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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지식

일본, 필리핀해 해전 사이판 함락의 파장

by 소시민스토리 2024. 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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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필리핀해 해전 사이판 함락의 파장

1944년 7월 9일 사이판 함락 후 일본 군부 상황은 종전협상을 하자는 분위기가 될 정도로 비참해진다.
사이판 함락의 가장 큰 두려움은 사이판에서 출격한 미군의 B-29의 일본 본토 폭격이었다.
 

일본 제국주의 패전, 필리핀해 해전

일본 제국주의 패전, 필리핀해 해전

일본 제국주의 패전, 필리핀해 해전 미군과 일본군은 필리핀 해 해전에서 맞붙을 준비를 하고 있다. 일본군은 원하는 장소, 방식으로 싸울 수 있어 승산이 있다고 판단한다. 하지만 미군은 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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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생각만큼 B-29 폭격기 성능이 좋지 못했다. 명중률이 좋지 못했다. 절망에 빠져 있던 일본은 다시 희망을 찾는다. 마리아나 제도에서 출격한 B-29 일본 본토 첫 폭격 개시는 1944년 11월 24일이다.
 
이런 가운데 대본영은 회의를 소집한다. 지금 현재 중국전선이 어렵다고 하지만 중국의 노른자위는 일본군 수중에 있고 중국전선은 곧 끝날 것이다는 보고를 한다. 미국 잠수함이 방해는 하고 있지만 남방자원지대에서 물자는 계속 들어오고 있어 버틸만하다고 보고한다. 하지만 격침당하는 피해 현황은 보고 하지 않는다. 
투입 됐던 수송선의 1/3이 격침당하고 있었고 한달 뒤에는 1/2이 격침당하고 있었지만 보고를 하지 않는다.
피해는 있지만 차질없이 물자는 들어오고 있다고 보고한다. 일본군 병력 규모는 1944년 일본 육군 병력 총 410만이며 그중 정규군은 200만 이상이다고 보고한다. 나중에 예비군을 확충하면 700만 병력이 가능할 것이다고 보고한다. 형편없는 미군 B-29 폭격에 일본 본토 상륙작전이 불가피할 것이고 일본에 상륙하는 미군을 격퇴한다면 두 번 다시 엄두가 나지 않을 것이다고 보고한다. 일본의 희망이 섞여있는 전략이다.
이때부터 일본은 본토 결전을 준비한다.
 
일억총옥쇄가 나오기 시작했고 본토 요새화를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일억총옥쇄는 말 그대로 1억 명의 사람들이 옥처럼 부서진다는 뜻이며 민간인 신분으로 전쟁에 나가 천왕을 위해 아름답게 죽는다는 것으로 전쟁의 정당성을 미화하고 선동하려는 의도이다. 당시 조선과 대만 인구까지 합쳐야 1억 명이 된다. 일본인뿐만 아니라 조선, 대만인도 전쟁에 희생양으로 삼겠다는 것이다. 
 
일명 '죽창부대', 국민의용대라고 해서 어린아이, 학생, 여성을 대상으로 군사훈련을 시행한다. 
머리띠에는 '일인십살(一人十殺 1인당 미군 10명을 해치우자)을 쓰고 훈련을 받았다. 
사이판 함락 이후 본토 결전 분위기로 바뀐다. 1944년 후반 대본영의 판단은 "해 볼만하다"였다.
1945년 5월 본토 결전 방어전략 '결호작전'이 추진된다. 
 
일본 군부의 1순위 조건은 천황제 유지였다. 일본왕은 전쟁에 대한 책임은 지지 않고 종전 후에도 그대로 통치할 수 있는 국가를 지속하려고 노력을 한다.
일본 총리 겸 육군대신 '도조 히데키'가 물러난다. 본인이 공헌했던 절대 국방권이 붕괴되었고 도조 히데키를 반대하는 정치적 공격에 압박감을 느끼고 사퇴한다. 급기야 도조내각 퇴진운동에다가 암살 위협까지 받는다. 미수에 그쳤지만 해군 내부에서도 도조 암살 시도 모의가 있었다.
'고노에 후미마로' 전 총리를 필두로 한 육군 수뇌부 20여 명의 사퇴 압력도 거세졌는데 주동자는 도조의 오랜 벗이며 1950년대 총리에 오르는 '기시 노부스케'였다. 
기시 보부스케는 아베 신조 전 총리의 외조부로도 유명하다. 결국에 마리아나 제도를 빼앗긴 책임을 지겠다며 1944년 7월 22일 도조내각은 총사퇴한다. 
 
당시에는 '대정익찬회'로 태평양전쟁 시기, 정치력 결집을 명분으로 의회의 여러 정당을 하나로 모은 1당 독재 체제였다. 원로회의에서 총리 후보자가 지명되면 일왕이 재가하면 총리가 된다.
 

 
도조 히데키가 총리에서 물러나고 '고이소 구니아키'가 일본 41대 총리가 된다. 조선 총독부 출신이면서 뼛속까지 군인인 사람이었다. 패전을 앞둔 일본의 총리로서 정치적 능력은 회의적이었다. 1936~1942년 조선 총독 '미나미 지로'와 1942~1944년 조선총독이었던 고이소 구니아키는 가장 최악의 총독으로 평가받을 정도로 악독한 통치를 했다. 미나미 총독부터 일본과 조선은 한 몸이라는 내선일체를 추진했고 1940년 창 씨 개명령을 내리기도 하고 1938년 육군특별지원병제(징병제)를 실시하고 1937년 신사참배를 실시한다. 
 
고이소는 더 가속화한다. 1943년 조선인 학도지원병제를 실시한다. 고이소 총독 밑에 있던 일본인 행정관들 평가마저 최악이었다.  일왕이 있는 궁성을 향해 절하는 '궁성요배'를 매일 같이 모든 조선인에게 강요하는 것을 보고 저렇게 까지 할 필요가 없는데라고 생각할 정도로 일본 행정관들도 최악이라 평가한다. 총독부 관리들을 닦달하면서 아랫사람들이 극혐 하는 피곤한 사람이었다. 하필이면 왜 이런 사람 '고이소 구니아키'가 수상이 되었을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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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조 사퇴 후 일본 정계 논의는 활발해진다.  패전을 잘 수습해야 하는 상황에서 마땅한 인물이 없었다. 당시 전시상황이어서 육군을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그 누구도 이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싶어 하지 않았다.  당시 고이소는 1938년 전역한 예비역 장성이었다. 막상 총리가 되었지만 총리로서 힘은 없었다. 결국 도조 히데키에게 손을 내민다. 초반에 도조 히데키의 영향력을 받아들여서 내각을 구성한다. 
 
고이소는 육군출신으로 전쟁이 이미 기우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총리로서 권력도 없고 육군을 장악하지도 못했다. 1930년 일본의 영관, 위관급 장교들이 만든 비밀 결사조직 '사쿠라회'출신이다. 국가 개조를 꿈꾼 사쿠라회 1931년 쿠데타(10월 사건)를 강행했다. 총리 취임 후 고이소는 "아직까지 신은 우리를 버리지 않았다, 우리에게 기회는 남아있다"라고 발언하며 총리가 되자마자 선전, 선동한다.
고이소는 다시 한번 기회가 올 것이라 생각한다. '레이터 해전'이다.
 
 
 

일본 의원내각제의 총리 선출 방식

집권 여당의 총재가 총리를 하기 때문에 집권 여당 내에서 선거를 통해 새로운 총재를 선출한다.
일본 의원내각제는 중의원(하원), 참의원(상원)의 양원제 구도이다.
새로 선출된 집권 여당 총재가 총리 후보자가 되고 중의원, 참의원에서 지명 투표를 해서 과반 이상 득표 시 총리로 지명된다. 일왕의 재가를 받아 총리가 된다. 
의원내각제 특징은 총리에게 부여되는 중의원(하원) 해산권이다. 정치적 승부수로 총리가 해산을 선언하면 조기 총선을 통해 새로운 의회를 구성할 수 있다. 국민의 뜻을 민감하고 빠르게 반영하는 의원내각제의 장점이다. 일반적으로 다수당의 총재가 총리가 되고 내각의 각료 (대신, 장관)를 의원이 겸직하기 때문에 입법에서 행정, 집행까지 안정적이고 신속한 국정 운영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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