 거점이며 필리핀 탈환 거점이 된다. 미국으로서 마리아나 제도는 가장 먼저 차지해야 하는 섬이다. 

 

 

 

B-29 슈퍼포트리스는 1938년부터 미 국방부 신형 폭격기 개발 요청으로 만들어진다. 폭탄을 대량 탑재할 수 있고 항속거리 8,400Km 이상이며 시속 600Km/h의 비행속도를 낸다. 신형 폭격기 개발 비용은 30억 달러가 든다. 1942년 9월 신형 폭격기 첫 비행이 성공한다. 첫 비행이 성공하자마자 B-29 슈퍼포트리스로 명명한다.

B-29 슈퍼포트리스는 최대 폭장량이 10톤 이상, 항속거리 9,000Km, 비행고도는 약 10,000m이다.

당시 비행고도 10,000m는 일본군 요격기는 불가능했다. B-29는 여압장치가 완벽해서 기존에는 고공 비행하면 털옷에 산소마스크를 장착했는데 이제는 군복을 입고 탈 수 있었다.

 

B-29가 처음 등장할 때 일본군 조종사가 쫓아가다가 미 승무원을 목격했는데 두터운 방한복을 입지 않고 군복을 입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일본 조종사들은 착각을 한다. 미국도 물자부족에 시달려 방한복을 입지 못한다고 판단했고 상부에 그대로 보고한다. 일본군은 미국도 물자부족에 시달리니 결전을 해 볼 만하다고 판단한다. 

 

B-29 대량생산한  미 보잉 사는 훗날 민간항공기 그룹으로 성장한다. B-29에 탑재한 신기술이 훗날 제트여객기의 토대가 된다.

 

일본에서는 마리아나 해전이라 부르고 미국에서는 필리핀 해전이라 불리는 또 한 번의 결전이 다가오고 있다.

1944년 3월 30일 미 해군은 팔라우 대공습을 강행한다.  미 항공기 700여 대가 동원되고 팔라우 일본군을 초토화시킨다. 엄청난 폭격을 받은 일본 연합함대는 치명상을 입는다. 일본은 새로운 근거지 팔라우마저 위태롭게 되었다. 일본 연합함대 핵심 참모들은 비행기에 올라 필리핀으로 퇴각한다. 한편 도착을 기다리는 민다나오 다바오 비행장에서는 아무리 기다려도 비행기가 오지 않는다. 고가 미네이치가 탄 비행기는 폭풍을 만나 추락하여 사망하고 말았다. 일본 연합함대 참모장 '후쿠도메 시게루'는 생존한다.

불시착 지역이 세부 인근이었다. 일본군 부대와 약 10Km 거리에서 조난당한 것이다. 구조를 기다리고 있을 때 필리핀 원주민들이 다가온다. 필리핀 원주민들은 참모장 일행을 붙잡아 해안으로 이동시킨다. 현지 게릴라 부대에게 넘긴다. 

 

당시 필리핀 게릴라 부대는 맥아더와 협력관계가 있었다. 게릴라 부대는 미국의 필리핀 탈환을 기대했다.

미국의 약속대로 필리핀 독립을 염원하고 있었다. 필리핀 게릴라 부대는 약 100여 개, 게릴라부대 병력 30만 명 이상이었다. 필리핀의 70%를 장악하고 있었다. 때문에 일본군은 점령지역 밖으로 나가면 안전을 담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미국이 게릴라에게 물자를 지원했다. 당시 필리핀 제해권은 일본이 가지고 있어서 수송수단은 미 잠수함뿐이었다. 미 잠수함으로 30만이 넘는 게릴라에게 물자를 보급해 줬다는 것은 미국의 놀라운 보급 능력을 알 수 있다.  필리핀 국민들도 게릴리를 지지했다. 일본군의 악독한 점령 정책에 필리핀 민심이 이탈했다. 필리핀에서 바탄 죽음의 행진을 하면서 미군들이 필리핀에 남아 있었다. 행진에서 탈출한 병사가 있었고 미국의 신탁통치 시절, 필리핀에 거주했던 미국인들이 게릴라에 합류했다. 현지인들과 합류를 해서 게릴라부대 조직을 한다. 

 

필리핀 침공 당시 일본에 항복했던 부대는 루손 섬의 미군 사령부였고 다른 섬에 있던 미군은 항복하지 않았다. 특히 바탄, 죽음의 행진에서 희생자는 거의 필리핀 군인이었다. 따라서 필리핀사람들은 일본에 대해서 악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 연합함대 참모장 '후쿠도메 시게루'의 운명은 필리핀 게릴라 손에 넘어갔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