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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지식

혈전, 타라와 전투

by 소시민스토리 2024. 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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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전, 타라와 전투

제1차 퀘벡회담 이후 미국은 영국의 첨단 기술을 접목해 어마어마한 양의 신형무기들을 생산해 낸다.

미국의 거대한 항모기동부대가 본격적으로 거대한 위용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핵심에는 에식스습 항공모함이 있었다.

 

제1차 퀘벡회담에서 작전 승인 후 미국의 공세 준비

 

제1차 퀘벡회담에서 작전 승인 후 미국의 공세 준비

미국 대규모 공세 준비 1943년 8월 루스벨트와 처칠이 캐나다에서 만난다. 전쟁 중에 연합국 지도자들이 2차 대전을 어떻게 끝낼 것인가 논의하면서 핵무기 사용에 대한 의견이 나온다. 일본의 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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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맥을 끊어내기 위한 중부 태평양 공세가 개시된다. 미 육군 루트와 해군 루트를 이원화하여 공세를 하기로 결정한다. 태평양에서  최종목적지 일본까지 어떻게 갈 것인가, 미 육군과 해군 중 누가 주역이 될 것인가에 합의가 안 돼서 결국 이원화해서 공세 하기로 결정한다. 이원화해서 작전을 하더라도 엄청난 전력을 가지고 있어서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반면 일본은 전력이 부족한 상태에서 분산해서 방어를 해야 하기 때문에 불리한 입장이었다. 

'어니스트 킹' 미 해군 참모총장 겸 총사령관은 일본의 약점을 알고 있었다.  일본의 생명선은 남방자원이고 남방자원을 끌어오는 수송로를 차단한다면 태평양전쟁은 쉽게 끝난다고 판단한다.

일본 전체 경제 핵심적인 해양 수송라인은 필리핀에서 대만, 오키나와를 잇는 일대이다. 강력한 미 항모 기동부대로 대만을 공격하여 해양 수송라인을 끊어버리면 일본은 전략물자를 공급받을 수 없어 항복할 것이다 주장한다. 

이어서 맥아더의 공세 루트 계획으로 필리핀으로 가서 일본의 맥을 끊는 거점으로 발판 삼아 일본 본토를 공격하자고 주장한다.

니미츠는 중부 태평양 여러 섬들을 점령해 나가면서 일본 함대 활동을 제한하면서 대만에서 중국을 거쳐 일본으로 향하거나 일본을 고립시키려는 작전을 한다. 니미츠는 중부 태평양으로 단계별 북상을 하려고 한다. 

 

 

미 해군은 중부 태평양 공세를 개시한다. 1943년 11월 니미츠의 태평양해역군의 진격이 길버트 제도로 향한다. 길버트제도에 속한 타라와 환초에 베티오 섬이 있다. 베티오 섬은 타라와 환초 중심지로 길이 약 3Km, 최대 폭 약 1Km고 면적은 서울 여의도의 1/2 정도 되는 작은 섬이다. 홀랜드 스미스가 이끄는 5 상륙군단 예하 해병대 2사단 상륙을 감행한다. 베티오 섬의 방어 병력은 일본 해군 육전대(해병대)가 지키고 있었다.

일본 해군 제7 특별육전대 약 2,500명, 보조전력으로 삼으려 약간의 군사훈련을 받은 노무자 2,500명 정도가 있었다.

 

 

1943년 11월 20일 ~23일 동안 혈전이 벌어진다. 포문을 연 미 5함대가 요새화된 베티오섬에 3시간 넘는 함포사격을 하고 함재기 폭격을 가한다. 작은 섬에 포탄만 약 3,000발을 쏟아붓는다. 

3시간 정도 혈전을 벌인 후 상륙을 시킨다. LVT 상륙장갑차를 동원되어 수량이 충분치 않아 상륙부대 1.2.3 제파에만 LVT를 배치한다.

※제파는 동시에 공격하는 부대 집단을 뜻한다.

 

1943년 11월 20일 오전 8시 25분경 미 해병대 2사단 상륙부대 8개 제파가 차례대로 출발선을 통과해서 섬으로 상륙을 개시한다. 해안에서 약 1Km 지점의 산호초에 도달한다. 산호초를 넘으면서부터 일본군의 기총소사가 비처럼 쏟아진다. 상륙장갑차는 방어 장갑이 취약했다. 이때 미군의 희생이 컸다. 11월 20일 오전 10시경 베티오 섬 해안에 제1~3파, 1,000명이 도착한다. 최초 상륙부대가 추가병력이 올 때까지 얼마나 해안 교두보를 확보하느냐에 따라 승패가 갈린다. 제4~8파 후방부대 상륙은 힘들어진다. 1~3파가 LVT 상륙장갑차를  타고 가서 더는 없었기 때문이다. 제4~8파 상륙주정에 탑승했지만 주정이 산호초를 넘기에 수심이 낮아졌다. 

제1~3파를 내려준 LVT로 왕복 수송을 하려고 돌아가는 도중에 LVT가 박살이 난다. 

 

 

 

결국 주정에서 내린 병력들은 1km를 걸어서 베티오섬까지 간다. 

제4파로 상륙했던 미 해병대 2사단 2 연대 3대대 L 중대장, 마이클 라이언 소령이 지휘관을 잃은 다른 중대원들에게 당황하지 말고 자신을 따라오라고 하며 다른 중대원까지 이끌고 돌진한다.

라이언 소령이 취합한 병력은 훗날 '라이언의 고아들'이라 불렸고 이들은 베티오 섬 서쪽 해안 교두보 확보에 기여한다. 제4파 미 해병대 2사단 8 연대 2 대대장 제임스 크로우 소령은 상륙주종 맨 앞에서 팔짱을 끼고 간다. 상륙주정이 산호초에 걸리자 제일 먼저 내려 앞으로 전진한다. 1943년 11월 20일 정오 무렵 추가 병력 베티오 섬 해안에 상륙한다.

 

미국의 주력전차 M4 셔먼 2대가 뭉개고 다니면서 전투가 끝나고 만다. 타라와 전투 2일째 미군은 베티오 섬 서쪽 해안 교두보를 장악한다.  이후로 일본군은 콘크리트 진지 토치카, 참호, 장애물 등을 활용한 치열한 저항이 체계적으로 이어져 미군은 엄청난 피해가 속출한다.

미군 3,500명 정도 사상자가 난다. 미 해병대 2사단 병력의 약 20%가 손상된다.

타라와 전투에서 미군과 일본군, 강제징용 되어 노무자로 일한 조선인까지 포함하여 6,400여 명이 사망했다.

 

'피로 물든 타라와 해변'이라는 제목으로 언론보도에 실린다. 미국의 여론은 악화되고 미 의회 진상조사가 촉구된다. 당시 제5상륙군단장 '홀랜드 스미스'는 청문회에서 "실수'라고 증언한다. 타라와 전투에서 미군 사상자 약 3,407명으로 불과 76시간 만에 발생한 막대한 희생에 미 해군 수뇌부마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고 타라와전투에 참여한 지휘관들은 철저한 분석에 돌입했다.  문제점을 개선하고 상륙작전의 교리를 다지는 계기로 삼는다.

 

악화된 여론은 시간이 흐르면서 잠잠해졌지만 미 태평양함대 사령관 제스터니미츠는 자신감을 상실한다. 1943년 11월 27일 니미츠는 베티오 섬을 방문하고 미군 희생을 보고 분산공격보다 맥아더가 제시한 뉴기니-민다나오 라인으로 공격하자는 작전대로 할까 고민한다. 하지만 '어니스트 킹' 미 해군 참모총장 겸 총사령관이 제지한다.  1944년 2월 미 해군이 마셜제도를 점령한다. 다시 어느 정도 자신감을 회복한 해군은 중부 태평양 공세를 이어가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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