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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지식

일제 강점기 문화재 보존을 위해 일생을 바친 간송 전형필

by 소시민스토리 2024. 8.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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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문화재 보존을 위해 일생을 바친 간송 전형필

1936년 11월 22일 경성미술구락부 경매장에서 화려한 채색과 국화와 난수, 벌과 나비의 조화가 일품인 18세기 조선 백자가 경매장에 등장했다. 일본을 대표하는 골동품상 야마나카는 조선 백자를 놓치고 싶지 않았지만 당시 경매 최고가 1만4천5백8십원의 가격으로 조선인이 낙찰을 받았다. 야마나카 상회는 세계 주요 도시에 지점을 둔 일본 골동품점이었다. 전 세계 최고의 동양골동품상으로 조선 백자 경매 소식을 듣고 직접 일본에서 경성까지 찾아왔다. 30살의 젊은 전형필이 야마나카와의 경매 경쟁에서 이겨서 조선인의 자존심을 올려준 사건이기도 했다. 

 

 

해방 이후 국보 제294호로 지정된 백자 청화철채동채초충문 병이었다. 여러 색의 안료가 조화를 이룬 명품 백자이다. 일본 거상과의 경합 끝에 조선백자를 지켜낸 조선인은 당시 30살의 간송 전형필(1906~1962)이었다. 

일제 강점기 일제 조선문화 말살정책에 맞서 싸우면서 우리 민족 문화와 역사를 지켜낸 문화 독립운동가였다. 

 

백자 청화철채동채초충문 병은 참기름을 넣어 팔던 참기름 병이었다. 장터 상인이 참기름병으로 쓰던 것을 안목있는 골동품상이 구입해서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서 일본인 금융가 모리 고이치의 소유가 되었다. 1936년 모리 고이치 유품 매각을 위한 경매에 나오게 되었고 간송 전형필은 18세기 명품 조선 백자를 알아보고 조선백자는 조선 땅에 남아야 된다고 하며 치열한 경합끝에 낙찰을 받았다.

 

1936년 11월23일 경성일보에 조선 백자 낙찰 기사가 실렸다. 당시 1930년대 경성 8칸 짜리 기와집 한 채(20평 정도)에 천원이었다. 조선 백자 경매 최고가 1만4천5백8십원의 가격은 경성 기와집 14채에 해당하는 가격이었다. 

1952년에 발간된 종합교양잡지 <신태양> 1957년 9월호에 고미술품수집여화, 존 가스비씨의 일화를 기고했다. 간송 전형필이 직접 일화를 남긴 특별한 사연이 있다. 일본에 거주하던 영국인 변호사 조 개스비가 소장하고 있던 고려청자 20점을 인수하게 된다. 당시 거래가로 현금 40만원이었다. 기와집 4백채의 값이다. 현재 가치로 2천 4백억 정도이다. 

 

존 개스비는 영국 귀족 출신의 변호사였으며 19세기말 일본으로 와서 일본 재벌들의 고문변호사를 다 할 정도로 유명했다. 문화재 수집가였는데 우연히 골동품상점에서 고려청자를 보고 난 뒤 매료되어 가지고 있던 일본, 중국 도자기를 팔아버리고 20여 년간 고려청자를 수집했다. 당시 세계최고의 고려청자 컬렉션을 보유하고 있었다고 평가받았다. 

 

간송 전형필은 일본 동경 와세다 대학에서 유학했다. 전형필은 일본이 군국주의로 치닫다 보면 큰 전쟁을 일으킬 것을 예상했고 개스비가 외국인이므로 전쟁이 나면 일본에 남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개스비가 소장한 문화재를 처분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게스비와 거래하는 판매상들에게 정보비를 주고서 판다는 소식을 알려달라고 부탁했다.

 

인수 자금을 마련해 일본으로 출발한 간송 전형필은 1937년 3월 도쿄에서 존 개스비의 고려청자 컬렉션을 인수했다. 충남 공주 만 마지기 땅을 처분해서 인수 자금을 마련했다. 존 개스비가 왜 고려청자를 사려고 하냐고 질문했다. 간송은 미술관을 지어 우리 조선의 문화재를 모아 지키려 한다고 대답했다. 

젊은 조선인 수장가에게 존 개스비는 감동했다. 22점의 청자 중 기념 소장용으로 2점을 제외하고 20점을 거래한다. 간송이 가져간 돈에 맞춰줬다.  개스비 컬렉션 20점 중 국보 4점, 보물 5점이며 나머지도 이에 준하는 가치가 있다.

 

 

청자 모자원숭이 모양 연적 (국보 제270호)이다. 문화재 가치 평가 기준은 희소성이 중요하다. 고려청자 중 원숭이 모양이 드물다. 온전한 형태를 유지한 청자 원숭이 모자母子연적은 유일하다. 약 10cm 크기의 작은 연적으로 국보로 지정될 만큼 높을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연적硯谪은 벼루에 먹을 갈 때 쓸 물을 담아두는 그릇이다.

청자는 1,200℃ 이상 고온에서 굽는다. 굽는 과정에서 팽창했다가 수축하는 과정에서 미세한 금 빙렬이 발생한다. 청자 원숭이 모자는 빙렬이 거의 없다. 엄청난 기술을 필요로 한다. 

 

간송의 집안은 현 종로4가~6가 배오개 장터 상권을 소유하고 있었다. 소학교 시절 할아버지, 아버지가 사망하여 24살에 집안에 유일한 상속자가 되었다. 상속받은 재산은 논 4만 마지기, 밭과 상가, 미곡상 등이었다. 

논 한마지기는 논 200평 (약 661㎡)정도이므로  논은 8백만평 정도를 소유했다. 크기가 여의도의 10배 정도이다. 엄청난 재력을 조선 문화재 수집하고 보존하는데 썼다. 간송 전형필은 서화, 붓글씨, 도자기, 석탑 등 조선땅에 있어야 할 문화재를 모두 수집했다.

거간이 물건의 가치를 모르고 헐값에 팔려고 하면 간송은 제값을 제대로 쳐서 주었다. 이것은 소문이 났고 좋은 물건이 있으면 간송에게 먼저 가져오는 경우가 많아졌다. 

 

1934년 일본 오사카 골동품상에게서 거금을 주고 혜원전신첩을 되찾아왔다. 현재 국보 제135호로 지정된 문화재이다.  혜원전신첩은 신윤복의 작품 30여 점을 담은 풍속화첩이다. 

 

 

간송 전형필은 문화재 보존을 위한 우리 나라 최초의 박물관, 보화각을 1938년 설립한다. 현 간송 미술관의 전신이다. 한국전쟁 당시 문화재를 두고 피난 갈 수 없었던 간송은 보화각 근처 빈집에 은거하고 있었다. 

보화각 문화재 북송을 계획한 인민군은 월북 화가 이석호가 인민군 작업팀을 끌고 보화각을 점령했다. 당시 국립중앙박물관 직원 최순우, 서예가 손재형을 차출하여 문화재 반출 작업을 지시했다. 간송과 비밀리에 만난 두 사람은 최대한 시간 끌기를 하자고 한다.

 

완벽한 포장 준비를 이유로 핑계를 대며 시간을 지연시킨다. 보화각 지하에 위스키가 몇병 있었는데 인민군들 술자리를 마련해서 지연시켰다. 손재형은 일부러 계단에서 굴러 다리가 부러졌다고 하여 시간을 지연시켰다. 화가 난 인민군이 내일 모레까지 끝내라고 협박을 했다. 보화각 문화재 북송 위기를 더 이상 막을 수 없었다. 다음 날 새벽에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있었고 곧바로 인민군은 철수했다.

이때 준비 중이었던 포장 상자들은 1.4후퇴 때 문화재를 싣고서 부산으로 피난을 가는데 요긴하게 활용되었다.

 

간송에게 큰 영향을 주었던 두 인물이 있었다.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 춘곡 고희동은 휘문고 미술 교사로 학생 전형필에게 문화, 역사, 예술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고희동은 위창 오세창을 전형필에게 소개시켜준다. 위창 오세창은 민족대표 33인 중 1인이다. 독립운동뿐 아니라 문화 예술에도 조예가 깊었다. 오세창의 아버지는 초기 개화파 역관 오경석이며 스승은 추사 김정희였다. 오세창은 간송에게 지식과 노하우를 전달했다. 

 

조선총독부는 문화재 약탈 목적인 고적조사사업을 실시했다. 조선의 많은 문화재를 수탈해 갔다. 일본인 개인들도 문화재 도굴을 빈번하게 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고려청자를 좋아했다. 일본 정계에 선물용으로 고려청자 수천 점을 강탈해갔다. 

일제 강점기 조선에서 사업을 했던 오구라는 우리 문화재를 다수를 일본으로 반출한 대표적인 일본인이다. 

오구라의 자손들이 반출된 우리 문화재 중 1천 여 점을 도쿄국립박물관에 기증했다. 

 

간송은 훈민정음 해례본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일제 강점기 총독부는 조선어 말살 정책을 시도하고 있었다. 조선의 뜻 있는 많은 사람들이 훈민정음 해례본을 찾고 있었다. 언어학자, 사회주의자 김태준이 찾아와서 안동에 있다고 말해준다. 김태준은 독립운동자금이 필요했었다. 간송에게 가져가면 제값은 받을 것이라 생각하고 찾아왔다. 당시 고서는 최고 가격이 5백원이었다. 5백원은 기와집 한채의 절반 가격이었다.

김태준은 중요한 책이니 천원을 달라고 하자 간송은 책값으로 만원을 주겠다고 한다.

 

훈민정음을 찾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굉장히 위험한 시절이었다. 간송은 어떠한 댓가를 치르더라도 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훈민정음 책값 만원과 수고비 천원을 주었다. 거래 약속 후 1년 후에야 훈민정음이 간송 손에 들어왔다. 

간송 전형필은 훈민정음 소장 직후 한글학자 홍기문, 서지학자 송석하에게 훈민정음 필사를 허락한다. 소장에 그치지 않고 훈민정음 연구에 착수하게 했다. 1940년 7월 30일부터 8월 4일까지 신문에 훈민정음 해례본 해석을 연재했다. 

 

훈민정음 연구로 조선총독부가 주장하는 한글 창제 원리 폄훼를 반박했다. 1946년 훈민정음 연구용 영인본이 제작되어 근대적인 한글 연구가 시작되었다. 한글은 인류 역사상 유일하게 창제 동기와 원리가 밝혀진 문자이다. 간송 전형필은 한글 창제 원리를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간송 전형필은 해방 후 더이상 문화재 수집을 하지 않았다. 문화재 추기 수집 대신 교육 사업에 몰두했다. 

왜 문화재 추가 수집을 하지 않는냐고 물었다.

 

"이제는 독립이 됐으니 저는 좀 게을러도 됩니다,

누가 사도 우리 것 아닙니까"

-보성고교 교내 잡지 '인경' 인터뷰 中

 

1940년에 간송은 보성고보를 인수했다. 보성고보는 3.1운동 중심에 있었던 학교이다. 전국에 배포됐던 2만 장의 독립선언서를 보성고보 인쇄소 보성사에서 인쇄했다. 1940년 일제의 핍박아래 폐교 위기에 처했었는데 간송이 인수했다. 1940년대 보성고보의 이사장이 되었다. 교직원들의 자율권을 보장했고 일제는 일본인으로 바꾸라고 했지만 조선인 교원을 유지했고 우리의 말, 역사 교육을 비밀리에 실시했다.

고고미술동인회를 결성하여 미술사학자를 육성했다. 광복 후 인재 양성에 몰두했다. 

해방이후 1945년 1년간 학교 교장으로 재직했다. 교장 재직 독특한 학교 운영을 했다. 두발 자유화, 명찰 폐지, 학생들의 영화.연극 관람을 허가했다. 두발 규제는 일제 국군주의의 산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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