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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지식

잔인한 영웅 조조

by 소시민스토리 2024. 6.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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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인한 영웅 조조

"과연 조조는 백성들로부터 사랑받는 지도자였는가

아니면 백성들이 두려워한 지도자였는가?"

 

조조(155~220)는 삼국시대의 가장 걸출한 정치가, 군사가, 문학가로 위대한 인물이었다. 진수는 삼국지 무제기에서 조조를 평가했다.

非常之人 비상지인  매우 뛰어난 사람

超世之傑 초세지걸  시대를 초월한 영웅

 

 

 

삼국지에는 여러 군웅들의 외모에 대한 기록들이 많이 나온다. 하지만 조조의 외모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다. 조조는 인물이 없었다. 160cm 미만의 키와 몸이 옆으로 불어나고 얼굴이 동그랗고 눈도 동그랗고 통통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조조는 자신의 외모 콤플렉스가 많았던 사람이라서 남보다 더 많은 활동을 하고 더 많은 노력을 해서 성공했다는 평가도 있다. 

조조는 전형적인 이중인격자이며 극단적인 이기주의자에 상상치 못한 관대한 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여백사 사건을 예로 들 수 있다.

 

"내가 세상 사람을 버릴지언정 세상 사람이 날 버리게 할 수 없다"

자기를 도와준 여백사를 죽여놓고 한 말이다. 또한 조조는 아무리 공로가 많더라도 쓸모를 다하면 가차없이 제거해 버린다. 순욱은 조조의 사업을 반석 위에 올려놓은 사람이었다. 조조가 원정에 나서면 항상 수도를 지키고 조조의 중요한 사업들의 기초는 순욱이 거의 만들었다. 

 

모개는 조조의 건국 방침을 제일 먼저 건의한 사람이었다. 조조가 위왕이 될 때 반대를 한 사람들이다. 순욱과 모개를 감옥에 가두고 스스로 죽게 만든다. 

반면에 이득이 되기만 하면 아들을 죽이고 조카를 죽이고 심복을 죽인 원수라도 자기 사람으로 받아들였다. 남양의 장수(?~207)를 받아들인 경우다. 

 

성과를 올릴만한 능력만 있으면 귀천을 가리지 않고 도덕성도 가리지 않고 범죄 여부도 묻지 않고 무조건 등용했다. 

구현령求賢令은 신분을 막론하고 재능있는 사람이면 인재로 등용하는 것이다. 

형수와 사통한 범죄자일지라도 재주만 있으면 무조건 천거하라고 명한다. 목적을 위해서는 수만 명도 죽이고 수십만 명도 서슴없이 죽였다. 서주에 쳐들어가서 5 개성 백성들을 몰살시켰다. 서주 백성들을 다 죽인 것은 악인으로서 조조의 발목을 잡는 그런 사건이었다.

 

관동대전 이후 원소의 투항병들의 7만~8만 명을 땅을 파서 완전히 파묻어버렸다. 병아리, 강아지도 다 죽였다. 눈 한번 홀긴 사소한 원한도 하나하나 적어 놓았다가 복수하는 악랄함이 있는 가 하면 그 반면에 남의 자식을 죽여놓고 그 아버지에게 선물과 함께 위로 편지를 쓴 음험함도 있었다. 

양수의 일화가 있다. 군대의 사기를 올리기 위해서 죄없는 부하의 목을 쳤다. 원소를 토벌할 때 군량미가 부족하자 군량미 관리관 왕후를 죽여서 군사들의 사기를 올렸다. 

조조는 간악하고 음험하고 속임수 많고 거짓말 잘하고 잔인하고 살인을 좋아한 인물이었다.

 

현대에 와서 조조는 재평가된다. 조조 재평가 운동을 최초로 재개한 사람이 문학가,궈모뤄(곽말약)이다. 

<조조를 위하여 명예회복을 시키자>라는 문장을 발표한다.

내용의 요점은 조조는 1700년 전 고대 인민의 해방자였다. 황건 무리를 쳤지만 황건적의 난의 정신은 위배하지 않았다. 조조는 민족적 영웅이자 인민의 은인이다. 조조의 살인 행위는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고려하여 평가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조조는 농민반란군 때문에 성공한 인물이다. 황건족이 패배해서 도주한다. 조조는 제북까지 따라가서 황건적을 포위하게 된다. 황건족 30만 명이 투항한다. 그중에서 장정들 30만 명을 뽑아서 청주병 부대를 만든다. 

이 병력은 조조가 대군벌로 발돋움하는 확실한 밑천이 되었다. 농민반란군으로 인하여 조조가 성공하게 됐다. 농민반란군에 대한 조조의 인식은 다른 군벌들과는 달랐다. 원소는 흑산적 우독의 공격을 받고 원소는 5일 동안 포위 공격을 해서 우독과 만 명을 참수했다. 모조리 닥치는 대로 죽이고 그 무리의 수만 명의 목을 잘랐다. 죽이는 데만 주안점을 둔 것이다. 공손찬도 마찬가지였다. 청주, 서주에 있던 황건적을 동강에서 만나서 격파시키고 난 뒤 3만여 명의 목을 잘라버린다. 도주하는 황건족 수만 명을 살육한다. 그래서 강은 피로 물들였다.

 

원소와 공손찬은 농민군들을 무조건 도적이라고 보고 죽이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하지만 조조는 진입과 동시에 투항을 권유했다. 투항한 병사들은 본대로 편입해서 자기 군사로 만들어서 점점 병력이 증가했다. 

그런데 살인을 서슴치 않는 조조가 왜 농민군에게 관대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문학가 궈모뤄는 조조는 농민 의거의 정신을 같이 했고 고명한 처사였다고 옹호한다. 반면 조조는 현실적 계산에 능한 인물이어서 병력증강을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을 뿐이라고 많은 학자들은 주장한다.

 

중국 전국이 완전히 통일된 국가였을 때 힘이 넘쳐나서 팽창하던 시기에는 조조와 위나라가 정통이었다. 강하고 공격성이 있고 북방 이미지와 연결됐다. 반대로 피 침략시기 즉, 중원을 이민족이 차지하는 시기에는 유비와 촉한을 정통으로 했다. 중국 자체가 약하거나 침략을 당하거나 한족이 강남 이남으로 내려와서 정권을 세웠을 때 유비가 정통이냐 조조가 정통이냐 하는 것은 역사에 따라서 바뀌었다. 

 

조조의 문학적 이미지는 변하지 않았다. 북송대 나오는 소동파의 수필집에서는 유비가 쫓겨가는 장면에서는 아이들이 얼굴을 눈물을 흘리고 찡그리고 있다가 조조가 쫓기는 장면에서는 환호를 하고 박수를 치는 기록들이 나온다. 소동파의 수필집이 나올 때는 역사적으로 조조를 정통으로 보던 시기였다. 그런데 민가에서는 평가가 좋지 않았다는 것이다. 원나라 말기 명나라 초기에 나관중의 삼국지연의가 출현을 한다. 과거부터 내려오던 민간문예 등을 종합해서 소설을 만들어 냈다. 

 

조조는 악인 이미지가 성립이 돼서 600년 동안 악인의 표상이 되었다. 소설 삼국지에는 1230여 명이 등장한다. 용장, 책사, 영웅들 이런 사람들이 나오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빼어난 인물 세 사람을 삼절三絶이라고 한다. 모종강이 언급을 했다. 지절智絶은 제갈량, 의절義絶은 관우, 간절奸絶은 조조이다. 지절은 지혜의 화신, 의절은 의리의 화신, 간절은 간사함의 극치이다. 역대로 흘러온 간절奸絶 조조라는 이름이다. 

 

 

조조 옹호론자는 조조는 전란을 조기종식 시켰기 때문에 민중의 고통을 덜어주었다고 주장한다. 

조조는 필요에 따라 백성과 부하들을 부품 다루듯 했다. 사람을 꿰뚫어 보는 능력이 있던 정욱과 사마의는 조조를 두려워했다. 정욱은 어느 정도 공을 세우고 나서는 모든 관직을 싹 내놓는다. 사마의는 조조를 두려워했다. 조조가 몇 번을 불렀지만 가지 않았다. 누워있으면서 중풍이 들었다는 핑계를 대기도 했다. 

나중에 조조가 간파하고 사마의를 잡아오라고 했다.

 

제갈량과 방통은 조조 밑에서 일하느니 차라리 초야에서 썩겠다고 말한다. 조조는 뛰어난 능력에도 불구하고 천하통일을 못한 근본 원인은 비인간성이다.

소설 삼국지의 조조 모습은 영웅의 모습도 묘사했고 악당의 모습도 그대로 묘사했다. 조조는 영웅과 악당의 모습을 동시에 가진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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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처럼 떠올랐다가 연기처럼 사라진 영웅호걸, 원소원소는 대표적인 귀족 관료 출신이다. 삼국지에서 제일가는 금수저 인물이며 원소야말로 국가의 대들보라고 백성들은 생각했다. 단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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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 조조의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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