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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지식

냉혹한 통치자 조조

by 소시민스토리 2024. 6.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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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혹한 통치자 조조

권문세족 출신 군벌들에게는 책사가 많고 한미한 출신 군벌들에게는 무장이 많았다. 

조조일파는 책사도 많았고 무장도 많았다. 부하가 자신의 결점을 건의하면 언제든지 개선할 줄 알았다. 신상필벌이 아주 엄격했다. 반면에 재주나 공적이 있다면 상을 주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조조는 천명을 믿지 않고 운명을 믿지 않는 사고방식을 가진 인물이었다. 

 

조조는 유년기 제멋대로 행동하는 망나니였다. 임기응변에 능하고 속임수를 잘 쓰고 무술에도 뛰어나고 사냥과 놀이에 빠진 시기였다. 소설 삼국지에 숙부를 속인 사건이 나온다. 중풍 걸린 시늉을 해서 죄 없는 숙부를 골탕 먹인다. 젊은 시절 친구사이였던 원소와 같이 다니면서 장난치며 돌아다니다가 어느 날 결혼식을 하는 잔치집에 들어갔다. 둘이 꾀를 내어서 신부를 훔쳐 나오는 사건을 일으킨다. 발각이 되자 달아나면서 조조가 원소를 골탕 먹인다. 원소가 달아 난 쪽을 향해서 도둑놈이 신부를 업고 저쪽으로 달아났다고 소리친다. 오히려 원소는 그 덕분에 도망칠 수 있었다. 

 

청년기에는 공명을 세워보려고 안간힘을 쓴다. 상당히 과잉행동을 많이 한다.

통행금지를 어긴 고위직의 삼촌을 가차없이 처형해 버린다. 낙양이 뒤집어진 사건이었다. 낙양 북부위 때다. 청류淸流 대열에 끼어보려고 갖은 방법을 다 동원한다.  조조 자신의 출세 자체가 부친이 환관의 양자로 들어갔으니 탁류濁流였다. 탁류 대열에서 빠져나와서 청류 대열에 끼어보려고 하지만 청류 대열에서는 조조를 잘 받아들여 주지 않는다. 

 

청류 대열에 끼려고 갖은 노력을 하면서 시행착오를 겪는다. 그러면서 판단력이 치밀해지고 예리해진다. 세상 보는 안목을 갖추기 시작하는 시기였다. 

 

"治世之能臣 치세지능신 亂世之奸雄 난세지간웅

치세에는 능신이 되고 난세에는 간웅이 될 것이다."

-허소의 조조에 대한 평가

 

조조의 정치적 성공의 핵심은 '협천자이령제후' 이다.

"挾天子以令諸侯 협천자이령제후

천자를 끼고 제후들을 호령한다"

 

천자는 하나의 명의자로만 옆에 놔두고 모든 것은 본인이 명령하고 기획한다. 

동탁이 죽고 난 후 여포와 왕윤이 정권을 장악했다. 오래가지 못했다. 동탁의 부하 이각과 곽사가 장안으로 쳐들어와서 왕윤을 죽이고 여포를 내쫓는다. 이각과 곽사는 근본이 아주 무지막지한 무부들이었다. 전혀 정치를 몰랐고 자기들끼리 다툼을 벌였다. 내부 분란이 일어났고 참다못한 천자가 낙양으로 달아난다. 달아난 황제는 낙양에서 고생을 많이 한다. 가시밭 넝쿨 안에서 조회를 열고 하면서 대신들과 황제가 고생을 하고 있었다. 그럴 때 조조 진영에서 천자를 모시자는 말이 나온다. 순욱이 건의했다. 조조는 천자를 모실 계획을 짠다. 

 

"挾天子以令諸侯 협천자이령제후"는 효과는 많았다. 천자의 명의를 빌려서 모든 천하를 호령했다. 

예를 들어 관도대전에서 원소와 맞붙었을 때 중간지점에서 태도가 불분명한 군벌들이 있었다. 이 사람들은 원소 편이 될 수도 있고 조조 편이 될 수도 있었다. 10여 군벌들이 있었는데 확실한 편을 결정하지 않았다.

이때 조조는 사신을 파견해서 황제의 명의로 조조 편에 들도록 종용한다. 

 

한나라가 허수아비라도 한나라는 살아있었다. 황제의 명령을 거부할 수는 없었고 원소를 버리고 조조 편에 선다. 누가 봐도 조조와 원소가 대결하면 조조가 이길 수 없었다. 원소는 허베이 4개 주를 완전히 차지하고 막강했다. 그런데 조조는 황제를 모시고 있어 군벌들이 조조에게 모였다. 

 

인재들이 모여들었다. 황제들의 명으로 불러낸다. 유학의 정식 코스를 거쳐서 공부를 한 사람들은 황제의 명을 안 들을 수가 없었다.  원소 측에서는 조조가 황제를 협천자 하기 전에 저수가 협천자 하자고 원소에게 건의했다. 곽도와 순우경 같은 사람이 반대한다. 나중에 조조가 천자를 끼게 되고 여러 인재들을 불러 모으고 엄청나게 많은 이익을 보게 되니 원소는 그때서야 후회한다. 

 

 

 

조조의 경제적 성공 비결이 있었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는 부정부패가 만연해서 전국의 경제가 엉망진창이 되었다. 이후에는 군벌들이 난립해서 서로 날만 새면 전쟁을 했기 때문에 경제가 바닥이었다. 재건하지 않으면 백성들이 굶어 죽을 지경이 됐다. 

 

민둔은 유랑하는 백성들을 모아서 식량을 증산하는 것이다. 어떤 구역을 정해서 그 안에 들어간 사람은 다시 나오지를 못한다. 이주의 자유가 없었다. 강제 노동 구역이었다. 일종의 신종 농노제도와 비슷했다. 

민둔의 중요한 지역은 허현을 포함한 연천지구였는데 조조의 중점 민둔지역이었다.

 

여기서 민둔을 시작하고 첫 해에 100만 섬을 수확한다. 효과가 엄청났다. 관도대전 때 군량 공급을 여기서 했다. 관동 대기근이 났을 때 엄청나게 백성들이 굶어 죽었는데 500만 섬을 여기서 보내서 구제했다. 사마의가 했다.

매년 500만 섬을 생산했다. 6~7년 만에 3,000만 섬을 저장했다. 15만 명이 5년간 먹을 수 있는 양이었다. 

둔전제도가 성공함으로써 50만 대군의 군량문제가 완전히 해결됐다. 건안 중기쯤 천하에 창고가 넘쳐나고 백성들의 생활은 풍족하게 됐다. 그래서 사회경제적 발전에 민둔과 군둔이 큰 역할을 했다. 

 

조조의 군사적 성공비결은 강력한 지방 호족들이었다. 조홍, 조인, 하후돈, 허저 등은 초현지역 사람이다. 조조의 고향 사람들이었다. 초현 일대에 종족, 친척, 혈연, 지연이었다. 이 군사력이 조조의 핵심세력, 친위부대가 된다. 

 

아주 유명한 '전주'라는 사람이 있었다. 서무산에서 살았는데 수년 사이에 5천 호가 모이게 된다. 

그 단위 내에서 하나의 왕국을 이룬다. 거기서 법률을 정한다. 혼례법, 교육법, 민. 형사법, 사형제도까지 만든다. 이민족과도 교류를 하고 조공도 받았다. 왕국이 되었고 세력이 강하고 커지다 보니 대군벌 원소가 소환한다. 자기 밑으로 오라고 다섯 차례나 불렀지만 가지 않았다. 

조조가 삼군오환을 정벌할 때 조조에게 귀순한다.

 

 

영천 순씨, 순욱일파는 원래는 원소에게 의탁을 했었다. 나중에 조조에게 이동한다. 난세의 판단이었다. 원소 밑에 있어보니 자질을 알게 되고 그래서 조조에게 간다. 

이러한 종족과 부곡部曲의 대이동이 조조 군사력의 근간이 된다. 

 

조조는 개인적인 자질이 많았다. 일반 권문세족 출신과는 차이가 많았다. 조조는 천명을 믿지 않았고 운명을 믿지 않는 사고방식을 가졌다. 인재를 능력에 따라 적재적소에 기용할 줄 아는 능력이 있었다. 

조조는 전쟁이 일어나면 직접 일선에서 참여했다. 뒤에서 지시만 하지 않고 직접 피를 흘리며 군사들과 함께 싸우는 영도자였다. 부하들의 헌책과 건의를 분석해서 수용할 줄 아는 능력이 있었다. 잘못하면 처벌을 엄격하게 했다. 반면에 재주나 공적이 있으면 상을 주는데 인색하지 않았다. 

 

원소와 조조의 관도대전은 큰 전쟁이었다. 조조와 원소의 전략, 전술들이 모두 발휘된 전쟁이었다.

관도지역은 북방에서 원소가 있는 읍성에서 허도로 쳐내려 오는 길목이었다. 

반드시 거쳐야만 허도로 진격할 수 있었다. 공격하는 쪽은 원소였고 방어하는 쪽은 조조였다. 

하지만 오히려 조조가 기습을 한다. 

원소군의 군량 저장소를 기습해서 화공으로 완전히 태워버렸다. 결정적으로 원소 진영에서 패하게 되는 원인이 된다. 참모들 장수들이 서로 시기하고 의견이 어긋나서 인재들이 조조 편으로 투항을 한다. 

 

난세에서 천하통일에 가장 가까이 다가갔던 조조는 협천자를 시행한 탁월한 정치적 성과와 민둔과 군둔을 성공적으로 이끈 경제적 성과와 지방 호족 세력을 이용한 군사적 성과에는 조조의 시대를 뛰어넘은 리더십이 있었다.

 

잔인한 영웅 조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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