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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지식

김홍도의 진경산수화

by 소시민스토리 2024. 8.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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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의 진경산수화

서양 미술사는 인물의 역사라면 동양 미술사는 산수화의 역사이다. 서양인들은 우주의 중심을 사람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인물 그림을 중요하게 여겼다. 동양에서는 우주에서 사람은 작은 미약한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산수화에서 아주 작은 사람을 찾을 수 있다. 산수화는 있었으면 하는 아름다운 경치를 그리는 것이 산수화이다. 김홍도가 활동 시기 우리 산천山川을 화폭에 담으면서 진경산수화라고 부른다. 진경산수화의 창시자는 겸재 정선이었다. 정선(1676~1759)은 조선 후기의 문인화가였다.  정선이 우뚝하게 솟구쳐 놓은 진경산수화를 김홍도가 멋지게 마무리하게 된다. 

 

정선은 마음에 맞는 친구들과 한 달, 두 달 유람할 수 있었던 반면 김홍도는 도화서에 묶여있어 어명이 필요했다. 1788년 정조는 44살의 김홍도에게 강원도 아홉 개 군의 명승지名勝地를 사생해 오도록 명한다.

정조는 아홉 군의 해당 고을 수령들에게 특명을 내려 김홍도 사생 여행에 편의를 제공하도록 하게 된다. 금강산이 있는 회양부에 김홍도의 스승 표암 강세황의 맏자제, 강인을 부사로 임명해 내려 보낸다. 

그러니 강세황은 아들이 사또로 가 있는 회양에 놀러갔다. 회양에서 스승 강세황과 제자 김홍도가 함께 유람을 한다.  이때 김홍도는 금강산의 아름다운 절승 백여 점을 사생해 갖고 온다. 

※절승絶勝은 비할 데 없이 빼어나게 좋은 경치를 뜻한다.

훗날 100여 점의 사생 초본을 가지고 김홍도의 금강산의 세계가 펼쳐진다. 

 

"금강산에 가서 구룡폭포를 못 보고 왔다면 금강산 갔다 왔다고 하지 말라"

 

구룡폭포는 50m 짜리 장대한 폭포로 외금강의 일등, 금강산의 일등으로 손꼽힌다. 

 

 

 

<구룡연> 김홍도作

 

김홍도는 구룡폭포를 사진을 찍은 것처럼 정확하게 묘사했다. 정조는 김홍도가 그린 이 그림을 통해 몸은 창덕궁에 있지만 마음은 금강산을 노닐 수 있었다. 

'구룡연'이라 써 있다. 연은 못 연淵이며 아래의 물웅덩이를 중심으로 해서 이야기할 때는 '구룡연', 떨어지는 물줄기를 중심으로 할 때는 '구룡폭포'라고 한다. 물웅덩이에는 9마리의 용이 깃들였다고 한다. 

김홍도는 이 구룡연을 조금 시간이 흘러 더 멋들어지게 바꿔놓았다.

 

 

비단에 구룡폭포를 다시 그렸다. 폭포가 훨씬 더 길어졌다. 말년에 보이는 대로 그리는 것을 넘어서 훨씬 더 멋들어지게 꾸며 놓았다. 김홍도 최고의 구룡폭포이다. 구룡폭포 아래 오른쪽의 바윗덩어리 왼쪽에 계단 하나가 걸쳐있다. 선비가 엉거주춤 내려오고 있다. 경사가 급하여 조심스럽게 내려오고 있고 그 모습을 뒤에 있는 선비가 지긋이 지켜보고 있다. 두 선비 덕분에 구룡폭포를 제대로 볼 수 있다. 이것이 옛 진경산수화 감상의 즐거움이다. 김홍도는 감상평을 읊었다.

 

"절벽에 올라서면 

미끄러지는 발을 걱정하고 

 

골안에 들어서면 

무서워 달아나려는 마음을 

쫓아버리니.

 

항상 못 속의 아홉 용이

사람을 못났다고 웃을까 걱정이다"

 

처음에 멀리서 볼 때는 장대한 경치에 오금이 저렸는데 막상 골짜기 안으로 들어가니 너무나 아름다워 머물고 싶다는 마음을 읊었다. 김홍도의 그림을 통해 옛 선비들의 유람遊覽 문화를 알 수 있다. 

 

김홍도 48세에 단양 근처 연풍현 사또로 나간다. 한국에서 가장 강 풍경과 산 풍경이 좋다는 단양팔경, 연풍현 옆에 있는 단양팔경을 노닐면서 단양팔경을 그려오라는 정조의 배려가 있었다.

※단양팔경(丹陽八景)은 단양군에 있는 8가지의 명승지를 뜻한다. 

김홍도가 연풍현감 시절 남긴 단양팔경 진경산수화가 있다. 

 

 

 

<옥순봉> 김홍도作

 

병진춘사, 병진년丙辰年 봄에 그리다'라고 정확한 그림 연도를 밝히고 있다. 1796년 병진년에 한양에서 <옥순봉>을 52세의 김홍도가 그렸다.

한양으로 돌아오면서 무수한 사생 초본을 가지고 그림으로 꾸며 놓았다. 

아래쪽 작은 조각배에 선비 두 명이 앉아있다.  뒤쪽에는 갓이 없는 뱃사공이 있다. 왼쪽 선비는 손을 들어 옥순봉을 가리키고 다른 선비는 그것을 지긋이 바라보고 있다. 진경산수화 선비 그리는 법 중 하나이다. 항상 손 든 사람을 그려 넣는다. 손을 들었다는 것은 친구에게 뭔가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소리 없는 그림에 말소리를 집어넣는 방법이다.

 

 

<도담삼봉>김홍도作

 

도담삼봉의 '도담'은 섬이 있는 못이라는 뜻이다. 거기에 봉우리가 세 개, 그래서 '삼봉'이라고 한다. 

아랫부분의 오른쪽에 말 두 마리가 대기하고 있다. 왼쪽에 갓 쓴 선비 두 명이 있다. 김홍도와 절친이다. 김홍도 연풍현감 시절 다른 풍속화이다. 

 

 

 

<편주도해> 조각배로 바다를 건너다. 김홍도作

 

김홍도는 이상산수화를 그렸다. 우리 산천 어디엔가 실제 있을 법한 모습으로 그렸다. 아주 넓은 바닷속에 기암괴석들이 우뚝한 모습이 오롯이 담겨있다. 동양화의 생명은 여백이다. 여백은 하늘과 바다와 돌기둥을 하나로 묶어주는 핵심역할을 한다.  서양 그림은 잘 채워야 한다. 동양 그림은 잘 비워야 한다. 비우는 것이 가장 중요한 그림이 산수화이다. 오른쪽에 서명은 '단구'라고 했다. 김홍도는 연풍현감 이후 호를 '단구'라고 썼다. 단구는 단양의 다른 이름이다. 그래서 이 그림은 50대 이후에 그린 것을 자연스럽게 드러냈다. 

사람을 확대해서 보면 사람의 눈, 코, 잎이 없다. 산수화를 그리는 방법 중 '멀리 있는 사람의 이목구비는 그리지 않는다'가 있다. 

 

 

 

<무이귀도>무이산으로 노 저어 돌아가다. 김홍도作

 

'무이산'은 중국의 유명한 명산이다. 김홍도가 중국을 갔다 온 기록은 있지만 복건성에 있는 무이산을 다녀온 기록은 없다. 

※복건성(福建省, 푸젠성)은 중국 본토 남동쪽에 있는 성이다. 

무이귀도는 김홍도가 상상해서 그린 산수화이다. 진경산수화 대가였던 김홍도가 마음속으로 무이산 계곡을 옮겨내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무이산에서 노 저었던 그 주인공은 성리학을 완성시킨 주희 선생이다. 중국에서 위대한 성인들은 이름을 부르지 않고 자子를 붙인다. 주자朱子라고 말한다.

※주희(朱喜,1130~1200)는 중국 송나라의 유학자이다. 

 

주자가 무이산에서 은거하며 아름다운 계곡 아홉 군이마다 읊은 시, 무이구곡이 있다. 

조선 선비들은 주자가 읊은 무이구곡을 사랑하고 애용한다. 김홍도가 그린 무이산에 김홍도 15년 후배였던 기원 유한지가 제목을 붙여 놓았다. 무이귀도라고 멋지게 썼고 서명은 '단구'라고 했다.

※유한지(1760~1834)는 조선 후기 문인 겸 서예가이다.

제목은 유한지가 썼고 서명은 김홍도가 했다. 서명을 통해 김홍도가 50대 이후에 그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작은 나무배에 많은 사람들이 타고 있다. 가운데 앉아있는 사람은 주자 선생, 주변의 사람들은 급한 물살에 배가 뒤집힐까 노심초사해 떨고 있는 모습, 왼쪽에 뱃사공들이 배가 절벽에 부딪힐까 봐 긴 장대 두 개로 벽을 밀어내고 있다. 이런 급한 순간에도 의젓함을 잃지 않는 주자선생이다. 그림 속 옷차림은 중국풍이지만 얼굴은 김홍도가 그린 많은 풍속화에 나왔던 얼굴이다. 오른쪽 바위 절벽에 자라고 있는 소나무들도 김홍도 진경산수화에서 늘 보아왔던 소나무이다. 중국 소재를 조선화시킨 무이귀도는 김홍도가 말년에 도달한 아름다운 산수화의 세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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